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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전진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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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02 조회1,9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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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전진규 목사


 

항영서원. 송도고보1회 졸업 / 일본 관서학원 신학부(신호) 졸업 / 연희전문 문과 졸업 / 강원도 이천읍교회 원산 중앙교회 서울 성동교회 

 철원지방 감리사 루시학교, / 구세병원 이사장 역임 

 

 전진규 목사는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읍내에서 전사명(全士明)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국사편수관을 지낸 아버지 전사명은 기독교에 입교한 후 소실을 보내고 주초를 금하며 철저한 가정예배와 십일조를 이행하는 등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런 행위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 이후 새롭게 형성된, 한국 기독교인의 새로운 윤리의식 형성과 관계된다.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그의 순회집회를 통해 서울ㆍ개성ㆍ평양 등지로 확산된 원산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인의 집단적 공개회개와 중생체험을 이끌어냈다. 이후 종래 전통문화와 사회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전혀 죄의식 없이 행해지던 축첩과 흡연과 아편, 음주, 노름 등의 행위들이 "죄"로 인식되는 새로운 기독교적 윤리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전사명은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의 평양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어간에 기독교에 입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사명은 장단읍교회에서 교역자가 많이 나기를 기도하였는데, 자신도 맏아들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읽고, 맏아들인 진규를 바쳐 목사가 되게 했으며, 나중에는 스스로도 감리교 전도인이 되었다. 과연 전사명의 기도대로 장단읍교회에서 목사 다섯 사람이 났는데, 곧 "전진규, 이호빈, 신후승, 이인구, 이진구"이고, 장단군에서는 감리교 남녀 교역자만 50여 명이 배출되었다. 이런 부친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전진규는 어려서부터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목회자가 되었다. 

 

1900년 3월부터 1907년 8월까지 한문을 공부하였고, 1911년 5월 한영서원을 졸업하였으며, 1918년 3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하여, 1918년 4월부터 1919년 6월까지 칸사이(關西)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고,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09년 8월 15일 세례 받은 전진규는 1919년 10월 1일 강원도 이천읍(伊川邑)교회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1920년 8월까지 활동하였고, 1920년 3월 27일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이후 1921년 9월부터 남산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1922년 8월까지 활동했다. 

 

1924년 연회학습을 받았고, 1925년 4월부터 강원도 이천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그 해 9월 6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26년 9월 연회 정회원으로 허입되었다. 1926년 9월부터 개성 동문내교회를 담임하였고, 1927년 9월 개성중앙교회로 전임하였다. 1931년 6월 개성 북부교회당에서 모였던 제1회 동부ㆍ중부ㆍ서부 연합연회에서 철원읍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 4월부터 철원지방 감리사로 시무하였다. 

 

1935년 4월 원산중앙교회로 전임하였고, 1942년 진남포 신흥리교회로 전임하였으며, 그 해 다시 해주 남본정교회로 전임하였다. 1946년 9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장단중학교 교장으로 시무하다가, 이후 의정부교회를 담임하여 시무하였고, 1949년 8월부터 성동교회(현 보문제일교회) 담임 겸 서울동지방 감리사로 시무하였다. 당시 복흥파와 재건파 합동추진위원회 회장을 맡아 양파 합동총회 사회를 보며 통합을 위해 수고하였다. 

 

성동교회 김덕환 장로는 전진규목사에 대하여 회고하기를, "전 목사님은 원래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하시며 또한 매사에 조밀하여 모든 일들을 관용과 아량으로 처리하시던, 실로 뭇 양들에게 진실 되고 성실하던 목자로서, 전 교우들의 신앙의 스승이자 푯대로서, 특히 젊은이들의 부모로서 엄하시고, 젊은이들의 의지를 꺾지 않는, 전 교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기에 부끄러움이 없었던 목사님이었다."라고 했다. 전진규 목사는 성동교회 부임 후 임원회의 결의를 통해, 교회개축사업을 작정하고, 당시 총리원에 건축비 보조를 신청하여 거의 확정을 보게 되어, 교회개축이라는 큰 꿈의 실현을 눈앞에 두었는데, 뜻밖에도 6.25전쟁이 발발했다. 공산군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갔으나,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이때 전진규 목사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하여 서울이 완전히 점령된 후에도 7월 한 달 동안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당시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종교의 자유를 공공연히 이야기했지만, 향후 인민군의 돌변을 염려한 교회의 중직들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목사관에 모여 전 목사에게 피난할 것을 강력히 권유하였으나, 전진규목사는 피난 가기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평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주님께 서약을 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길 잃은 양들을 이리떼 속에 버려둔 채 피난이 웬 말이냐. 양떼를 위하여 목자가 피 흘리고 희생함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그 소명을 기꺼이 따르겠노라."라고 했다. 그 후 8월 23일,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감리교 목사들의 교역자회의가 중앙교회에서 열리게 되어, 교역자 회의에 참석하고자 출타했다가, 김유순 감독 및 박만춘 전도국장 등과 함께 인민군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되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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