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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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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30 조회2,0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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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토마스 

 

순교자 조 토마스

 

 조 토마스(?-1801)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조 토마스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1738-1830)의 아들인데 양근에 살았다. 조동섬은 순교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교회 초기에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람이다. 1785년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있은 후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이 교회에 생긴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용문산으로 피정을 간 적이 있는데 이 때 조동섬이 동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동섬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가 있던 조동섬을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성인이 찾아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하상은 공적으로 교회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조동섬을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학문 연구도 한 적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동섬은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동섬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다보니 박해의 초점은 아버지인 조동섬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조동섬은 일찍이 1800년 12월(음력)에 체포되었다. 조 토마스는 매일 두 차례 아버지에게 음식을 가져다 드리는 등 옥바라지를 열심히 하였다. 아버지가 서울로 이송되었을 때도 뒤따라가서 낮이고 밤이고 떠나지 않았다. 조동섬의 유배지는 처음에는 서울에서 150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조 토마스는 아버지의 유배지까지 따라가 수발을 하였다. 조동섬은 이미 나이가 많은데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중병에 걸려있었는데 조 토마스의 극진한 간호로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다. 이렇게 조 토마스는 신자가 되기 전부터 좋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효성이 지극하였던 것이다. 영세 후에는 이런 바탕 위에 덕행을 쌓았고 또한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후에 조동섬은 귀양지가 바뀌어 함경도 무산으로 가게 되었다. 양근 군수는 조동섬이 꼭 처형되기를 바랬으나 그렇게 되지 않자 조 토마스를 체포하려고 노력하였다. 원래 조 토마스는 양근 군수가 관할하는 지역을 떠나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양근 군수가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근 군수는 중앙정부의 대신들에게 간청하여 조 토마스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냈다. 그래서 1801년 8월 조 토마스는 양근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양근 관아로 끌려간 조 토마스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순교한 10월초까지 두 달간 거의 날마다 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복된 고문으로 육체가 허약해져 마침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조 토마스는 오래 전부터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 토마스는 하느님의 뜻이 자신이   체포되어 순교하는 것이라면, 자기가 잡혔을 때 형벌에 잘 견딜 수 있게 단련시키기 위하여 여러 해 전부터 스스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몹시 때리며 준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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