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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 도르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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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24 조회1,7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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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 도르프 백작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지도자 진젠 도르프 백작

 

 모라비안 교회의 특징은 다음으로 모라비안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를 들 수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제도(the West Indies)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에는 수리남(Sirinam)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에,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러한 선교는 독일 개신교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으로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처에서 사명을 완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 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만일 어떤 주어진 지역내에 적법하게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지역적인 견해(the territorial view)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때 이후로 심지어는 유럽 식민지의 권력자들의 외국 전초기지들도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곳이 되었다. 선교의 전진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구의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진젠도르프의 사후에도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이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고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친 영향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 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고 하였으며, 하세(Hasse) 주교는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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