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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의 지도자 조만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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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0:57 조회1,8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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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의 지도자 조만식 장로 

 

 

 1. 지도자로서의 준비

 

 조만식은 1883년 평양 강서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에 한문 수학, 13세에 결혼, 17세에 아들을 얻었으나 지체 불구아로 일찍 사망하였다. 20세에는 불행히도 아내를 잃고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 그는 뜻을 새롭게 세워 장사를 집어치우고 23세 때인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게 되었다. 특히 숭실학교 설립자이며 교장인 배위량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배 교장은 성품이 강직하고 대담하며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조만식은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운동에도 뛰어난 학생으로 배 교장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졸업할 무렵에는 독실한 신앙인이요 애국자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민족지도자로서의 기틀을 형성한 것이다. 조만식이 숭실학교에 입학한 1905년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그는 민족을 구원하려면 자신부터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여겨, 졸업 후 일본유학을 하였다. 26세에 동경 세이소꾸(正則) 영어학교에, 1910년에는 명치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여름방학으로 귀국하여 있던 때에 한일합방이 되자, 평양은 온통 비통에 잠겨 있었다. 조만식도 울분을 참을 길 없었다.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동경에 돌아가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동경 YMCA의 지도자 김정식의 제의로 백남훈과 함께 동경한인교회를 세웠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가 와서 교회 담임을 맡았다. 당시 동경에는 5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있었다. 김성수, 송진우를 비롯하여 조소앙, 신익희, 장덕수, 김병로, 김준연, 현상윤 등이 당시 동경유학생들이었다.

 

2. 교육자 조만식

 1913년 조만식은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이승훈 장로의 부탁을 받고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역사와 지리 등을 가르치다가,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취임하여 9년간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무보수로 일하였다. 가족은 평양에 두고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였고, 머리는 박박 깎고 언제나 한복 바지저고리에 무명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소금으로 이를 닦고 팥비누(팥 껍질을 벗겨 만든 비누)로 세수하였다. 이는 국산품 애용운동의 실천이었다.
조만식 교장은 기독교의 사랑을 교육의 기본지침으로 삼고, 모든 일을 솔선수범하여 학생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는 1인 4역으로 교장, 교사, 사감, 사환 일까지 맡아 화장실 청소도 손수했다. 일본인의 죄악은 미워하였으나, 일본인을 사랑하여 저들을 왜놈이니 쪽발이니 하여 폄하하여 부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적을 사랑하면서도 악과는 싸운 종교인이요 참다운 민족지도자였다. 주기철, 한경직, 김홍일, 김억, 김소월 등의 인재를 길러내었다.

 

3. 민족운동과 투옥

 3 ․ 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 그는 오산학교를 사임하였다. 평양의 3 ․ 1운동은 이승훈이 지휘하고, 조만식이 협조하여 전개되었다. 천도교인이 합세하여 1주일 가까이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만세운동이 계속되었고, 만세운동은 평안도 방방곡곡에 번져나갔다. 만세 소리와 일경의 총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시민들이 검거되어갔다. 조만식은 이승훈과 협의하여 후일을 위해 상해로 망명하고자 했으나, 탈출 직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3 ․ 1운동 주동과 망명 기도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1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조만식은 옥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와 찬송으로 지내다가 형기를 두 달 앞두고 가석방되었다. 그는 민족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을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평양 YMCA 총무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4. 물산장려운동
 

 조만식은 한일합병 후 밀려들어오는 일본자본의 예속을 막고 경제자립을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1922년에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였다. 일본물건을 사용하지 말고, 우리토산물 사용을 권장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평양에는 일용품의 80%가 일본제품이었다. 조만식 회장이 이를 호소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왔다. 그러자 일제의 압력이 커져갔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개해나갔다. 산에서 금이 나고/바다에서 고기/들에서 쌀이 나고/목화도 난다. 라는 물산장려가를 부르면서 평양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작달막한 키, 까까머리에 말총모를 쓰고, 짧은 무명 두루마기를 걸치고, 앞장서서 이끌어나가는 조만식. 일제는 눈꼴이 사나웠지만 명색이 토산품장려이니 법으로 처단할 수가 없었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물산장려가는 차츰 국민들의 민요처럼 불려졌다. 조만식은 자신부터 철저히 실천하기 위해 명함도 한지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이렇게 가난하게 된 원인은   자기 것을 천시하고 남의 것을 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외국의 침략을 당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좋은 물건을 만들어 애용하면 자연히 생산이 증대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면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런 호소는 화류계에까지도 파급되어 기생들이 비단 대신 무명 치마저고리로 바꾸어 입었다. 원근각지의 직물공장과 거래상가들도 분발하여 평양의 양말, 고무, 메리야스 공업은 크게 발전하여 일본의 유수한  기업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물산장려운동은 민족 자본 형성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5. 오산학교 동맹휴학사건
 

 이승훈은 자신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려고 평북도지사와 교섭하였더니 일제는 조만식을 교장직에서 물러가게 하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700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일제는 배일사상을 지닌 조만식을 그대로 둘 수 없는 입장이고 이승훈도 양보할 수 없었다. 이보쇼, 도지사 영감, 우리 고장이 애국심이   강해서 꺼리는 모양인데, 조선인이 조선민족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 않소? 또 그의 신앙이   못마땅한가 본데, 사랑의 종교가 어째서 교장 해임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거요?

일제는 배일사상의 바탕에 기독교 신앙이 깔려 있다고 보고 이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이승훈은 끝까지 버티었다.' 학생들이 자치회에서 결정한 일을 난들 어떡합니까?'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도지사가 양보하여 일단락되었다. 조만식의 해임 방침이 철회되었다. 그 대신 동맹휴학의 주모자를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이승훈은 이 문제를 놓고 조만식과 상의하였다. '고당, 아무래도 형식적이나마 무슨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 같소.' 그리하여 다섯 명의 학생을 퇴학시키되 고등보통하교 인가를 받은 후 편입시험이라는 절차를 거쳐서 다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후 일제는 여전히 조만식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마펫 교장이 찾아왔다. 조만식을 강사로 초빙하기 위해서였다.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마펫 교장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숭실전문학교에 가서 법학개론, 경제원론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가 설립한 숭인중학교 교장을 겸임하였으나 일제가 승인해주지 않아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직접 학원을 경영하려는 생각에서 숭인중학교를 상업학교로 개편하여 민간인 힘으로 경영해나갔다. 일제는 실업학교에 대해서는 쉽게 인가해 주었다. 조만식은 오산학교 제자 이항복을 교장으로 앉히고 교사로 한경직, 김재준, 김효록, 원흥균 등 쟁쟁한 멤버를 끌어들였다.

 

 

6. 구국 운동
 

 조만식은 학교 일, 물산장려운동, YMCA 운동, 교회 일 등으로 바쁜 가운데, 1928년에는 새로 발족한 신간회 평양 지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신간회는 민족진영을 통합한 사회단체로 월남 이상재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전국에 200여 지회가 조직되고, 약 3만 명의 회원이 있었다. 당시의 간부로 신석우, 오세창, 권동진, 조병옥, 안재홍 등이 있었다. 그런데 신간회가 조직된지 2년이 지나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권동진, 오세창, 조병옥 등 간부를 검거하는 바람에 민족운동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마침내 해산하게 되었다. 1932년 조만식은 조병옥의 추대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조만식은 '정의 옹호, 문화 건설, 산업 발전, 불편부당'의 사시를 내걸고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조선일보를 명실 공히 민족지로 육성해나가기로 하였다. 그는 가족을 평양에 둔 채 여관에 투숙하면서 근무하였다. 여전히 짧은 두루마기에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사람들이 '지금은 외부 접촉이 많을 때이니, 사교상 양복을 입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하고 넌지시 말하면, '아니, 사람이 사교하는 거지, 옷이 사교하나?'하면서 여전하였다. 그의 일거일동은 민족애와 기독교 정신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검소와 절제를 솔선수범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바쁜 생활 때문에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37년 54세의 조만식은 호수돈여학교 사감으로 있던 34세의 전선애와 재혼하여 새 가정을 이루었다. 1939년 수양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서울에 압송되었다가 20일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병을 얻어 보석 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1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청년들을 학도병으로 징발하였다. 조만식은 이를 한사코 반대하였다. 윤치호, 이광수 등이 평양에 와서 학병 징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조만식에게도 일본 형사가 찾아와서 연사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여생을 입 다물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니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라고 했다한다. 조만식은 이 무렵에 무저항주의로 일관하였다. 그는 그 길로 기독교병원 원장 대리 박학전을 찾아가 사유를 말하고 환자로 위장하여 입원하였다. 박학전은 애국심이 강한 간호사를 전담으로 정해두고, 입원실 문에 '면회사절' 팻말을 달게 하였다. 중환자처럼 위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단 위기를 넘겼다. 병원에서 나온 조만식은 유일한 안식처인 산정현교회에 의지하여 시무장로로 있었으나, 신사참배문제로 주기철 목사가 잡혀가 죽자, 교회문에 손수 못질을 하여 닫아 버리고, 향리인 강서로 낙향하여 은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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