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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38 조회1,7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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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의 부인

 

 주기철 목사(1897~44년)는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해 부임한 지 2년이 채 안 돼 투옥됐다. 평양노회는 그를 감싸기는커녕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주 목사의 목사직을 파면하고 가족들을 엄동설한에 교회 사택에서 내쫓았으며 1940년 마침내 교회를 폐쇄했다. 주 목사의 부인 오정모(1903~47)는 시어머니와 전처소생 네 아들과 함께 거리로 내쫓겼다. 그것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자를 굴복시키기 위해 가족을 이용했다. 일본 경찰은 주기철의 아내와 노모, 당시 열 살이던 막내 아들 광조를 지하취조실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주기철의 손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고선 발길로 차고, 목검으로 내리쳤다. 그러면 주기철은 공중에서 그네처럼 흔들렸다. ‘그네뛰기 고문’이었다. 고문이 시작되자 노모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오정모는 엎드려 “주님”을 부르며 기도했다. 주기철이 기절하자 경찰은 오정모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주기철이 아내가 발길로 차이는 동안 엎드려 “주님”만을 불렀다. 부부는 감당키 어려운 고문을 기도로서 이겨냈다. 어린 광조의 눈엔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고문을 불러오곤 하는 어머니가 답답하고 야속하게 느껴지곤 했다. 결국 주기철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을 일년 앞둔 44년 4월 21일 밤 9시 옥중에서 순교했다. 많은 교회들이 신앙과 민족을 동시에 저버렸던 때에 주기철은 한국 교회의 자존심을 지킨 인물로 부활했다. 그러나 오정모를 기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당시 산정현교회 신자들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투옥된 주기철은 몰라도 교회가 폐쇄된 뒤에도 남편을 대신해 심방을 다니며 교인들을 규합하고 신앙을 지키도록 하면서 주기철이 최후까지 일제에 항거할 수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오정모의 활동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안도 강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여고를 졸업한 오정모가 주기철을 만난 것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몸이 아파 머물러 있던 부산의 초량교회에서였다. 오정모는 그곳에서 주기철 목사의 아내로 세 살 위인 안갑수(1900~33)와 언니 동생하며 지냈다. 그 뒤 마산의 여고 선생으로 가 문창교회를 다녔는데, 우연인지 기연인지 주기철 목사가 문창교회 담임으로 부임해 왔다. 안갑수는 얼마 뒤 종기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죽기 전 오정모를 불러 남편과 아들 4형제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주기철의 아이들은 당시 15, 12, 7살이었고 막내 광조는 갓 돌을 지난 때였다. 독신 여성으로서 교육가를 꿈꿨던 오정모는 결혼 3년만에 주기철이 투옥돼 가시밭길을 걸어야했다. 오정모는 먹을 것이 없었기에 하루 걸러 금식 기도를 했고, 한달에 3일은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금식기도를 했다. 그의 몸은 연약하기 그지없었음에도 그런 기도의 힘 때문이었는지 귀신 들려 미쳐 날뛰던 사람들도 그의 앞에선 순한 양이 되었다. 우상숭배에 동참하면서 변절했던 교단과 교회는 해방이 되자 반대로 주기철 우상화에 나섰다. 그러나 오정모는 철저했다.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주기철의 동상을 세우려 하자 “왜 주 목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하느냐”면서 호통을 쳐 물리쳤다. 오정모는 말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는데,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겪은 고통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며 마취를 거부했다. 그를 속여 마취한 뒤 수술한 이는 장기려 박사였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정모의 투병과정을 지켜본 장기려는 한 순간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얼굴에 빛을 가득 내뿜으며 선종하는 그에 대해 “성경 히브리서 11장에 추가될 만한 믿음의 영웅”으로 평가했다. 오정모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장교 두 명이 찾아와 김일성 장군이 보냈다며 상자 두 개를 내려놓았다. 상자 안엔 지폐가 가득했다. 논밭문서와 적산가옥 문서도 있었다. 오정모는 “주 목사께서는 후세에 이런 선물을 받으려고 순교한 게 아니기에 뜻은 받지만 물건은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이를 보고 입이 댓자나 나와 있던 광조를 앞에 앉힌 그는 시편 37장 25~26절을 펼쳐 읽게 했다. “착한 사람이 버림받거나 그 후손이 구걸하는 것을 나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보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선선히 꾸어주며 살고 그 자손은 축복을 받으리라.” 주광조(75) 장로는 “남하해 홀로 살아가면서 그 때 큰 돈을 받지 않은 어머니가 많이 원망스러웠지만, 그 시편이야말로 부모님께 누가 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한 ‘위대한 유산’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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