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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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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31 조회2,0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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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

 

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윤유일이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로 북경에 파견되었을 때, 윤유일은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조선 천주교회의 신자 수가 대략 4,000명 정도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던 것이 주문모 신부가 순교할 무렵 조선 천주교회 신자 수는 10,000여명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는데 명도회(明道會)가 그것이다. 명도회는 교리를 연구하여 가르치는 모임으로 남녀가 따로 조직되었다. 흔히 주문모 신부가 중국에 있던 유사한 조직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아마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영세 이후 우리 나라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해왔던 교리 연구와 전교활동을 좀더 체계화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든 명도회의 공식 모임은 월 1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명도회 말고도 또 다른 형태의 평신도 조직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남녀 회장을 두었는데 남자회장은 최창현(崔昌顯, 요한, 1754-1801)이었고, 여자회장은 강완숙이었다. 이렇게 평신도 활동을 체계화하였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는 비록 숨어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대로 사목활동에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은 계속되는 박해 중에도 나름대로 이어져 우리 교회가 박해를 이겨나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것 외에도 신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책을 저술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사목활동은 주로 밤에 하였고 낮에는 음식을 제대로 들지 않으면서까지 신자들을 위해 책을 짓는데 전념하였다. 그야말로 불철주야 신자들을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를 추궁받으면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래서 몇몇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에게 안전을 위하여 잠시 동안이라도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였다. 그들은 박해가 멎으면 다시 잠입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그래서 주신부는 할 수 없이 중국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주신부는 “착한 목자”로서 자신의 양떼와 끝까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가 자수하면 신자들의 고통도 끝이 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신부는 서울로 되돌아와 1801년 4월 28일에 의금부에 가서 자수하였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내면서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잃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구베아 주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렇게 헌신적으로 활동하다가 자수한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자수하면서 박해자들의 모든 격노를 온통 자신에게 쏟게 하여 신자들의 불행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주신부는 문초 중에 조선에 온 이유를 묻자 “내가 조선에 온 것은 한 가지 목적뿐이오. 즉 참된 종교를 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불쌍한 백성의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었소.”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취조를 받으면서 성직자로서의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여 신자들에게 불리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해자들은 1801년 5월 31일 그를 군법에 회부하여 군문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던 처벌)에 처해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결정하였다. 같은 날 오후 주문모 신부는 감옥에서 끌려나와 군대의 사형 집행 장소인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갔다. 그가 사형장에 도착하자 형리는 신부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주신부에게 죄목을 나열한 조서와 판결문을 읽게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침착하게 다 읽고 난 후 주위에 모여 있던 군중을 향해 힘차게 “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합장한 다음, 머리를 숙여 참수형을 받았다. 그 때 주문모 신부의 나이는 4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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