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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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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36 조회1,7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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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
 

  1914년 4월, 경남 함안군 칠원공립보통학교에서 아침 조회가 열렸다. 순서에 따라 동방요배가 있었서, 전교생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는데, 단 한 명의 학생만이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절을 하지 않았다.  손양원이었다. 일본인 교장이 불러서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동방요배를 하지 않느냐?", "동방요배는 십계명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서 절을 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 교장선생은 여러 차례 손양원을 불러 설득을 했지만, 학생이 듣지 않자, 결국 손양원에게는 퇴학 처분이 내려졌는데, 마침 교장이 전근을 가는 바람에 보통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손양원은 부친 손종일 장로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일곱 살 때부터 부친과 함께 교회를 다녔고, 손양원의 두 동생도 후에 모두 목사가 되었다. 손양원은 1919년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밤에는 만두 장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어렵게 공부하던 중 부친이 3.1운동 만세주동자로 마산형무소에 수감되는 바람에 불순사상을 가진 자의 자식이라 하여 학교에서 쫓겨났다. 손양원은   못다 한 공부를 마치려고 1921년 일본 동경 쓰가모 중학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공부하여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주기철 목사를 만났다. 주목사의 "손군,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지만, 위대한 인물이 날터인데, 위인전을 많이 읽어, 위대한 인물이 되도록 준비하게!"라느 말에 힘을 얻은 손양원은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24년 23세 때 18세의 정양순과 결혼하고, 2년 뒤에 부산 나병원의 감만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600여 명의 교인 대부분이 한센씨병자들이었다. 이것이 후에 그가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시작이었다. 그 후 전도사로서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교회, 부산 남부민교회 등을 개척하였다. 29년에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외지 선교사로 청빙되었다. 감만동교회에서는 시간 나는 대로 설교도 하고 환자들을   보살피기도 하였다. 손 목사는 당시 김교신 선생이 발행한 「성서조선」의 잡지를 가지고 사경회처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만동교회를 사임하고 35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대동강변의 능라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다.
  손 목사가 평양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교회 사경회 강사로 초빙되어간 것이 애양원과 인연을 맺게 된 단초였다. 당시 애양원을 출입할 때는 감염이 두려워서 장갑을 끼고 까운을 입도록 되어있었으나 손 목사는 "여기서 일하면서 병을 무서워해서야 되느냐?"고 하면서 그냥 들어갔다고 한다. 애양원 성도들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았지만 이런 모습에서 더욱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애양원의 청빙을 받았다.
  손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해 왔는데, 일본의 강요로 1938년에는 예수교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참배하기로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평양신학교를 폐쇄하였다. 손 목사는 경남노회 부산지방 사찰회 순회전도사로 일하면서 계속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시찰회 일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9년에 전남 여수에 있는 한센병자 수용소인 애양원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교회에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참배 반대를 외쳤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경찰로서는 손 목사가 눈엣가시처럼 귀찮은 존재였다. 당장 체포하고 싶어도 손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한센병자 시술소라는 특수성 때문에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일본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 목사는 모든 것을 예감하고 정양순 사모에게 "아무 염려 말고 기도나 해주시오."하고는 연행되어 간 후, 8. 15 해방 때까지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연행 후 손 목사는 10개월 간 미결수로 있으면서, 모진 심문을 받아 생명이 위독할 정도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검사 앞에 불려갈 때도 들것에 실려 다녔다. 결국 1년 6개월 형을 받고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당시 손 목사는 감방에서의 쓸쓸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홀로 빈 방 지키느라 외롭지만(獨守空房 孤寂感) 성삼위와 동거하니 네 식구라(三位同居 四食口) 온갖 고난 모두 내습하나(多種多難 皆來襲) 고난 중에 진리를 다 체득하리라(苦中眞理 皆體得)

1943년 5월 17일 만기출옥을 앞두고 담당 검사가 손 목사를 불러놓고, 사상을 전환하라고 위협적으로 말하기를, "너는 뎅꼬(轉向-전향)해야만 나갈 수 있다."라고 했더니, 손양원 목사는 검사에게 평안한 어조로 대답하기를, "검사영감 당신은 뎅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싱꼬(信仰-신앙)가 문제입니다."라고 대답을 해서, 손양원 목사의 대답은 당시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검사국에서는 손 목사가 이대로 출옥하면 틀림없이 또 다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는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구금 시에는 40일 감식형(식사량을 반감)을 받아서, 영양실조에 빠져 한쪽 눈을 실명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무렵 손 목사 가족들은 풍비박산이 되어 숨어 사는 형편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이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출옥하게 되고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도 돌아와 만나게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교회로 돌아와 다시 한센씨병자들과 생활하게 되었고, 1946년 3월에 경남노회 마산문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스스로 다짐하기를, '비록 육체는 일그러졌지만, 영혼은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성도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고, 자신의 결심대로 손양원목사는 애향원으로 모여든 나병환자들을 정성껏 돌보고 치료하여 주었다. 진물과 핏자국, 땀이 엉겨붙은 상처를 맨손으로 닦아주고, 짜주고,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곤 하였다고 한다. 환자의 목을 끌어안고 기도해 주기도 하였다. 환자들은 손 목사의 이러한 헌신에 감복하여, 더욱 존경하고 손양원 목사를 의지하였다.
   1948년, 여수 순천 지역에서 공산당에 의한 반란 사건이 터졌다. 좌익들이 반란을 일으켜 국군을 죽이고 난동을 부려 삽시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 때 손양원 목사의 아들로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동인, 동신 형제가 공산당에 가담한 친구들에게 잡혀갔다. 예수를 버리고 전향하여 공산당에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공산당원들은 처참할 정도로 매질을 하며 강요하였다. 이에 두 형제는"너희들이 내 목은 뽑을 수 있어도 내 신앙은 뽑을 수 없다. 너희들도 이런 악행을 하지말고 예수를 믿어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처럼 동인 형제가 완강히 거부하자, 공산당원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순천경찰서 뒷마당으로 끌고 가서 형제를 총으로 쏴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는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하고 장례식을 치를 때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아홉 가지 감사를 드렸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오.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를 당함이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공산당에 의해서 발생한 여순반란 사건 때에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잃고도, 아들의 장례식에서 조객들에게 손양원 목사는 말하기를,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오.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을 위한 장례식장은, 손양원 목사의 이 놀라운 말에 또 한 번 일순간에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얼마 후에 동인이와 동신이를 죽인 좌익학생 안재선은 손 목사의 백방으로 노력한 간청으로 사형되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명을 받았고, 구명을 받은 안재선에게 손목사는 말하기를, "너의 죄는 기억하지 않겠으니 하나님 앞에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어 훌륭한 일꾼이 되어다오. 죽은 내 두 아들이 할 일을 네가 대신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손양원 목사는 안재선을 아들로 받아들여,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켜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그 후에 1950년 6.25 동란이 터졌다. 공산군이 밀려 내려왔다. 온 나라가 엉망이고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 교인들은 손 목사에게 어서 피신을 하시라고 권하였다. 한센병자들도 애걸하며 피하시라고 하였으나, 손 목사는 거절하였다. 나중엔 강제로 피난선에다 태웠지만 도로 뛰쳐나왔다.    손 목사는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다. 손양원 목사는 말하기를, "이 어려운 때에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불쌍한 한센병자의 신앙을 지켜야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라고 하사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죽는 것 이상 큰 영광이 어디 있겠나. 첫째도 순교요,   둘째도 순교요, 셋째도 순교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1950년 9월 13일 새벽 집회를 마치고 강단 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공산군이 들이닥쳐 손  목사를 끌어내갔다. 공산군은 손 목사를 15일 동안이나 가두어 놓고 미국 놈 스파이, 미국 놈 앞잡이, 공산당 악선전자라 하여 마구 때리고 괴롭혔다. 그러다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는 바로 그 날, 여수 미평 과수원으로 끌고 들어가서 총살하고 말았다. 그때 나이 48세였다. 손 목사의   유해는 여수 애양원 천여 명의 신도와 원근 각처에서 모여온 사람들의 애도 속에 두 아들이 묻혀있는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참으로 손양원 목사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말씀 그대로 순종한 사랑의 사도요 성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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