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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송정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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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50 조회1,7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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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송정근 목사


 

 송정근은 1895년 1월 12일 황해도 서흥군 도면도리에서, 그 고을 유지 송경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송정근의 집은 엄격하게 공맹의 도리를 따르는 집안이라, 송정근은 다섯 살 때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했고, 본인 또한 열심히 공부를 해서 7 살 때에는 대학을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송정근은 사서삼경을 다 읽고 나서, 평양지역에서 활동하는 모팻선교사가 세우고, 용연리 교회가 운영하는 양몽학교(養夢學校) 고등과에 입학을 했다. ‘양몽(養夢)’이란 말은 꿈을 길러준다는 의미였다.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형편은 꿈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팻은 조선사람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어서, 양몽이란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송정근은 양몽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에 진학을 했고, 숭실중학교에 다니며 비로서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했다. 당시에 송정근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숭실학교의 교장인 베어드(Baird. William Martyre:배위량)의 영향이 컸다. 베어드는 학교 운영에 세 가지 목표를 두었는데, 베어드가 내건 목표는 ‘(1) 책임있는 일꾼을 양성한다. (2) 인격적 인간을 양성한다. (3) 진정한 종교인을 양성한다.’였다. 송정근은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을 전도인으로 활동하다가 목사가 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평양신학교에 진학을 했다. 하지만 평양신학교 1년을 수료하고는, 감리교의 전도인이 되어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감리교회 전도인으로 활동을 하다가, 1923년에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에 편입학을 해서, 1927년에 협성신학교 제14회로 졸업을 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송정근은 개성의 토산교회를 비롯하여, 양양, 고저, 백석리, 고성, 강서읍 교회 등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특히 강서교회에서는 7년 동안을 담임하면서, 서부연회 감리사 역할까지 감당하면서, 교회를 많이 개척해서, 튼튼한 조직을 구축했다. 하지만 송정근 목사는 일제말기에는 평양의 기림리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일제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경에 의해서 교회 출입문이 못질을 당하는 방법으로 교회가 폐쇄되었고, 송정근 목사는 목사직을 박탈을 당하고, 감리교회에서 쫓겨나서, 황해도 산골에 있는 토굴속에서 살면서 기도생활에 전념을 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이때부터 당시 서부연회를 이끄는 김화식 목사와 기독교민주당 창당운동에 참가 하였으나, 1947년 11월 19일 창당멤버 40여명이 검속되는 바람에 이 운동은 와해되고 말았다. 신석구 목사의 탄원으로 풀려난 송정근 목사는 사경을 헤매다가 극적으로 살아나 성화신학교 이사장직을 수행해 나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평양신학교 3백명, 성화신학교에도 3백명의 신학생들이 몰려들자, 이런 현상에 긴장한 공산당은 두 신학교를 하나의 기독교신학교로 합병하라고 강요를 했고, 이에 대하여 두 신학교는 공산당의 강요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50년 6월 24일 늦은 토요일 밤에 공산당은 송정근 목사의 자택에 찾아와서 송정근 목사를 어디론가 끌고 가버렸다. 송정근 목사는 이렇게 사라졌다. 그가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는, 전혀 세상에 알려진바가 없다. 하지만 송정근 목사는 늘 자신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서 초개같이 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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