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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엘리야 박관준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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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1:40 조회1,9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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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엘리야 박관준 장로

 

   1939년 일본이 황민화 시책의 일환으로 종교인의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을 때, 박관준 장로가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국회(중의원)의장 고야마에게 보낸 경고문의 일부다. 

   “진리는 유현오묘하여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 원컨대 의회 제위와 정부 제공은 다음을 한번 시험하여 주소서. 그 시험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거세(擧世)가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를 모두 정당하다고 정의를 내리니 일차 시험하기 전에는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 종파, 특히 신도 (神道-일본 고유의 민족종교), 불교, 기독교의 대표적인 사도자(師道者) 한 사람씩 소환하여 불로 시험하기를 바람. 2. 즉 무인지경에 화목 백단씩 쌓아놓고 각각 소환된 종교 대표자가 장작 위에 올라앉게 하고 일시에 불을 질러서 최후까지 재가 되지 않는 대표가 신봉하는 종교가 참신 여호와 하나님의 참 종교인 것을 확인하고, 그 종교를 국교로 인정할 것을 건의함.” 이런 일화로 인해 그를 한국의 엘리야라고 일컫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1875년 평북 영변군 연주성에서 지주인 박치환 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은 위로 세 아들을 모두 어려서 잃고 하나 남은 박관준을 남달리 귀하게 길렀다. 여섯 살 때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떼고 열 살 전후에는 명심보감, 논어, 맹자를 독파하고 15 세에는 시경, 중용, 중용, 노장학과 불경 등을 두루 읽어내었다. 15세에 두 살 위인 이관선과 결혼하였으며, 17 세에 부친을, 다시 몇 년 뒤에는 모친을 여의였다. 인생의 무상함과 공허함을 이기지 못한 박관준은 평양 강계 등지로 쏘다니면서 주색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러다가 재산 다 날리고 몸마저 중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을 위해 새벽마다 우물가에 돗자리를 펴고 신령님께 빌던 부인은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자 식칼로 자신의 허벅지의 살을 도려내고 단지에 피를 받아 녹용을 탄 약물이라고 하고 남편의 입에 쏟아 넣어 남편의 목숨을 건져내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박관준은 부인의 정성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난 날을 뉘우치고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기 수양에도 힘썼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유불선교의 경전 읽기, 시문 짓기 등에 몰입하였다. 당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으로 지식인들이 흥미를 갖고 접근하고 있던 때이다. 그러나 박관준은 동양인은 서학보다도 동학을 하여 동방예의지국 국민의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독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30대에 들어서던 1905년 어느 가을날,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서를 뒤적이다가 잠시 명상에 잠기려는데, 하늘로부터 갑자기 “절벽이 위험하면 혈벽(血壁)에 서라.” 라는 요란한 음성이 들려왔다.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절벽이란 무엇이며 혈벽이란 또 무엇인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이 말을 종이에 적어놓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절벽이란 주색잡기로 허랑방탕한 내 생활이고, 혈벽이란 언젠가 선교사가 말하던 십자가, 예수가 흘린 피 바로 그거 아닌가! 이렇게 풀이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고 기쁨이 넘쳐났다. 그는 그 자리에 꿇어 앉아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못난 자를 불러주시니 감사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등지고 나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 같은 것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그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눈물만이 비오듯 쏟아졌다. 이렇게 하여 그는 드디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아직 기독교가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선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정봉익이라는 친구는 그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게 되고 나중에 목사가 되고 두 아들까지 목사가 되기도 하였다. 박관준이 전도한다는 소문을 들은 선교사들이 그에게 성경을 보내주었다. 그로부터 그는 밤을 새우면서 성경을 읽었다.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뜻을 깨닫고 얼마나 감격하였는지 모른다. 그는 1907년 새 사람이 된 표시로 상투를 자르고 영변 감리교회에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당시에는 일본에 가려면 경찰이 발부하는 도항증이 있어야만 하였는데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섰더니 형사들의 감시를 벗어나 목적지인 동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박 장로는 의사당에 뿌릴 계획으로 경고문을 작성하여 가슴 깊이 감추고, 친일파 국회의원 박춘금을 통해 얻은 방청권을 가지고 일본에 가있던 아들 영창과 안이숙 선생과 함께 경호원의 몸수색을 무난히 통과하여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방청석에 앉았다. 1939년 3월 24일 아침, 이윽고 총리대신과 각료들이 국무위원석에 앉자 고야마 의장은 엄숙한 어조로 개회를 선언하였다. 그때 박 장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고문 네 통을 5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앉아있는 아래층으로 내려던졌다. “여호와 가미사마(神樣)노 다이시메이(大使命)다(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 하고 외치면서 200그램 중량의 큰 종이 뭉치를 내리 던지자 국회의사당이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으악, 으악…�저게 뭐야?”, 거기 적힌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신다.’ 고 적혀 있었고, ‘종교법을 통과하여 정부가 종교를 지배한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일본에 재앙 이 내릴 것이다.’, ‘일본 신도를 폐지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하라.’는 등이었다. 박 장로 일행은 즉시 체포되어 32일간 도쿄 경시청에 수감되어 신문을 받다가 한국으로 송치되었다. 박 장로는 평양에 돌아와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경찰서를 순방하여 서장과 고등계 주임을 만나 피검된 교역자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1942년 봄, 그는 치안유지법 및 황실 불경죄 등의 죄목으로 평양감옥에 투옥되었다. 고희를 바라보는 죄수 286 번. 박 장로는 옥중에서도 자기 몫의 밥덩이를 다른 수감자들에게 나눠주면서 전도하였다. 그는 날마다 옥중 성도, 한국교회, 일제의 회개, 흩어진 가족, 순교자의 반열에 들도록 기도하였다. 그는 취조관들에게 말하기를. “두고 보시오.당신들이 아무리 나를 가두려고 해도, 1945년을 넘기지 못할 테니. 내년 8월에는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된단 말이오. 하나님께서 계시로 가르쳐 주셨소.”라고 했다고 한다. 1945년 1월 1일부터 그는 옥중에서 70일간의 금식기도를 시작하였다. 목숨 걸고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는 중 여러 가지 체험을 하였다. 커다란 바위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많은 샘물이 쏟아지는 장면,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떡덩이를 받는 일, 온몸아 불덩어리가 되는 일, 캄캄한 밤중에 강렬한 햇살이 비추면서 옥문이 열리고, 갇혀있던 신앙동지들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나오는 일 등. 금식기도가 끝나갈 무렵인 3월9일 새벽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음성이 들려오기를. “관준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오늘이 졸업날이다. 내가 금면류관과 금대를 너에게 주리라. 이제부터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 하겠다. 천국이 네 것이니라.”라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박 장로의 가슴은 한없이 뛰기만 하였다. 이튿날 극도로 쇠약해진 박 장로는 병보석으로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옆에 있는 부인에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기를, “안 집사, 디모데후서 4:7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을 …”, 부인이 읽어주자. “됐어,… 다음에는 이사야서 11:10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을…”, 부인이 찾아서 읽어주니, 그 말씀을 듣고는 “아멘, 주여 감사합니다.”하고는 얼마 후에 말을 잇기를, “내 책임을 마쳤으니…이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박관준 장로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는데, 박관준 장로가 마지막 부른 찬송은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이었고, 박관준 장로는 그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꿈에 그리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날이 1945년 3월 13일로 향년 70세였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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