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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임광호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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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59 조회1,8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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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임광호 전도사

 

 

   임광호 전도사는 1923년 3월 15일 황해도 신천에서 부친 임씨의 9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장성해서는 만주 길림성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고,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고국으로 둘아 와서는, 당시 한반도의 북쪽을 장악한 공산당 세력의 핍박 때문에 견디다 못하여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부여 감리교회에서 첫 목회로 시작하였다. 하리성결교회를  개척하였고, 개척과 동시에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는데, 예배당을 건축하는 중에 북한 공산군에 의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고, 공산군이 소련탱크를 앞세워 남한을 침략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 공산군이 내려오자 임광호 전도사는 1950년 7월 10일 공산당에 체포되어 신앙포기를 강요하는 고문을 당하다가 1950년 7월 20일 저녁 6시경 삼례 와리 월산리 바위 밑에서 순교를 했다. 

    임광호 전도사가 방금 개척한 하리 성결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부흥이 되고 온 동리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게 되자 공산당은 이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리마다 임광호전도사를 칭찬하고 많은 청년들이 임광호 전도사를 따르고, 신뢰하는 모양이 공산당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임광호 전도사는 아픈 사람이 있으면 논밭에 까지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위해서 기도해주니 주님들의 사랑과 신뢰를 더 받았다. 그 때문에 공산당은 임전도사를 지서로 불러서는 조사를 하고 풀어주기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하였다. 공산당은 교회의 교인 숫자가 자꾸만 많아지니까 신경이 쓰여서, 임전도사를 핍박했고, 짓고 있는 예배당을 짓지 못하도록 훼방을 하면서, 하리성결교회에서 중심적인 지도자로 목회자로 다수의 교인과 주민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임광호 전도사를 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왔다. 

     이런 형편에서 1950년 7월 10일 하리성결교회에서는 잔치를 하기 위해 온 교인들이 모여서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골 동리에 있는 교회에서 하는 잔치이니 온 동리의 잔치이기도 했다. 이처럼 분주한 때에 공산당은 임광호 전도사를 잠깐이면 된다고 하면서, 런닝셔츠 차림으로 불러 갔는데, 임광호 전도사는 그 뒤로 돌아오지 못했다. 삼례초등학교 치안대에 갇혀 있다고 하여 임광호 전도사 아내가 면회를 가보니 다른 방은 여러 명이 함께 있는데, 임전도사만은 ‘예수믿는 독한 놈’이라고 해서 독방에 가두었다고 한다. 면회온 아내에게 임광호 전도사는 교회와 교인들의 안부를 물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곧 나가게 될거라고 하면서 아내를 돌려보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교회는 계속해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었으며, 며칠 뒤에 아내가 다시 면회를 갔더니 임전도사는 이미 그곳에 없었는데, 나중에 들은 말로는 공산군이 7월 20일경 밤중에 몇 사람을 끌고 갔는데, 임공호 전도사는 그 자리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임광호 전도사가 순교한 까닭은 ‘예수 믿는다’고 ‘예수쟁이’라고 ‘공산당에 협조 안한다’는 이유로, ‘몽둥이와 삽과 괭이로 때려 죽여야 한다’고 ‘이런 놈은 총알이 아깝다’고 하면서 매일같이 ‘너 예수 안 믿고 공산당에 협조하면 당장 살려주겠다.’라고 하면서 위협하고 때리고 고문을 했다고 한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매일 임광호 전도사를 심문하고 고문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7월 20일 밤에도 심문관이 갖은 욕을 하면서, ‘예수만 안 믿는다고 하면 당장 살려준다.’고 유혹을 했어도, 임전도사는 오히려 ‘당신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하리교회 고백하 집사와 삼례장로교 강장로 딸과 당시 감옥에서 갇혔다가 살아남은 이들이 전해주었다. 공산당은 임전도사를 죽이고 2-3일 후 김복순 사모를 체포하고는 ‘예수 안 믿으면 남편을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심한 고문과 협박을 했지만, 기복순 사모는 오히려 ‘당신들도 예수 믿으라.’고 담대하게 맞섰다고 한다. 공산군은 김복순 사모를 3일동안 눈을 가리고 총을 목에다 들여대면서 이리 저리 끌고 다녔지만, 남편과 같이 담대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증거하는 김복순 사모를 보면서, '지 남편과 똑같구만,'하며 풀어주었다. 김복순 사모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남편이 순교한 빈자리인 하리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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