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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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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30 조회1,9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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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


   [황주 부흥회] “주님은 세상에 다시 오신다. 자연계의 징조로 보나, 국제 사회의 정세로 보나, 이스라엘의 독립 움직임으로 보나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 구주를 영접

 하지 않는 자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멸망할 수밖에 없다.” 1941년, 만주 일대의 순회 집회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황해도 황주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 전했던 말씀의 요지이다. 이 집회에 송세영 장로라는 이가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수첩에 열심히 메모하였다. 그는 돌아가다가 일경의 검문에 걸렸다. “이게 뭐요?”,“설교 내용입니다.”,“누구의 설교란 말이오?”,“이성봉 목사입니다.”,“이성봉? 그가 어디 있소?”,“사리원 감리교회요.”송 장로는 무심코 사실대로 말했다. 일경은 즉시 경찰을 사리원으로 보내 이성봉 목사를 검거하였다. “당신 이 비상시국에 이따위 설교로 선량한 국민을 선동하는 거요?”,“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도를 전했을 뿐이오. 그것이 내 사명이기 때문에.”, “이 자식 콩밥 좀 먹어야 정신 차리겠군.” 호시 부장은 아렇게 호통을 치면서 이성봉 목사를 수감하였다. 속옷까지 벗겨 차가운 마루 바닥에서 잠을 재웠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버텼다. 그런데 그로부터 실로 이상한 일이 연속 일어났다. 이 목사를 괴롭혔던 호시 부장이 13일 만에 발진티브스에 걸려 “아이고, 예수쟁이, 아이고 예수쟁이.”하면서 고열로 앓다가 한달만에 죽었다. 후임 부장이 며칠 후에 죽었다. 또 5일 후 경찰서장이 죽었다. 이 목사 담당 검사가 갑자기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데 

 마누라가 병들고 이어서 장모까지 병들었다. 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6개월만에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이 목사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한달만에 병보석으로 가출옥하게 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보석 중인데도 불구하고 몰래 교인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계속 드렸다.

 

   [어머니의 기도] 이성봉 목사는 1900년 평남 강동군 간리에 있는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두 번씩이나 비상을 먹고 자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성봉이 여섯 살 때 집안에 복음이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는 주일이면 성봉이를 이끌고 40리나 되는 평양선교리 감리교회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지지 않고 다녔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가르치고 기도문을 써주어 기도하게 하였다. 여섯 살 때는 신약을 한 차례 읽게 되었다. 일곱 살 때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와서 기도하시오.”하자, 즉시 나가서 기도하여 온 교인을 놀라게도 하였다.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 부활절 같은 때는 언제나 독창과 연설을 도맡아 하였다.

   이성봉은 자라서 중화 경의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몸이 약한데다 폐디스토마에 걸려 깡다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말랐다. 성봉의 어머니는 황해도 신천장로교회 김익두 목사의 초청으로 신천소학교 교원으로 봉직하게 되자 성봉도 따라가서 학교에 다녔다. 거기에서 성봉은 김익두 목사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고 자기도 장차 김 목사와 같은 훌륭한 부흥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자 좌절하여 한때 자살까지 하려 한 적이 있다. 그는 할 수 없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30리나 되는 평양에 가서 팔아 좁쌀 몇 됫박 사다가 입에 풀칠하곤 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말 한 필을 사서 겨울에는 나무 장사, 여름에는 과일 장사를 하여 차츰 푼돈을 모았다. 나이 들면서 그는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도 부인하였다. 부모님을 따라 마지못해 교회를 나가기는 하였으나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처녀들을 눈요기하는 재미로 앉아 있다오곤 하였다. 스무 살쯤 되어 마부 노릇을 하면서 아주 곁길로 들어서 버렸다. 술 담배에 화투와 투전 놀음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너 어려서는 교회도 잘 나가고 착하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세상이 어떠니 해도 주님밖에 없느니라. 어서 마음 돌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젊은 놈이 자유가 없는 예수만 믿고 어떻게 살아요. 젊어서는 세상 재미도 보고 한 사십이 되어 믿어도 늦지 않아요.”, “너 그러다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 맞을까 두렵다.”, “하나님이 계시다구요? 그렇다면 어디 나를 패주시는지 두고 봐야겠네요.”, 어머니는 어처구니없어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장가를 들이면 좀 나아질까 하여 열 아홉 살 때 결혼을 시켰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평안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성봉이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여름에 이변이 일어났다. 주일 아침에 과일을 따려고 과수원으로 가려는데 어머니가 만류하기를, ‘오늘은 주일이니 내일 일하러 나가라.’고 하셨건만, 이성봉은 “오늘 열매를 따지 않으면 과일이 다 문드러져 못 팝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손해가 되는데요.”하면서, 제 고집대로 과일을 따러 과수원으로 나가서는 과일을 따가지고, 딴 과일을 평양으로 가지고 가서 팔아 가지고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 가서, 질탕 먹고 마시며 놀았다. 밤늦게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노세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하고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기자묘 앞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오른쪽 넓적다리가 뜨끔하고 쑤시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 몸을 가눌 수가 없게 되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쓰러졌다. 병원에 가보니, 골막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죽을 수밖에 없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심정을 이성봉은  자서전에서 표현하기를, “참말로 죽음이 내게로 닥쳐오니, 그처럼 무섭고 그처럼 잔인하고, 그처럼 허무할 수가 있을까? …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 … 나는 꼭 지옥의 자식이로구나! …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았다. 법률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는 죄인인 것을 절실히 알았다.”라고 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자, 이성봉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이 죄악에서 건져 주소서.”라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며 회개의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이 몸을 주께 바치고 모르는 가엾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증거하겠습니다.”라고 부르짖었는데, 그 순간부터 이성봉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 들었다. 이성봉은 간증하기를, “나는 그때 비로소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전에는 성경을 보아도 맹물에 자갈을 삶은 것 같아 아무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잡지나 연애 소설 따위를 걷어치우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니…꿀보다 더 달게 여겨졌다.”라고 했다. 그 결과 이성봉의 심령은 평화와 기쁨과 행복에 가득 차게 되었다. 하지만 병세는 바로 회복되지 않고, 약 3년 간 쇠약한 상태로 지내었다. 믿음을 가지고 병에서 회복 되자, 이성봉은 시골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교회학교 교사와 교역자가 없는 교회의 장년 예배 인도 등을 맡았다. 그 후 1925년 26세 때에 신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학력 미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동양선교회에서 성서학원을 경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님의 추천을 받고 입학하여 3년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성봉이 신학원을 마치자 경기도 수원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신풍리에 가서 일본인 집에 세를 들어 교인 몇 사람과 첫 예배를 드렸다. 개인 전도, 노방 전도를 열심히 하여 교인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성령님의 역사로 눈물로 회개하는 자가 생기고 술과 담배, 도박 등을 멀리 하고 중생하게 되었다. 불치의 병이 낫고 귀신 들린 자가 놓임 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무당 할머니 집에 가서 무당의 동의를 얻어 굿하는 제구를 불사르고 무당에게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병이 깨끗이 나아서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 이렇게 불철주야 교회일에 열중하다가 이성봉은 과로로 쓰러졌다. 고열이 났으나, 그는 신유의 은사를 믿고 약도 쓰지 않고 버텼다.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닌가’싶어 죽기 전에 꺼리는 것은 모두 회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혼몽한 상태에서 공중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식이 회개하려면 자기나 할 것이지 왜 남까지 끌어들이는 거야?”, 깜짝 놀라서 무슨 소리인가 생각해보니 옛날 짝사랑하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흥, 너는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없어. 너는 버림받은 자야.”, 이성봉은 큰 소리로 외치기를,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고, 이성봉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뜨겁게 회개의 기도를 드리면서, 이 영적전쟁을 이겨냈다. 그리고 이성봉은 사도 바울처럼 찬란한 하늘나라 구경까지 하고는, 그런 연후에 이성봉의 병은 거뜬히 나았다.

  이성봉 전도사는 수원에서 교회를 신축하여 400여 명의 신도를 모아 시무하다가 1930년에 목포로 내려가 섬기는 교회를 부흥시켜, 석조로 된 교회를 지었다. 1932년 32세 때에 목사 안수를   받고 4년 후 신의주교회로 옮겨갔다. 1937년 서울 신학교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하여, 회의와 철야기도회 등으로 피곤해서 4층 방에 들어가 눈을 잠깐 붙이고 누웠는데, 비몽사몽간에 김익두 목사가 나타나 옆구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불길이 일어나 하도 뜨거워서 침대에서 후닥닥 뛰어 올랐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렇게 이성봉은 불세례를 체험하고, 그날 밤 회의에서 이성봉 목사는 부흥사로 임명을 받았다. 소년 시절 김익두 목사와 같은 부흥사가 되겠다고 했던 꿈이 이루어졌다. 이성봉 목사는 회갑 때까지 1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훨씬 빠르게 목표가 달성되었다.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곳마다, 이적이 나타나 성령의 불길이 일어났고. 1938년 평양 명촌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에는 소란을 피우는 귀신 들린 여자를 기도로 잠재우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군산 구임교회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이성봉의 소문이 퍼지면서 만주에서까지 초청하여 순회 집회를 가졌는데. 간도 용정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 연합 집회를 하였는데, 교회 안팎으로 얼마나 회중이 몰려왔는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이 목사는 강단에서 설교를 하지 못하고 출입구에 책상을 갖다 놓고, 교회 안과 밖을 교대로 바라보면서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회중들이 은혜를 받고 헌금을 하였는데, 금반지, 시계 등을 아낌없이 봉헌하였다. 이 목사는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 하여 경계하였으며, 평생 청빈하게 지냈고, 일절 다른 직분을 맡은 적이 없이 부흥목사로 만족하였다. 1939년 이 목사는 공부를 더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일본에 가보니 공부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급하다는 생각에서, 도쿄, 오사카, 요코하마 등지로 집회
를 다녔다. 그런데 이것이 국내 교단에서 문제가 되었다. 공부를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목회를 계속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의 탄압이 심하였던 때라, 이 목사는 만주교회로 보내달라고 하여 1941년 봉천교회 목사로 임명되어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갔다. 거기에서 시무하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도중 어머니의 위독하심 소식을 들었으나 양떼를 방치하고 갈 수 없다 하여 집회 인도를 마치고 가니 이미 장례가 끝난 뒤였다. 어머니도 이 목사를 불러올까? 하고 물었더니, “천국에 가서 만날테니 그럴 것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늦게 온 이 목사도 어머니 무덤에 가서 예를 올리고, 다음 날 바로 집회를 인도하러 떠났다고 한다. 이성봉은 일단 집회를 인도하면 전력을 기울여서 과로로 쓰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이성봉은 “입으로 설교 못 하면 죽음으로 하리라.”는 각오로 결단코 강단을 비우는 일이 없었다. 황해도 송화 무초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고열이 나서 전신이 퉁퉁 부었으나, 1시간 반 동안 설교하고 나서, 기도했는데, 그날 밤으로 병이 거짓말처럼 나았다고 한다. 해남에서는 부흥회 인도 중 급성맹장염에 걸려 배가 몹시 아팠으나 죽을 각오로 마쳤다. 나중에 의사가 와서 보더니 24시간 안에 수술 받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목사는 “아이고, 그만 두시오. 나 죽으면 하나님 손해지 나 손해겠소? 나 그만 이대로 주님께 갈랍니다.”하고 수술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였더니 이튿날 아침에 씻은 듯이 나았다.
  이 목사는 만주 주문교회에서 해방을 맞고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지를 돌며 집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의 교회 탄압이 심해지자 1946년 3월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그가 떠난 지 며칠 안 되어 공산당에서 잡으러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와서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세우고 양떼를 인도하는 한편 임마누엘 출판사를 세워 문서 전도에 힘썼다. 6. 25가 터지자 목포로 내려가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7월24일 인민군 선발대가 들어오자 시골로 피신하였다가 8월   2일 수요 저녁 예배를 인도하고 나서 공산 내무서원에게 잡혀갔다.

내무서원에게 잡혀 끌려가면서 이성봉 목사는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마음속으로 비굴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양놈 비행기가 목포를 폭격한 것은 어느 예수쟁이 간나 새끼가 신호를 해서 그런거야. 동무가 주동자라는 것도 다 알고 있어!”, “나는 예수를 믿고 전도하는 목사일 뿐 그것은 모르는 소리요.”하고 대답하자,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 취조관은 대뜸 언성을 높이면서 욕설을 퍼붓기를, “이 자식아, 똑바로 말해. 네가 이승만을 믿었지, 무슨 뚱딴지같은 예수를 믿었다는 거야. 목사 새끼들은 다 없애버려야 해.”하고는 뒷산으로 끌고가더니,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청년 10여 명이 몽둥이를 들고는 무조건 이성봉 목사를 매질을 했다. 이성봉 목사는 노랍게도 그렇게 맞으면서도 스데반의 순교 장면이 생각나서 마음속으로 저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가 않았다. 얼굴빛 하나 찡그리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얻어맞고 있으니까, “이 자식, 얼마나 살이 쪘는지 도무지 아픈 줄을 모르는군.”하면서 더 강하게 매질을 했고, 그런 과정에서 코피가 터져 뜨거운 피가 쏟아졌는데, 그 때에 이 목사는 문득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생각나서, ‘주님은 나를 위해 피를 쏟아 구속해 주셨는데, 나도 생피를 쏟게 하시니 감사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머리를 호되게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더니, “아주 죽이진 말어. 한 번에 죽여 버리기엔 아까워.”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들은 찬물을 끼얹어 의식을 되찾게 한 다음, 이 목사를 다시 유치장에 넣었고, 이 목사는 유치장 안에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듣기 싫어! 닥치지 못해?”, 사흘 후에 빨치산 20여 명이 따발총을 메고 반동분자를 숙청하러 와서는 “여기 처치할 놈 없소?”, “목사 한 놈 잡았는데, 밤낮 찬송가 부르고 기도만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니, 그걸 왜 여태 그냥 두었소? 어이, 목사 이리 나와!”, ‘이제 꼼짝없이 총살이로구나.’, “목사 노릇 몇 해나 했소?”, “25년 했소.”, “아이구, 무던히 착취해 먹었구나. 그래서 살이 그렇게 쪘소? 예수쟁이들 천당 천당 하는 데 천당이 어디 있소? 당신 보았소?”, “천당 보구 말구요.”, “어디 있소?”, “천당 본점은 보지 못했지만 천당 지점은 보았소.”, “뭐, 지점? 그래, 지점이 어디 있단 말이요?”, “내 마음 속에 있소. 본점 없는 지점이 있을 수 있소? 은행 지점을 보면 본점이 있는 줄 알고 경찰 지서를 보면 본서가 있는 줄 알 것 아니오?” 그들은 이 목사의 말재주에 감탄하였다.“동무는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대장이 묻는다.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진 거요.”, “뭣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를 내린 거란 말요?”, “옛날 이스라엘이 범죄하니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셨고, 우리나라도 이조 500년 동안 당쟁으로 범죄하니까, 하나님은 일본이란 방망이로 36년간 내리치셨소. 그 후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해방을 주셨건만 감사를 모르고 여전히 죄만 지으니 공산당이란 방망이로 내리친는 거란 말이오. 그러나 공산당이 이렇게 들어와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면, 또다시 하나님의 징계가 내리지 않는다고 볼 수 없소.” 이 목사는 공산당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망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총을 겨눈 저들 앞에서 그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하였다. 빨치산 대장은 전에 예수를 믿던 광주 의대생으로 공산당에서 일하고 있지만 믿음의 씨가 아직 조금은 남아 있었는지, 이 목사의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을 보고 고문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옷을 들추어 온 몸이 찢기고 멍들고 부어있는 것을 보더니, 옆에 있는 내무서원을 책망하는 것이었다. “동무들 이거 뭐요. 죽일 사람은 즉결하고 조사할 일 있으면 말로 해야지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이렇게 하니까 우리 인민 정치가 오해를 받는 거요.”하더니 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약을 발라 주고 석방시켜 주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살아났지만 이 목사는 그때 순교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서울 수복 후 이 목사는 임마누엘 특공대를 조직하여 각처의 무너진 교회 재건에 힘썼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등 대도시를 돌면서 천막을 치고 대중 집회를 열어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후방 장병 전도, 소록도 갱생원, 예수 애양원, 부산 상애원 등지에서 나환자를 위한 전도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9년에는 NAE 대표로 도미하여 8개월 동안 워싱턴, 뉴욕, 보스턴, 하와이 등을   돌면서 집회를 열었다. 이 목사는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10일 까지도 말씀을 전했으며 1965년 성결교 합동총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나서 다음 날 “주의 은혜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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