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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윌버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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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19 조회1,5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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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암 윌버포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기 복음적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숙부와 살았다. 숙부는 노예 상인이었다가 찬송가 작가가 된 존 뉴턴의 친구였다. 1780년 대학 동창생 피트와 함께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의회 개혁과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였다. 그 후 1784∼1785년 유럽 여행 중에 그의 교장이었던 아이작 밀러와 토론을 하면서 유명한 종교 서적「영혼에서 종교의 발생과 진보」와 성경을 읽는 중에 진지하게 회심을 했다. 윌버포스는 1785년 후반에 영적인 회심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전의 습관들을 모두 버렸다. 그는 자신의 중요한 공적인 시간을 모두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했다. 1787년 그의 노예 해방 투쟁은 하원의 노예 문제 개혁 운동의 지휘를 떠맡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노예해방운동에 대한 결의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윌버포스는 많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판매, 노예제도를 통해 생산한 설탕 불매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하여, 대중의 여론을 조성하고 책자 출판을 통해서 노예제도폐지운동을 전개했다. 드디어 1807년 영국 하원은 '노예무역폐지법'(The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다. 

윌버포스는 박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복음주의자 그룹의 중심 인물로 해외선교운동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1833년 '노예해방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해서 영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웨슬리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교회와 채플(비국교도들의 교회당)의 문들이 모두 열렸고, 해방된 노예들이 몰려들어 대만원을 이루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영 제국의 악법과 맞서 싸웠다. 그는 삶 속에서 매력과 재능 그리고 웅변의 능력을 사용하였다. 날카로운 푸른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진 이 아담한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의회 연설가였다. 그의 어조는 독특하고 음악적이어서 그의 정적도 그의 연설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윌버포스는 1833년 8월 6일 세상을 떠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는 지금도 영국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깊은 영성과 실력을 구비한 평신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총체적 부패 속에서도 의와 양심을 포기하지 않은 지도자의 모범을 보였다. 윌버포스는 사회악과 맞선 ‘영국의 양심이다. 가장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개인은 무력하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구조적인 악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보통 사람은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라고 결론을 짓고, 그로 인해 무기력증후군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꿈이 없으면 안일이나 좌절, 이기심의 수렁에 빠져서 파멸하기 십상이다. 윌버포스는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신앙적인 양심을 가지고 사회악과 싸워 승리했다. 

 1787년 10월 28일, 28세의 영국의 젊은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탁월한 정치인이요, 부유한 요크셔 상인의 아들이었던 윌버포스는 자신의 이 비전이 당시 영국 사회에 가져 올 파문을 잘 알고 있었다. 18세기 말, 세계 최강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영국이 1776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의 식민지에 공급한 노예 수는 약 3백만 명 정도라고 한다. 당시 노예무역은 영국 식민지 산업의 근간이었으며,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무역이 영국 선원들에게 탁월한 훈련을 제공하고, 영국 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신병 모집의 터전을 제공했다. 노예무역은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을 고용했고, 그 고용효과는 약 16만 톤의 선박과 그에 필요한 선원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고, 그것은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따라서 노예무역의 지지자들은 막강한 상인, 재벌, 넬슨 제독 같은 식민지 기득권 세력, 대부분의 왕족, 귀족들로 구성되어 어떤 반대의 소리도 매국으로 치부해 버렸다. 왜소한 체구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대(對) 의회 논쟁을 통해서 영국이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제도를 고집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암살 위협과 갖은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의 많은 뜻 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외롭고 기나긴 싸움을 버텨 나갔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드디어 영국 의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또한 노예무역 폐지라는 큰 과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타락한 영국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다. 가난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복권 제도를 20년에 걸친 의회에서의 공방 끝에 폐지시켰고, 가난한 사람이 병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하였다. 과다한 노동 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노동 보호법'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개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교육을 시키고, 취업을 알선하는 제도를 정부가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했고,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제도를 대폭 개선했다. 가난한 자도 합리적인 재판과정을 거칠 수 있게 했으며, 형벌제도에 있어서 벌보다는 갱생(更生)에 초점을 두게 했다. 또한 상류사회 남자들의 결투 제도 폐지에 앞장섰고, 호화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봉사에 헌신하도록 했다. 영국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런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많은 사람이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윌버포스가 노예무역 금지라는 인기없는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 윌리엄 피트에 이어 수상직을 계승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던 날, 이미 야망을 버렸고, 자기이익이라는 독재자와 대결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그런 용기의 대가로 윌버포스는 모욕과 수치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라는 새로운 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된 흑인들에게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준 윌버포스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와 말씀묵상으로 보냈던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었다.

1904년 영국의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은 이반 로버츠이다. 전형적인 웨일즈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츠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가 침체된 신앙의 회복을 위해 10년 이상 기도했다. 그러던 1904년 봄 어느 날 밤 로버츠는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와 기쁨으로 충만한 것을 느꼈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다시 가을이 되어서 로버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학교 주변에서 조그만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집회의 주제는 ‘나를 굴복하게 하소서’였는데 이것이 특별히 로버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것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로버츠는 앞으로 나가서 “오 주여! 나를 굴복하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로버츠는 이 기도 가운데서 자신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을 느꼈다. 로버츠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굴복하자 그의 마음 속에는 강같은 평화가 가득차게 되었다. 로버츠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다. 만일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굴복하지 않으면 언젠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무서운 심판 가운데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그들의 영혼이 불쌍해졌다. 그후 그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놀라운 부흥이 웨일즈 전역을 덮고 있다. 나라 전체와 도시에서, 지하의 탄광까지 복음의 영광으로 불타고 있다." 1904년 이 거대한 영적 각성의 지도자는, 머리카락은 탄진으로 뒤범벅이고 손톱 사이에는 새까만 때가 낀 웨일즈 출신의 한 젊은 광부였다. 그는 웅변가의 어떤 기술도 없었고, 박학도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으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이반 로버츠 청년은 복음 선포하기를 동경해 왔으며, 그는 자신을 변화시키시고 사용하여 주시기를 하늘 아버지께 날마다 부르짖었다. 로버츠가 25세가 되었을 때, 그가 방에서 큰 소리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한다고 집주인이 그를 내쫓았다. 지하 탄광 안에서 휴식시간에 동료들이 담배를 피운다든지 웃으며 지내는 동안, 그는 조용히 앉아서 성경을 읽었다. 1904년 어느날 로버츠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웨일즈에 부흥을 보내실 것이며, 10만명의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런 후 성령님은 로버츠에게 앞으로 올 부흥은 프레리 초원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영국에 퍼진 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에 퍼져갈 것을 보여주셨다. 이 비전에 불타서, 로버츠는 설교할 기회를 찾았지만, 전혀 없었다. 그는 그의 목사에게 설교를 시켜 달라고 간청했으나, 처음에는 당황한 목사가 이처럼 너무 열광적인 탄광 노동자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번 더 간청한 후에, 목사는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좋아, 이반, 다음 주 수요일 저녁예배에서 설교를 할 수 있네, 만일 누군가가 남아서 듣는다면 말이야."라고 말했다. 17명이 의아해하며 뒤에 남았다. 젊은 전도자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1) 당신은 생각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만 한다. 2) 당신은 생활 속에서 좋지 않은 습관은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 3)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각 순종해야 한다. 4) 당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대중에게 나아가야만 한다. 비록 로버츠의 설교는 미숙했지만, 목사와 17명의 교인들은 마음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다음날 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젊은 설교자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부흥의 불길은 순식간에 다른 교회에 퍼져갔다. 그후 30일 안에, 3만7천명이 강단 앞에 나와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그리고 5개월 안에, 10만명이 웨일즈 전역에서 울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모여들었고 결국 로버츠의 비전은 성취되었다. 양의 뿔이라고 불리는 신문은 다음과 같이 게제했다. "이반 로버츠는 무명의 청년이지만,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순종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사역에 인도된 것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번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이 그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마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었다." 또 감리교 기록지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웨일즈는 지금, 과거의 어떤 부흥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흥의 격렬한 아픔과 환희의 한가운데 있다. 이것은 이른바 ‘도덕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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