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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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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22 조회1,6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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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

 

종교개혁의 선구자  몰다우강의 정경이 아름다운 선율로 수놓아진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A VLAST)’은 체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얀 후스(Jan Hus)와 그의 사상을 따르는 후스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교회사를 세밀하게 검토하면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운동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요즈음 교회사 연구가들은 이런 교회개혁운동들을 ‘첫번째 과격한 종교개혁운동’이라고 부르고,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개혁운동은 13세기 발덴저와 15세기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운동이다. 이같은 개혁운동들은 교회사 가운데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얀 후스도 1415년 7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당한 체코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얀 후스는 1370년 남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의 길에 들어서서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던 동기는, 당시 농부의 아들들이 그랬듯이 안정된 생활기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수업 과정에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고 열정적인 진리의 탐구자요 신학자로 거듭났다.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얀 밀리치 크로메리즈와 마티아스 본 야노프가 후스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1330∼1384)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열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스는 1398년부터 프라하대학 철학부에서 강의했다. 1402년부터는 3000명가량이 모였던 프라하 베들레헴성당에서 설교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체코 선현들의 개혁 전통에 굳건히 선 민족 설교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라하에는 황제 카를4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 독일어로 교육하는 대학을 세워 독일어와 독일문화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모국어를 중심한 신학운동을 전개한 후스의 개혁운동은 체코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후스는 1409년 프라하대학 총장에 취임한다. 그는 체코어 라틴어로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설교만 해도 무려 3000편이 넘는다.

    그의 설교는 평민들로부터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청종했다. 그의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적 내용을 지닌 설교는 청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스의 비판이 중세교회의 치부였던 면죄부 판매에까지 이르자 교황,왕,귀족,교회지도자들 등 기득권층이 강력하게 후스를 견제했다. 후스는 프라하에서 모든 교회활동을 금지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후스는 부패한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남뵈멘지역으로 가 들판과 광장에서 민중을 향해 진리를 설교했다. 이 무렵 후스가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쓴 대작이  ‘교회론(De ecclesi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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