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사랑의 목사 이용도 > 믿음과 지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믿음과 지혜

열정과 사랑의 목사 이용도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19 조회1,729회 댓글0건

본문

열정과 사랑의 목사 이용도

 

    이용도 목사는 복잡한 면모를 지닌 목사다. 목사이면서 부흥강사, 독립운동가, 열광주의자,   한국 최초의 신비주의자 등의 별칭이 따라다닌다. 이용도의 성장과 신앙, 목회방식 등에 특이한 면이 있어서 당시 일부 교계에서는 이단시하기도 하였고, 이용도가 속한 조선감리회에서는 휴직 처분이 되었다가 1998년 10월 제23회 총회에서 김종순 목사 외 13명이 잉요도 목사의 복권을 청원하여 만장일치로 복권을 합의하였고, 1999년 3월 서울연회에서 이용도 목사의 복권결의가 통과 되었다.

    이용도는 1901년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병약하여 잔병이 많았으나,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는 건강이 회복되어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 하여 친구들이 줄줄 따라다녔고, 전쟁놀이 할 때는 항상 대장이 되곤 하였다. 부친은 술꾼이었으나 모친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핍박이 심하였고, 따라서 집안은 평안하지 못하였다. 견디다 못한 모친은 여러 번 양잿물을 마시려 하기도 하였다. 이용도는 모친의 이런 모습에 감화를 받고 자랐다. 13세 때에는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 밤새도록 기도한 일도 있었다. 이용도는 손재주가 많아서 대패나 톱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고쳤으며, 한번 손을 대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해내었다. 14,5세가 되었을 때에는 그의 이름이 알려져 윤치호, 이상재, 양주삼씨 등이 감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15년 보통학교 졸업 후 한영서원(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여야 했고, 또 독립운동으로 2년간 옥중 생활하느라 4년이면 졸업하는 것을 9년이나 공부하였어도, 졸업장를 받지 못하였다. 개성과 고향인 시변리 사이는 1백 40리 길인데 방학이면 차비가 없어 솔잎, 아카시아잎, 나무 열매 등을 따먹으며 걸어다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5년간 네 번 투옥되어 3년간의 옥중생활을 하였다. 감옥에서는 두 손을 밤낮 채워놓은 사형수의 손목에 얼음이 얼어붙자, 자기 뱃속에 그 손을 넣게 하여 녹여주었고, 배고파하는 죄수에게 자기 밥을 주고, 자기는 고요히 기도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송도고보를 찾아갔더니 교장 왓슨(A. W. Wasson; 王永德)이 신학교를 가라고 했다. 이용도는 전혀 뜻이 없었지만 학교 측의 권유로 서울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마음에도 없는 신학교에 들어온 이용도는 신문, 잡지, 소설, 법률, 정치서적이나 읽으며, 학생들과는 이론이나 캐고 논쟁을 하였다. 강의시간에는 교수에게 까다롭고 괴상한 질문을 하여, 교수를 골려주는 등 경건치 못한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 노래, 연극 등의 몰두하였다. 이호빈, 이환신 등 훗날 감리교 지도자가 된 이들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며, 학창시절을 뜻있게 보냈다. 특히 친구 송창근이 미국 유학 경비가 부족하여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자기 집 전세금 250원과 입던 양복을 그에게 준 일화는 유명하다.

    1925년 2학년 때 용도는 당시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폐병 3기 판정을 받았다. 겨울방학이 되자 이환신의 고향인 강동으로 요양을 갔는데, 거기서 뜻밖에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부흥회를 앞두고 이환신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고 부흥회에 임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용도는 중병도 아랑곳 않고, 예수님만 전하다가 죽으리라는 각오로 외쳤다. 여기저기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한 주간을 지내고 나자, 산도 무너뜨릴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이용도와 이환신은 다른 동리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밤늦게까지 집회를 하고 60리 길을 걸어와도 조금도 피곤치 않았다. 그 때부터 이용도는 딴 사람이 되었고, 오직 주님의 뜻에만 복종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살림이 가난해도 주님은  사랑이다. 세상이 어려워도 주님은 사랑이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웃어도 주님은 사랑이다. 몸은 병들어도 주님은 사랑이다. 육신은 죽어도 주님은 사랑이다.'

   이용도는 1928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강원도 통천읍교회로 파송을 받아 부임하였다. 통천읍교회에서 청년 박재봉의 열렬한 기도와 신앙생활에 자극을 받아 산기도와 금식기도에 전심전력하여 악마를 추방하는 성령체험을 하게 되면서, 이용도의 삶이 크게 변하였다. 전하는 말씀에서 능력이 나타나고, 청중들에게 감화 감동을 주게 되자, 교인들이 늘어나서 50~60명이던 교인이 150~16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인근에 있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달라고 초청을 받아서, 이용도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교회에서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1930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부터는, 평양, 만주, 황해도, 서울, 인천, 경상도 등 전국으로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당시 ‘신앙생활’의 주필이었던 김인서는 이용도의 부흥회를 평하기를, '이용도 목사의 부흥식이라면 식이고, 파격이라면 파격이겠다. 보기에는 갈대같이 약한 이가 강단에서는 사자같이 강하다. 이  목사의 기도란 영에 읊어지는 시편이거나 하늘에 닿는 긴 호소이요, 그의 설교란 생명에 떨리는 핏방울이거나 진리가 흐르는 청계수의 한 폭이다. 복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보다 예수의 정체에, 교리보다 영에, 신학보다 진리에, 의식보다 체험 자체 등을 이 목사가 강조한 점이다.'라고 했다.

   1933년 정월에 평양에서 사경회가 개최되었는데, 2,000여 명씩 10일 동안 모여 피와 땀을 쏟을 정도의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이어 타지방에도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평양 기도단이다. 1930년2월 평양중앙교회에서 있었던 부흥집회를 계기로 서문밖교회의 기도 동지들이모여 결성하였다. 중심 인물로는 김예진, 김익선, 김지영, 박윤선, 김인서 등이다. 이 단체는 후에 장로교에서 정죄를 받았지만, 1907년 대부흥 이후 평양에 기도운동을 일으켜 신앙의 활기를 되찾게 하였다는 점은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특히 회개와 기도, 사랑의 실천을 주제로 강조하였고 조선교인과 교회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교계의 선구자는 완전한 신생자라야 한다. 죄에서 죽고 의에서 난 자라야 한다.'라고 외쳤다.

    기성교회에 대한 회개 촉구는 나중에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오인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에 대한 언행이 문제가 되어 장로교회는 그를 이단시하여 장로교 황해노회가 그에게 금족령을 내리고, 평양노회도 그에 대한 경계령을 내렸다. 타교단에서 그에 대한 이단시비가 일자, 감리교회에서도 1933년 중부연회에서 그에게 휴직처분을 내렸다.
    이용도 목사는 1933년 원산에서「예수교회」가 창설될 때, 초대 선도감(宣道監)으로 선출되어, 예수교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그 때까지 이용도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던 김인서가 이용도를 혹독하게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용도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목회활동을 하였지만, 1930년대 한국교회에 활력소를 불어넣었으며, 한국교회에 회개와 기도와 사랑을 선포한 '광야의 소리'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용도는 평소에 '가늘고 길게 사느니보다는 굵고 짧게 살겠다.'고 말한 대로, 지병인 폐결핵으로 1933년 원산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용도 목사에 대한 평 중 일부를 인용하여 보겠다.
(1) 이용도는 새로운 스타일(용도식)의 부흥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부흥회 스타일은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1907년의 부흥회와는 아주 다른 토착적인 신비주의 타입의 집회형식이었다. 그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모으려고도 하지도 않았고, 조직하거나 선전하며 꾀를 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설교를 하지 않고, 기도만 몇 시간씩 하거나 또는 공중기도를 3-4시간씩 시킴으로써 집회를 끝마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어떤 인간적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 전체를 청중에게 문자 그대로 주는 것이었다. 집회기간 동안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스스로가 은혜를 사모함으로써 청중들에게 그 본(本)을 몸소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런 이용도 목사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배워야 하겠다.

(2) 이용도 목사는 자기만족에 빠진 당시 교계 지도자들, 곧 선교사, 목사, 부흥사들에게 교만과 파벌 등에 대한, 그들의 자성을 촉구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리새적인 교리와 형식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였으나, 그는 새 생명의 바람을 전국 교회에 불러 일으켜 1930년대 초기의 교회를 부흥 내지 개혁시켰다.
(3) 당시 이용도는 전국적으로 기도의 혁명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한국교회에 기도가 없다는 것을 크게 한탄한 이용도는 자기 스스로가 기도에 미치고, 스스로 기도의 사람이 됨으로써, 기도에 열심하도록 불을 붙였고, 이런 이용도의 기도생활의 영향을 받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들판과 산골짜기에 있는 기도할 곳을 찾아서 모여들게 하였다.
(4) 이용도 목사의 삶을 통한 감화와 부흥운동을 통해서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평생을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즉 유능한 청년들이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경우, 조신일, 이호운, 명관조, 김광우, 변종호, 김용련, 박재봉 목사 등, 훗날 감리교단을 위하여 너무나 많은 역할을 감당했던 능력 있는 인물들이 성직자로 부름을 받아서, 해방 전후에 한국감리교회를 실질적으로 재건하고, 부흥토록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들이 되었다.  
(5) 이용도는 서양과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신비주의 운동을 시도를 하였다. 이용도의 감(感)의 신학(神學)에 기초한 설교와 전도활동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에게 아주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용도의 목회 스타일과 신앙양태는 지금까지도 한국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다.(이상갑:“청년아 부흥을 꿈꾸라”에서)
   이용도 목사의 사랑의 실천에 관한 일화 한 토막 ; - 추운 겨울날 최억성이란 걸인 아이를 만난 이야기- :"예배당은 너무 추워서 말을 하기가 힘들다. 意氣저상하여 설교도 힘이 없다. 돌아오는 길에 조그만 거지아이가 뚜껑 없는 주전자를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손과 발은 홍도같이 빨갛게 얼었다. 바람은 눈 위에 칼같이 사나운데, 저런, 인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하나님의 保佑之澤이었는가? 아 죄악의 세상이라. 자기만 살려고 눈에 불이난 인간들 어찌 이 가련한 乞兒를 본 척이나 하고 지나가랴. 마음에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여관으로 데리고 와서 두루마기를 벗어 둘러 주고, 아랫목으로 인도하여 이불로 둘러 줄 때, 나의 마음 너무 민망하여 슬픔을 이길 길이 없었다. <중략> 네게 무슨 죄가 있으리. 눈물이 앞을 가리워 日記를 쓸 수 없어 수건을 눈에 대고 그냥 한참 울었다... 오 하나님이시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이 가련한 乞兒를. 네 이름이 무어냐? 億成이에요. 성은 崔가요. 오 최억성이로구나... 너 예배당 아니? 알아요. 예수 믿는 사람 너의 동리에 있니? 많아요 여기도 예수 믿는 사람 많아요. 오 그래. 예수 믿는 사람은 도처에 많거니와 너를 긍휼히 여길 신자는 없었구나.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욕심만 위하여 믿는 체 하는 現代 교인아. 너에게 禍가 있을진저. 여관 主人이 문을 연다. 이는 주인집 아이가 나의 乞兒 데리고 들오옴을 보고, 들어가서 告하였기 때문이었다.
< 중략> 떡국 한 그릇 시켜오라고 하고, 나는 조금 未安을 느꼈다... 여관에 부탁하여 물을 끓여다가 걸아의 얼굴과 手足을 씻기고, 얼어터진 발가락을 헝겊으로 처맨 것을 끌르고 씻고 빅쓰를 발러 줄세. 나의 憐恤이 극하여 눈물이 쏟아졌다. 울면서 씻어주고 싸맨 후 나의 內衣와 저고리 입었든 것을 입혀주고, 양말을 신기고 버선을 덧 신겨 줄 세, 아, 이는 乞兒가 아니요 我子요 愛兒인 感이 興起하였도다. <중략> 그러나 저에게 맞는 것으로 입혀주지 못하고 나의 입었든 헌 것, 큰 것을 억지로 입히매 主님을 이리도 소홀히 대접한다는 感이 끓어올라 적이 민망하다. 주인 마누라 드려다 보더니 버선이 어찌 큰지 長靴 신은 것 같구나 하고 웃고 가는지라. 저녁밥을 같이 먹고 밤에 같이 자다... 나의 옆에서 자는 더벅머리를 보니 이는 꼭 羊과 같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