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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重生)과 회심(回心)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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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08 조회1,7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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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重生)과 회심(回心)의 차이

 

(1) 스테판 차르녹 (Stephan Charnock, 1628-1680) 영국의 장로교 목사

 

 중생은 영적인 변화(change)이며, 회심은 영적인 활동(motion)이다. 중생으로 하나의 힘이 부여되고, 회심은 이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중생에서 우리들에게 전환할 수 있는 원리가 주어지고, 회심은 바로 그 전환하는 것 자체를 말한다. 그 원리로서 우리가 자연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회심은 하나님에게 실제로 고정시키는 최종단계(terminus ad quem)로서의 우리의 행동이다. 중생은,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회심은 그렇게 주어진 것에 근거해서 실제로 행하는 것이다. 첫째, 회심은 결과라고 한다면, 중생은 원인과 같다. 생명의 활동이 있기 이전에 생명이 생겨야 한다. 생명이 활동의 원인인 것이다. 언약에 있어서, 새 마음, 새 영, 그리고 그 언약을 맺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영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과는 구분된다.(겔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7) 또한 그것들은, 하나님의 길로 우리가 처음 들어서게 되는 것과도 구분되며, 우리들의 그 이후의 활동의 원인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I will cause you to walk in my statutes).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며, 우리를 회심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그 힘을 작동하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성상 죽어 있어서, 그들 위에 무거운 돌이 올려져 있는 상태이다. 중생은 그 돌을 그것이 올려져 있는 마음에서부터 굴려 없애버리는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회심이란, 살아난 몸이 활동하게 되는 것처럼이나 자연스러운 일로서 중생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활동의 원리가 활동을 산출하는 것이다. 

둘째, 중생에 있어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하지만, 회심에 있어서는 능동적이다. 마치 어린 생명이 자궁에서 처음으로 수태가 될 때에 그 생명의 유입을 위해서 아무런 공헌을 하는 것이 없지만, 생명이 유입된 이후에는, 그 생명이 능동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활동하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처음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피조물 편에서의 어떤 그 무엇에도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활성화된 이후에는 우리들이 그 분의 보시기에 능동적으로 또한 자발적으로 행하게 된다. 호세아 6장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살리시며…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그 분 앞에서 행하게 될 것이며, 또한 ‘여호와를 힘써 알게 될 것이다.’ 

중생은, 피조물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인 반면에, 회심은, 그 하나님의 활동에 의하여 주어진 첫 번째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하게 되는 피조물의 활동이다. 이 첫 원리에서부터 모든 이후의 행동, 곧 믿는 것, 회개하는 것, 죄를 죽이는 것, 죄를 각성하게 되는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행동들에 있어서 사람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원리가 주어지는 것에 있어서는 단지 수동적일 뿐이다. 이 모든 행동들은 그 첫 은혜의 유입을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의지의 작용인 것이다. 회심은 주님께 우리를 드리는 것이다(고후8:5).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고후 8 :5).우리 자신들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그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전적이며 순전한 것이고, 주님 자신께로 말미암아서 가능한 것이다. 새롭게 된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다고 하지(롬8:14)끌려진다거나 강제를 당한다고 하지 않는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사람의 의지 속에 있는 어떤 경향과 성질을 넣으시는 것은, 그것을 각성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하지만, 그 경향의 힘을 따라서 그 경향이 주어진 의지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며, 피조물의 활동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인도해 가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아이에게 생명의 원리를 제공해 주며, 그를 손을 잡고는 인도해서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아이 안에는 이런 움직임의 원리가 있고 또한 그렇게 움직이고 싶은 의지가 있을 때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된다.  

 

 

(2) 성령론과 구원론 - 마틴 로이드 존스

중생한 날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 날이며, 그 중생으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시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시 110:3). 그래서, 회심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때 피조물이 능동적이어야 하지만, 그 능동적일 수 있는 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나 자신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산 불능의 자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먼저 영혼 안에 심겨 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할 때,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중생을 회심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자주, 이 둘은 혼동되어집니다. 하지만, 중생은 회심이 아닙니다. 회심은 우리가 하는 것인 반면, 중생은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중생할 때에 우리가 하는 그 무엇입니다. 잠시 뒤 이점을 설명 드릴 것입니다.

회심은 어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실제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지만, 중생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회심할 때, 혹은 돌아설 때, 그들은 자신이 중생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회심은 중생 이후에 옵니다. 사람들 안에서 먼저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외적인 삶과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과 그 씨뿌림의 결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은 생명의 씨를 심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와는 명백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발생(generation)과 출생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발생은 출생이 있기 오래전에 일어납니다. 발생은 하나의 행동입니다. 특정한 과정이 진행된 후 발생은 실제 출생의 과정으로 종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중생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실제로 태어나는 출생이 아니라, 발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실제 출생 시에 발생하며,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부르심은 유효하고 그들은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발생의 과정, 즉 생명의 씨뿌림이 이미 일어났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구분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중생과 양자됨을 구분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양자됨도 중생과 혼동하는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둘은 명백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생을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심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것이 중생의 본질입니다. 좀 더 확대된 정의를 원한다면, 다음의 문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중생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리(principle)가 심어지는 하나님의 행동으로써, 그 결과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이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실제 출생은 이 성향이 첫 번째로 발휘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3)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는 사람․

첫 번째 : 데이비드 클락슨 (David Clackson, 1621-1686) 영국의 회중교회 목사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6-27)

이런 명령이 떨어졌을 때, 기꺼이 자기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가장 사랑하는 친족들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사람, 자기의 조국과 거주지로부터 떠나지 못하는 사람, 자기의 재산과 외형적인 주거를 잃기를 거부하는 사람, 자기의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을 상관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무엇보다 사랑하지만,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친족과 재산과 조국과 자유를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보다 그것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가장 나중에 버리는 법이다.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이런 모든 것들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제자로서의 사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며, 따라서 기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누가복음 14:26~27에 대한 논문 중에서』

․ 두 번째 :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

성경은 넘치도록 강조하기를, 진지하고 온전한 믿음에서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몫이라는 망설임 없는 선택을 하며, 모든 것을 그를 위하여 저버리며, 자기의 의지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적으로 정하며, 비용을 예산한다.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믿음과 그에 따르는 모든 것을 향하여 나아가고,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즐기던 것이라도, 또는 우리의 생명일지라도 기꺼이 미워하며, 모든 어려움을 감수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우리 자신을 모두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리며 그 어떠한 것도 유보하거나 감추어 놓지 않는다. 즉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큰 의무를 강조한다. 즉 그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버려서 우리는 없어지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우리를 부인하여야 함을 말한다.
- 『종교적 정서』(Religious Affections, 1746)중에서

 

(4) 초대교회의 안식일은 어떤 의미였을까?

스토트는 이에 대하여 세 가지의 주된 이해를 제시한다.

(1) 안식일은 유대교 제도다.
안식일에 대한 초대교회의 첫 번째 인식은, 안식일 준수는 유대교 체계의 일부이며,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교부들은 안식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여기에는 성전, 제사, 할례, 정결법이 포함되며, 이것들이 지나간 것처럼, 안식일도 지나간 것으로 보았다.(이레니우스, 오리겐 등). 또한 안식일 규례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라'(사 58:13)는 말씀에 어긋나는, 굴레와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교부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모세 이전에는 어떠한 안식일 준수 규정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아벨, 에녹, 그리고 족장들은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살면서도, 안식일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세 율법이 공포 되고서야 안식일 규례가 유대인에게 시행되었다는데 교부들은 동의한다.

(2) 안식일은 육체적 유익을 위한 날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사람에게는 안식을 위한 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하는 어려움 때문에 일곱 번째 날을 안식을 위한 날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에게 이 안식은 오직 노동하는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아담도 타락 전에는 안식일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타락 전에는 아담의 노동도 고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식일은 노고를 하는 노예와 동물들을 위한 날이기도 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확증한 것으로 보인다.

(3) 안식일은 육체의 유익만이 아니라, 영적인 유익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터툴리안은 유대인에 대항하는 글에서, 안식일은 일시적이며,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렇지만 마르시온에 대항하는 글에서는 "그 분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불리셨다. 그 분은 당신께서 스스로 안식일 제도를 세우셨으며, 완전히 파괴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셨다.." 터툴리안의 글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유대교 안식일은 완전히 지나간 것이다. 그렇지만, 안식일의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어거스틴은 일곱째 날의 이런 의미가 여덟째 날의 완전한 안식으로 통합되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참 안식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rest)을 주리라!"(마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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