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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장석팔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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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00 조회1,6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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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장석팔 장로

 

 

출 생 일 : 1894. 06. 15 ․ 순 교 일 : 1950. 09. 11  ․ 교단 : 감리교 

 

 장석팔 장로는 1894년 6월 15일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문수학을 했고, 성장해서는 홍성 농업전수학교에 진학해서 졸업을 했다. 그 후 농업기사로 홍성군청에 취직하여 근무를 하였다.  

본인은 비록 군청직원으로 살고 있지만, 잔학한 일제의 수탈로 나날이 피폐되어가는 조국의 농촌을 바라보는 장석팔의 마음은 한없이 괴로웠다. 그러던 가운데 갈산면에서 근무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갈산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으면서 오히려 공무원 노릇을 하는 것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라는 이해 때문에 마음 고통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홍성군에 사직서를 내고,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사실 당시에 군청직원의 직위를 사임한다는 것은 가진 특권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예수 믿으면, 사람 버리고, 집안 망한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반대는 극심하였다. 나름대로 농민들을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차린 정미소 사업이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서 번성하여 재물을 모으게 되자, 주민들과 가족의 인식이 달라졌다. 

1925년 장석팔은 선교사 사프에게 세례를 받고, 1933년 본처 전도사(지금의 장로)가 되었다. 직접 자신이 응봉교회를 설립하고, 지역복음화에 힘을 썼고, 특별히 빈민구제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일제가 패망하면서 해방을 맞게 되자, 해방 공간에서는 응봉면장, 국민회 회장, 학교 후원회장 등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그러다가 북한 공산군에 의하여 6.25전쟁이 발발하고, 응봉지역에까지 공산군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 험한 일제치하에서도 오직 교회와 주민을 위해서 살아온 장석팔 장로는 공산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주였고 교회의 장로인 장석팔을 공산당이 그대로 둘리가 없었다. 공산당은 장석팔을 체포해서는 믿음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면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장석팔을 쉽게 제거할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하자, 먼저 교인들을 색출해서 탄압하기 위하여 장석팔에게 교인명부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장석팔은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다니며 전도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한, 양들을 공산당에게 내어줄 수가 없어서,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하자, 공산당은 장석팔을 해방된 조국에 비협조하는 반동으로 단죄하고, 모진 고문을 가한 후에, 1950년 9월11일에 돌로 쳐서 죽였다. 평생을 열심히 일하면서 이 땅의 농촌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자 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사람들과 교인들을 보살피던 장석팔은 그렇게 양떼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선한목자의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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