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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 제주도 선교의 개척자 이기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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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0:53 조회1,8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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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 제주도 선교의 개척자 이기풍 목사

 

   평양성에서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한 거한이 갈지 자 걸음으로 평양성 거리를 비틀거리며 가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하였더니, 평양 유수의 행차라는 것이었다.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증오에 찬 눈으로 유수의 행렬을 노려보았다. "저 고약한 진드기 같은 놈,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뱃가죽에 살이 디룩디룩 찐 날도둑 같은 놈!" 착한 백성은 고개를 숙여 좌수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나 그는 팔뚝 근육에 힘줄이 섰다. 그는 순간 몸을 날려 유수의 다리를 덥썩 쥐어 끌어당기더니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야! 이기풍이다. 거 후련하게 잘 했다." 백성들은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가서 꼬박 석달동안 형틀을 쓰고 옥살이를 하였다. 옥에서 풀려 나온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은 수없이 일어났다. 이기풍은 1868년에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문무를 겸한 호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대동강변에서 벌이는 석전에서 동편의 총대장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여섯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였다. 이런 실력이 후에 길선주 목사가 눈이 어둡게 되었을 때에 그의 대필자가 되기도 하였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대문을 나서는데 생전 처음 보는 코 큰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가 다름 아닌 마포삼열(S. A. Moffett) 선교사였다. "저 양코배기가 뭘 하러 여기 왔노? 저것들도 날도둑놈들 아닌가? 저놈들을 하루 속히 우리나라에서 몰아내자." 이기풍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이 솟았다. 그는 즉시 대동강 석전의 명수 대여섯 명을 이끌고 바로 마포삼열 선교사 집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대문을 여러 차례 걷어찼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요새끼들 맛좀 봐라.", 왈패들은 집 근처에 있는 돌들을 전부 주워 모아왔다. 이기풍의 신호가 떨어지자, 돌들이 우박처럼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유리창이며 기왓장이며 모두 삽시간에 박살이 나버렸다. 그런 판인데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기풍은 양코배기와 직접 대면하지 못해 못내 개운치가 않았다. 그런 후 한 달. 이기풍은 장터를 지나다가 다시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다. "너 잘 만났다. 내 돌 맛 좀 봐라.", 석전의 명수가 던진 돌멩이는 마포삼열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다.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통쾌히 여기고 바람같이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밥맛을 잃게 되었다. 이밖에도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 건축공사를 방해한 일 등의 일화가 많다.

 

  회심; 청일전쟁으로 인하여 이기풍 일가는 원산으로 피난을 가서 살게 되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를 보자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전처럼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이었다. "내가 왜 죄 없는 사람을 돌로 쳤을까? 그 사람은 왜 돌에 맞고도 아무 반항을 하지 않았을까?" 평양 장터에서 양코배기에게 돌팔매질하던 일을 후회하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서 꿇어 앉아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즉시 예수 믿는 친구를 찾아가 이 사실을 얘기하였다. 친구는 놀라서 이기풍을 이끌고 스왈른 선교사를 찾아갔다. 이기풍은 선교사에게 과거의 못된 짓을 눈물로 다 고백하고 예수를 믿기로 맹세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평양의 사울이 변하여 바울로 거듭났다. 이기풍은 1896년에 세례를 받고 조사(助事)가 되어 재령지구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01년에 장로가 되어 그해 신학교육을 받다가 1903년에 평양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여 이기풍은 자기가 돌로 쳤던 마포삼열 목사가 세운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가 노회장으로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한국장로회 최초의 노회에서 "이기풍씨를 제주 선교사로 보내되 월급은 전도국에서 지출할 일."이라고 가결,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부인과 함께 인천에서 목선을 타고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다다랐다. 그는 부인을 잠시 목포에 남겨두고 먼저 제주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일행은 다 물에 빠져 죽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혼자 헤엄을 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온 제주도. 생각하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이기풍 목사를 반갑게 맞이해 주지 않았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았다. 천주교인 학살사건이 있은 다음이라 기독교를 증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누구도 방을 빌려주지 않아 숙소도 얻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돌을 베개 삼고 바위를 의지하여 잠을 잤다. 이기풍은 "주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저 백성을 감동케 할 수 있는 감화력을 주소서."라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이기풍 목사는 먼저 선교현장을 파악하기 위해서 조랑말 한 마리를 구입하여,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는데, 돌면서도 누가 음식을 팔지 않아서, 먹지도 못했고, 재워주지를 않아서 집에서 자지도 못했다.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바닷가로 가면 무엇이 있겠지 하여 갔다가, 그만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는데, 얼마 후 깨어 보니 어느 해녀의 집이었다. 마침 지나가다가 쓰러져 있는 이기풍 목사를 발견하고, 장정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집으로 모셔간 것이다. 해녀의 정성어린 간호로 건강을 회복했고, 그 해녀는 나중에 이기풍 목사의 전도를 받아 제주도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전도를 위해 짐보따리 속에 작업복을 넣고 다니다가 들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함께 일해주면서 전도하고 홍수가 나서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으면 물에 들어가 건져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집집마다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구렁이 때려잡기 운동을 펴다가 두들겨 맞기도 하였다. 한 번은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끊고 도망가는 미치광이를 이 목사 내외가 기도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온전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장터에서 나누어준 쪽복음을 받아간 김기팽이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패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이 들고 일어나 김기팽을 멍석에 말아 도리깨로 매질을 하고, 동구 밖으로 끌려 나갔는데, 그때 김씨의 눈에  낫이 보여서, 그는 잽싸게 낫을 들어서 묶인 줄을 끊고 도망을 갔다. 그렇게 살아난 그는 후에 복음을 위하여 충성하는데 본이 되는 장로가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의 진기한 풍속을 적어서 평양으로 보냈는데, 그 내용의 일부가 한성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한성신문 기사를 읽은 제주사람들이 흥분하여, 젊은이들이 이기풍 목사 집으로 달려와서는, "이 고약한 놈, 네 놈이 제주도 흉을 봤지? 그래, 말똥으로 불 때는 것이 뭐가 나쁘며, 쌀을 안 씻고 밥해 먹는 것이 뭐가 더럽단 말이냐? 네 놈이 제주사람을 야만인 취급을 했다. 네 놈이 제주도 맛을 못 봤구나."라고 하면서, 이기풍 목사의 멱살을 잡고자 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는데, 마침 이때에 평소 알고 지내던 박용호 대감이 그 현장을 지나가다가 이 모습을 보고는 박대감의 중재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당시 박 대감은 제주도로 정배와 있는 조정대신으로, 제주사람들도 박 대감을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기풍 목사는 이렇게 제주도에서 약 10년간 사역을 했고, 그 후에는 광주 북문내교회, 순천읍교회, 벌교교회 등지에서 사역을 하였고, 돌산, 완도를 순회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신사참배 반대 : 일제는 조선인 동화정책의 하나로 조선말 사용금지, 창씨개명 등과 함께 1936년경부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장로교도 1938년 총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교단적으로는 모두 굴복하고, 이때부터는 개인적, 소집단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기풍 목사와 순천노회 산하의 목회자의 움직임은 1940년을 전후하여 나타났다. 이기풍 목사는 평소 자녀들에게도 신사에 가서 ‘죽어도 절하지 말아라.’라고 엄히 가르쳤다.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딸이 학교를 중단하는 일이 생기고, 쌀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되기도 하였다. 이 목사는 걸핏하면 주재소 순사에게 잡혀가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하여 취조를 받았다. 1940년 11월 15일 새벽, 순천노회 목사 17 명이 일제히 경찰서에 수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사참배 거부 움직임을 눈치 채고 검속 투옥한 것이다. 이기풍 목사는 여수지구였기 때문에, 여수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당시 74세의 노구에다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던 이기풍 목사는 추운 감옥에서 견디기 어려웠다.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순사에게 "나는 죽어도 일본 귀신한테 절할 수 없다. 너희들이 지금 총을 쏘아 죽인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어!"라고 대답을 했고, 더욱이 이기풍 목사는 설교 중에 "일본은 곧 망한다."고 심판의 말을 서슴지 않고 외쳤기 때문에, 불경죄로 더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여수 경찰서 고등계 형사실에서는 이 지독한 늙은이를 어떤 방법으로 괴롭힐까 궁리하였으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산송장처럼 누워있는 이 목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건드렸다가는 시체가 되어버릴 것 같아 그들은 일단 집으로 내보냈다. 일제는 이기풍 목사의 옥중 순교의 영광스런 기회마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 목사는 1942년 여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일제의 모진 박해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의인이요, 녹색 순교자였다.
겸손 : 어느 해 슈바이처 박사가 모금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에 방문했습니다. 열차가 역에 도착했을 때 환영객들은 박사님이 기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차가 출발하는데도 박사님이 안 내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아 봤더니 환영객은 1등 칸 앞에서 기다렸고, 박사님은 3등 칸에서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에 슈바이처 박사는 웃으면서 “4등 칸이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3등 칸을 타고 왔죠.” 스스로 근신하고 낮아져서 겸비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성경은�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라고 말씀합니다. 한편 입은 은혜를 지키는 뚜껑입니다. 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시인하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 묶여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부정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풀려서 아무런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근신하며, 지식의 말 곧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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