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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신석구 목사 - 호 은재(殷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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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51 조회1,9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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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신석구 목사 - 호 은재(殷哉)

 

 

신석구는 1875년 충북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유학자 신재기씨의 2남으로 출생했다. 머리가 비상하여 10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줄줄 외울정도였고, 11세에 향리에 있는 서당의 훈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5세 때 아버지를 잃은 후부터 집을 떠나 방황하였다. 이후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경기도 고랑포에서 친구 김진우의 권유를 받아 민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신석구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갔으니, 1907년 7월 14일 주일, 그의 나이 33세때의 일이다. 신석구는 〈자서전〉을 통해서,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히 구원할 것이다."

신석구는 예수를 구주로 믿은 지, 한 달 반 후에 같은 고향 출신인 정춘수를 만나서, 개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선교사 리드(C.F. Reid, 李德)의 어학선생으로 일하면서, 1908년 왓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를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구국운동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1908년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로 교역의 길에 올랐다. 1912년 9월에는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어, 홍천, 가평, 춘천등지에서 목회하면서, 민족계몽과 민족정신 함양에 몰두하였다. 1917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수표교회에 부임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신앙으로 결단하고, 민족의 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신석구 목사는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오화영 목사에게서 민족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바로 결정할 수가 없어서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 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즉각에 곧 뜻을 결정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곧 바로 응답하여,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읋 한 혐의로 체포된 신석구는 목사는 재판정에서도 "나는 한일합병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고, 조선 독립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아, 2년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이 터졌을 때에는 33인 민족대표로 활동을 했고, 24인 결사대를 주축으로 만세를 부르며 창령경찰서 및 영산주재소를 습격하는 항일투쟁을 지도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을 했다.

1921년 11월 만기 출옥 후에는 원산, 고성, 춘천, 가평, 서울, 철원, 한포, 천안 등지에서 목회했다. 그리고 옥고를 치르면서 중단했던 학업도 계속하여, 1922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출옥 후에 신석구 목사는 협성신학교에 다니면서 신학교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며 학생들에게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신학교 기숙사가 요란하여 심목사가 들어갔더니 학생들이 장기를 두면서 훈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신석구 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학생들, 성경 보고 기도하시오!" 하고 뒤돌아서자, 그 자리에 있었던 학생들이 모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또 1934년의 감리교신학교 특별 부흥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참 신앙노선과 민족을 위한 사명자에 관하여 강조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신석구 목사는 목회생활을 하면서 겪어야만 했던 가난의 문제로 고민을 하였는데, 1925년 고성교회로 파송을 받으면서 시작된 "물질의 유혹"은, 그 후 10여년간 신석구 목사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러던 신석구 목사가 가난의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이 된 것은, 1937년 천안에서 목회를 하던 때였습니다. 신석구 목사는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다가, ‘내가 네게 좋은 집을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던 십자가를 주었다.’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신석구 목사는 이런 하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너무 감격하고 많이 울었는데, 그 후부터 지금까지 당했던 가난의 아픔이 모두 사라졌고,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간혹 악마의 유혹이 있었으나, 십자가로 물리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 말기에 신석구 목사는 감리교단의 방침과는 달리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신사가 없는 외딴 곳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와 문애리에서 목회를 하였고, 1945년 5월에는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다가,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는데, 일본이 패망함으로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후에도 교회를 맡아보면서, 교회 재건에 힘을 쓰는 한편 평양의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에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1946년부터는 공산정권과 대립하여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3.1절 기념방송을 하면서, 공산당이 작성한 원고 대신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여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생을 했고, 또 공산당이 주는 3.1절 공로표창을 거부하였고, 북조선인민위원회 성립에 대해 냉소적이었을 뿐 아니라 "식량이 결핍함으로 인민의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고, 남.북이 대립됨으로 장래에 무삼불측의 사가 유할가 하야, 인심이 동요되는 것은 현저 사실이온즉, 이는 깊이 우려해야 할 것“이라고 공산당에게 충고를 하는 등, 당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서 공산당의 탄압을 받았다.
    신석구 목사는 신변이 위험해지자 그를 따르던 교인들이 남한으로의 탈출계획을 세웠으나, 신목사는 "북한 땅에 남아 있는 어린양들을 이리떼 같은 공산당에게 맡기고 어찌 나의 안일만을 위해 이남으로 가겠느냐?"라고 하면서, 거절하고 끝까지 북한 땅에 남았다. 그 후 반공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고, 공산당이 조작한 "진남포 4.19사건"으로 1949년 4월 19일 우익인사 47명과 함께 체포되어서, 10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함께 잡힌 젊은이들은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6년형을 선고받은 두 여학생을 측은히 여겨, 그 두 학생의 형을 합산하여 자신이 22년형을 받을 터이니, 그들을 석방하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옥중에서도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키고 위로하였다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여, 그의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의 길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편 신석구 목사는 풍부한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여 많은 한시를 남겼다. 또 일생 동안 무명옷으로 된 한복만을 입는 검소함도 몸소 실천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청렴과 결백으로 목회를 하였다. 그의 전 생애는 십자가를 잠시도 내려놓지 않고, 지고 가는 생애였다. 그는 입으로만 교훈하지 않고, 늘 몸으로 실천하였고, 늘 자기의 잘못을 간증하며 눈물로 설교하던 목회자였다. 한국정부는 그의 반일 독립투쟁 업적과 공헌을 기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하였고, 1968년 9월 14일에는 그의 영현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8년 3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에 건립된 "감신 출신 민족 대표상"에 다른 다섯 분과 함께 그의 흉상이 새겨졌고, 1980년 8월에는 청주시 3.1공원에 충북도민의 성금으로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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