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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조상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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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03 조회1,9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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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순교자 열전,  조상문 목사


 

 조상문은 1898년 5월 14일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에서 출생하였으며, 당시 강화는 감리교 선교가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여서, 조상문의 부모님도 예수를 믿고 믿음생활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조상문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신앙을 따라서 감리교회(당시 피미교회로 추정)에 출석을 하였다. 조상문은 온수리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피어선 성경학교를 마친 뒤, 감리교 협성신학교로 진학을 하여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협성신학교 11회로 졸업한 조상문은 1926년부터 인천 화도교회로 시작하여 덕적, 부평, 부천구역을 담당하는 전도사로 열심을 다하다가 1928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전영택, 이은택, 변홍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1931년 홍천 서구역, 1932년 단양구역, 1933년 횡성구역, 1935년 충주구역 등에서 목회를 하였고, 1937년에는 원주구역을 담임하면서 원주지방 감리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특별히 1933년에는 강문호 목사를 대신하여 횡성구역에서 목회를 하였는데, 조상문 목사가 담임했을 때에 횡성교회는 청년회 활동이 활발했는데, 55명의 청년들이 모여서 엡윗청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탁영재 전도사와 함께 주일학교를 위해서도 활발히 활동을 하였다. 1939년 수원구역으로 옮겼고 수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했으며, 이후 일제 말에는 강화군 양도면 흥천교회를 담임하다가 해방을 맞았고, 해방 이후에 재건파 소속으로 강화읍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복흥파와 재건파가 연합하면서 1949년 감독에 선출된 김유순 감독의 후임으로 서울 아현교회에 1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이때 총리원 이사와 전도국 위원으로 피선이 되어 활동하였다. 당시 아현교회의 교인들은 조상문 목사에 대하여 성품이 자상하고, 엄하며 모든 면에서 꼼꼼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당시 아현교회 교인은 2백 명 정도 되었고, 중등부가 40명, 고등부가 40명 정도로 젊은이가 많았으며, 부인 전혜숙(全惠淑)도 교회에 여러모로 봉사하였다고 한다. 평신도로 시작된 통합운동에 지도자들이 각성하여 마침내 1949년 교단통합이 이루어져 기독교감리회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이 때 아현교회 담임목사 김유순이 초대감독이 되면서 그 후임으로 재건파 중심인물인 조상문을 아현교회로 파송하였다. 또 총리원 재단이사로 선임된 조상문은 일제의 잔재였던 해방 후의 교회재산을 정리하였다. 교회행정에 뛰어났던 조상문은 심방과 개인전도에 대한 열심도 대단하여, 부임 1년이 못 되어 교회의자를 새로 구입하여야 했다고 한다. 아현교회가 성장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던 때에 6.25전쟁이 공산군에 의하여 발발했다. 조상문은 가족을 피난시켰지만, 자신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감리교단을 지키려는 김유순 감독과 함께 교회를 지키는 조상문의 모습은 감리교회사의 미담이다. 공산군이 패퇴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할 때, 1950년 8월 23일 아침8시 북아현교회 담임목사 사택에서 퇴각하던 공산당 정치보위부원에 연행하여 간 후에 조상문을 본 사람은 없었다. 

 

 

 

- 온수리 보통학교 졸업

- 피어선 성경학교 졸업

- 1925년 협성신학교 졸업

- 화도교회. 수원읍교회. 북아현교회

- 원주지역 가리사 역임 

- 총리원 재단이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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