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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운동가 김익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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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38 조회1,8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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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운동가 김익두 목사

 

“너는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해야 한다." 김익두가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임종에 가까워지자 아들을 불러놓고 한 유언이다. 김익두는 1874년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의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 일을 잘 돌보지 않아 가난하였으나 한학에 조예가 깊어 아들에게도 한문과 산법(算法)을 가르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장티푸스에 걸려 신음하자 30리 밖까지 가서 약을 구해다가 정성껏 보살펴드려 소생케 해드렸다. 16 세 때는 서울에 올라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고향에 돌아가 결혼하고 가게를 차려 생계를 꾸려나갔다. 인생 문제에 회의가 들어 동학에 입문해 보기도 하고 불도(佛道)에 기웃거려보기도 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마침내는 주색잡기에 빠져 불한당이 되어 갖은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0년 27 세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박태환의 인도로 안악교회에서 열린 평양의 소안론 목사의 순회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큰 감동을 받고 결신하게 되었다. 결신한 지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친구들에게 끌려 술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마시지 않고 안주만 먹다가 친구들의 강권에 못 이겨 한 잔 두 잔 마시다가 그만 대취하여 기생을 희롱하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산에 들어가 눈물로 통회하였다. 이때 그는 비몽사몽간에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후로부터 그는 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김익두는 28세 때 재령읍교회 전도사로 초빙 받으면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교인은 여자 10여 명에 남자 1 명의 빈약한 교회였다. 그 해 10월에 그에게 세례를 준 소안론 목사의 부탁으로 신천교회로 옮겨갔다. 그러나 거기에서 김익두는 양귀신을 섬기는 자라 하여 발길로 차이고 온갖 욕설과 조롱, 돌팔매질을 당하는 핍박을 받았다. 어쨌거나 그는 그후 신천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1924년에는 700여 명의 교인이 모이게 되자 동서 교회로 분리하게까지 되었다. 1906년 33세 때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0년에는 총회장에 당선되어 교계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김악두는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초기 부흥회 때부터 사도행전적인 이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실패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신천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니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김익두는 베드로 생각이 나서 "일어나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앉은뱅이는 "일어나기는요? 이런 제가 어떻게 일어납니까?"하고 대꾸하였다. 아무런 효험도 없이 말이다. 김익두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돈 몇 푼 쥐어 주고는 가버렸다. 그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신유의 은사를 사모하며 지내던 중 마가복음의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병 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 17~18)를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다. 그런 후 한 달만에 신유의 권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19년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을 때는 턱이 빠진 걸인을 위해 금식 기도를 하는 중 턱이 나았고, 경산읍교회에서는 중풍병이 든지 3년 된 부인을 안수 기도로 고쳤다. 이듬해에는 대구에서 반신불수로 고생하는 중년 남자를 완전히 고쳐주었다. 또 부산에서는 생후 8개월에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안수 기도로 고쳐 주었고, 김해에서는 23년 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완쾌되는 역사가 나타났다. "선생에게 임했던 권능은 과연 사도 이후의 큰 권능이다.…선생으로 하여금 무디의 자리에 서게 하였다면 무디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루었을 것이다."라고 김인서 목사는 말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실제로 나라 안은 물론 일본 중국 시베리아까지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부흥회 인도 776회, 설교 28000여 회, 결신자 288만여 명, 교회 신축 150여 교회라는 놀라운 활동을 하였다. 그를 한국의 베드로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는 기독교가 식민통치에 큰 장애가 된다고 여기고 신사참배라는 명목으로 기독교를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압력에 굴하여 1938년 평양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교인과 목사들은 우상숭배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의 실적이 부진하자 교계 원로들을 참배케 하여 신자들에게 본을 보이려 하였다. 그들은 유명 부흥사요 총회장까지 지낸 김익두 목사를 이용하려 하였다. 형사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 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러자 경찰서장의 호출을 받았다. 서장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자 고문하기 시작하였다. 목검으로 전신을 구타하는 고문,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를 끼우고 비트는 고문, 두 손을 의자 다리에 잡아매어 놓고 손톱 밑을 대나무 침으로 찌르는 고문, 얼굴을 보자기로 씌어놓고 호스로 물을 붓는 고문(이렇게 하면 보자기가 착 들러붙어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김익두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기도만 하였다. "주여, 힘을 주소서.", "주여, 이 영혼을 거두소서." 만신창이가 된 김익두가 서장실에 끌려갔다. 서장은 김익두목사에게 "당신은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교인들에게 설교해서는 안 되오. 국민으로서 국가의 시책을 어기는 자를 목사로 인정할 수 없소."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김익두는 신의주제일교회의 부흥강사로 초빙 받아 가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일제는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 김익두를 교인들과 함께 연행하여 갖은 핍박을 다하였다.
   해방이 되어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김일성과 강양욱은 반공사상의 온상인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기독교도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는 김익두 목사를 본인의 승낙도 받지 않고 명목상의 총회장 자리에 앉혔다. 강양욱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다. 공산당들은 교역자는 물론 일반 신도들도 강제로 연맹에 가입시키고 가입을 반대하는 사람은 파면에 이어 검거, 투옥하였다. 6. 25 남침에 앞서 교회 지도자들을 소탕해 버리려는 음모였다. 6. 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익두 목사가 시무하는 황해도 신천에서는 반공기독교 청년들이 공산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몰래 방송을 듣던 중 서울이 탈환되고 유엔군이 신천 근방까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무렵 공산군들은 패하여 북으로 쫓겨가고 있었다.
   1950년 10월 14일 새벽, 김 목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는 감격으로 교회의 새벽종을 울렸다. 50여 명의 교인들이 금방 모여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공산당의 압제에서 이 백성을 건져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눈물로 기도를 마치고, 김익두 목사가 막 설교를 시작하려는데, 한 청년이 다급하게 교회로 뛰어 들어왔다. "목사님, 성도 여러분! 위험합니다. 공산 패잔병들이 뒷산에 남아 있습니다. 어서 피신하십시오."라고 했는데, 그러나 김 목사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설교를 계속하였다. 오히려 회중에게 "여러분,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곧 들어옵니다. 우리 두 손 들고 그들을 환영합시다."라고 했다.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은 돌아가고 몇몇 교인들이 김 목사와 함께 교회에 남아 있었다. 그때 공산군 패잔병 1개 분대가 교회 안으로 무작정 들이닥쳤다. "아니, 웬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구둣발로 들어오는 거요?",라고 김익두 목사가 만류를 하자, 공산군 사병이 "이 영감쟁이가 무슨 잔소리야."라고 받았고, "어서들 나가시오. 여기는 총칼 메고 함부로 들어오는 데가 아니오."라고 김익두 목사가 말을 하자, "영감이 목사요?", "그렇소.",라고 답을 하자, "반동이군."하면서 김익두 목사의 가슴에 총을 들이댔다. 교인들이 앞을 막아서면서 소리치기를, "이러면 안됩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사자예요."라고 하자, 한 공산군 병사가 "간나이들, 비키지 못해?"하면서, 총을 쏘았고, 교인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는 "죄 없는 사람을 해치지 말아라! 천벌이 두렵지 않느냐?"f고 야단을 쳤고, 공산군 병사는 "뭐이, 어드래? 이 간나이…."라고 하면서 김익두 목사에게도 발포를 했다. 김익두 목사는 마치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다. 교회 마루 바닥에 선혈이 낭자하게 번져갔다. 그렇게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목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작은 목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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