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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빙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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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14 조회1,6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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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빙 리빙스턴

 

“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

 

데이빗 리빙스턴은 일반인에게는 지리학자, 탐험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는 스코들랜드의 불란타이어에서 1813년 3월 19일 낮은 신분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매우 가난했다. 그는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의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였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한 때 방적공장에서 방적공이 되어 많은 급료를 받을 때에, 중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끌려서, 자신이 할 일은 그런 일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리고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래스고우에 있는 앤더슨 대학에 들어갔다. 의학공부를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회에도 지원을 신청해 놓았다. 그는 수습생으로 받아들여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840년 리빙스턴은 의학공부를 마치고 핀스베리의 알빈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 때는 이미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런던선교회는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더 이상 선교사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리빙스턴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펫을 만난 것을 계기로 남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다. 리빙스턴은 12월 조오지호에 승선해 남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리빙스턴은 세츠와나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곧 케이프를 떠났다. 그는 북쪽으로 길을 떠나 쿠루만과 보츠와나의 지역으로 들어갔다. 쿠루만을 건설한 로버트 모펫은 20년 동안 선교에 힘써왔다. 

현지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인구가 많고 회심자가 많은 번영하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 땅은 거의 황무지였으며 한발의 피해를 입고 있었고 관목에 덮인 땅이었다. 종교적 상황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리빙스턴은 많은 현지인이 기독교를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립된 부족들에게 유럽인들은 이상하게 보였고 설교자들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사람들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리빙스턴은 머리를 낮추고 기도했는데, 이것을 본 그들은 그의 신이 땅속에 있다고 생각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12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회심자 밖에 얻지 못한 데이빗 리빙스턴은 점점 더 전통적인 선교방법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문호가 열려서 유럽인이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고, 쉽게 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자각을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인은 먼저 유럽의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러면 뒤떨어진 자기의 습관을 버리고, 서구의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기독교, 서구와의 자유로운 교연과 아프리카의 개화”는 불가불리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은 후에  리빙스턴은 가족들을 영국으로 보냅니다.
잠베시강은 오늘날의 잠비아에서 발원하여 앙골라 동부를 통과해서, 남동쪽으로 잠비아와 모잠비크를 가로질러 아프리카 남동 해안으로 빠져나갑니다. 리빙스턴은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준비해두셨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때부터 리빙스턴의 삶은 아프리카를 기독교 선교 사업 앞에 개방시켜야 한다는 집념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리빙스턴은 4년 동안 전혀 서구인이 탐험하지 못한 지역 안에서만 언주민들과 함께 4,000마일을 탐험했습니다. 짐베지 북방 탐험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리빙스턴은 항상 말라리아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내게 할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라는 확신을 가진 리빙스턴은, 많은 동료들을 앗아간 질병이나 생활의 불편함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4년 간의 복음이 다닐 길을 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감당한 아프리카 횡단 여행을 마친 리빙스턴은 영국으로 돌아가서 그가 감당한 일 때문에 각계로부터 굉장한 평가와 대접을 받았는데, 리빙스턴이 받은 많은 영예가운데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은 법학박사학위도 있습니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아프리카 선교여행 경험을, 그는 재빨리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1857)이란 책으로 발간을 했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여러 얼굴은 지닌 인물입니다. 리빙스턴은 사람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칼빈주의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점을 확신을 했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고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신앙적인 확신이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감당하면서 겪었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게 했고, 아프리카에서 만난 원주민들에게 큰 신뢰를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언제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봉사를 받으셨다면 내 인생은 나의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리빙스턴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항상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획은 한 사람의 인생보다 크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자신의 소명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리빙스턴의 선교적 자세는 개척자적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리빙스턴은 "아직 선교사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천의 마을"에 대한 부담을 가진 선교사였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영국에 있는 친구들이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편지를 보내기를,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주면 좋겠네."라고 했더니, 리빙스턴이 정중하게 답장으로 그 제안에 대하여 거절하며 말하기를,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합니다. 선교사로서 리빙스턴이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고, 리빙스턴이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가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873년 5월 1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리빙스턴의 개척자적인 삶은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업적을 이루게 하는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내륙 깊은 곳까지 복음이 갈 수 있도록 길을 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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