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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최초의 순교자 노영수(盧永守) 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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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09 조회1,8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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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최초의 순교자 노영수(盧永守) 참령

 

   노영수 구세군 참령의 순교 사실은 구세군만국본영 런던에서 발행하는「구세공보(The War Cry)」,「사관잡지」등의 간행물과「구세군 100년사」책자로도 널리 여러 번 소개된 바 있고, 만국본영 제작「순교자의 피(1967)」라는 영화까지 제작된 바 있다. 노영수 구세군 참령은 1897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 노매동에서 부친 노철준과 모친 오해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비록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양반 가문의 엄격한 유교적 교육환경 속에서 자존심과 체통을 지키면서 자라났다. 한국에도 1908년 구세군(救世軍, The Salvation Army)이 들어와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구세군은 영국 감리교회의 목사였던 월리암 부스(William Boath)와 부인 캐더린(Catherine)이 전도, 자선, 사회사업을 목표로 창시한 종교단체이다. 구세군의 조직과 기율은 군대식으로 편성된 것이 특징이고 부스 자신이 대장에 취임하였다. 한국 땅에 파송되어 온 구세군의 선봉 장교는 혹가아드(Robert Hoggard) 정령과 그의 일행이었다. 그들은 서울 애오개(현 마포구 아현동)와 새문안(현 광화문)에 구세군 영(營)을 창설했으며, 군복차림으로 노상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사람을 모은 뒤에 뜨거운 열정을 다하여 전도하였다. 이 열정적 전도로 지방에까지 교세가 확산되어, 지방군영(地方軍營)이 세워져 나갔고, 1909년에 이곳 의성군 봉양면 노매동에도 군영이 세워졌다.  1915년 노영수가 17세가 되던 해 정월 어느 날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처음으로 전도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다. 함께 참례했던 7명의 친구들도 같은 체험을 하였다. 성령의 뜨거운 불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 7명의 소년들 은 단짝들이었는데 지도자격인 영수가 이끌고, 이 집회에 참례한 것이다. 이들 8명은 한 날 함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영수는 이날 어떻게나 감격했던지 일생 몸바쳐 주의 뜻을 받들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이 다짐은 그 후 순교의 최후를 마치던 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이 노영수를 십자군 사관이 되게 하였다. 그는 군영(교회)의 영학생(營學生)으로서 성경통신공부로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군영의 여러 소년사업에 솔선수범하는 열렬한 소년이 되었다. 그는 봉양에서 효령, 군위를 거쳐 칠곡을 지나 대구까지 백여 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대구영 학생회에 출석할 만큼 열성적으로 헌신하였다. 날로 불타오르는 소명감을 누를 길 없어 1919년 맨주먹으로 서울로 올라가 구세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3년 전에 결혼한 이노순과 함께 소정의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참위로 임관되어 고향땅에서 가까운 칠곡 군영으로 파송임명을 받았다. 부임한 첫날부터 젊은 패기와 신앙적 투지로 가가호호 축호전도를 시작하였다. 적잖은 반대도 있었지만 군영은 점차 부흥해 갔다. 이후 그의 31년간의 목회생활은 지칠 줄 모르는 전진만 있었다. 올곧은 집념과 강인한 체력은 그야말로 신앙의 사관다웠다. 그러면서 그의 성품은 비단처럼 인자하고 부드러워 참다운 목양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경북의 어천, 오리동 낙평, 전북의 도산리, 도장리, 부흥리, 충남의 진죽 태안에서 목회를 하면서 이 곳에서는 특히 회관 신축에 많은 공을 세운 바가 있었다. 덕암, 그리고 광주영을 거쳐 1949년에 마지막 임지인 경남 진주군영 담임으로 파송되어 큰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던 가운데 구세군 교단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교단분규로 인한   진통기를 겪었다. 1926년 11월, 구세군의 제2대 부람웰 부스(B.Booth) 대장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부람웰 부스는 이미 세계 81개국의 구세군을   이끌어가면서, 개인적인 깊은 신앙과 성경적인 생활로 세계인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당시 구세군은 외형적으로는 조선에 170개 영문에 218명의 사관, 9,000명의 교인을 가진 공동체로 성장을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회원들 간에 불만과 반목이 있어서, 진정서가 제출되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하였다. 또한 제2차 대전 중에는 구세군이 구세단으로 개편되는 모진 역경과   일제의 잔악한 핍박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노영수 사관은 강인한 믿음과 투지로 진지(陣地)를 고수하였고, 구세단이 구세군으로 환원될 때까지 신절을 지켜 굳건히 구세군사관의 위치를 지켜 나갔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였다. 서울을 삽시간에 점령한 공산군은 물밀듯이 남으로 밀고 내려와 경남 하동을 거쳐 진주까지 육박해 갔다. 많은 사람이 허둥지둥 피난을 가면서 아우성을 쳤다. 교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교회로 모여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노영수 참령은 피난 갈 사람은 피난을 가야하겠지만, 자신은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겠노라고 하였다. 목자가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양 무리를 놓아두고 피난 가는 것은 목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며, 목양지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런 노영수 사관의 신앙적인 의지를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공산군 포탄이 시가지 중심지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큰 혼란 속에서도 노영수 사관은 주일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 앞에서 '종말이 온다면'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의 내용은 “인간의 목숨은 하나. 단 한 번만 죽는다.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의롭게 주님께 바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헛되이 죽지 말고, 영생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죽자.”라는 요지였다고 한다. 참으로 죽음을 초월한 결의에 찬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다음 날 월요일에 진주는 공산군에 함락되었고, 약 2개월간 공산군의 치하에 있었는데, 공산군은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순한 양민을 학살하는 참극을 빚었다. 노영수 사관도 보안서원에게 체포되었는데, 공산군은 노영수 사관에게 사상의 전향을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을 가하였다. 그래도 전향을 하지 않자, 그들은 노영수 사관의 부인과 딸, 그리고 아들 태식을 노영수 사관의 면전에 끌어다 놓고는, 가족들로 하여금 금 울면서 공산정권에 협조하도록 애걸하게 했다. 하지만 노영수 사관은 공산당 간부에게 “난 30년간 구세군 사관으로 헌신하면서 예수 십자가밖에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는 당신들에게 협조할 수 있겠소?” 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협력을 거부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신신 당부하고는, 공산당 간부에게 말하기를, “어린 아이들은 살려주시오. 그리고 당신들도 속히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9월 5일 밤, 지리산 기슭. 밤의 정적을 깨고 볶아치는 따발총 소리 속에서 노영수 참령은 세계 구세군 사상, 최초의 순교자라는 영예로운 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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