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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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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53 조회1,3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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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홀 (W. J. Hall, 1877-1942)

평양에서 의료 선교를 하던 제임스 홀은 과로가 겹쳐 심한 열병에 걸렸다. 병세가 심하여 서울에 있는 아내 로제타 홀에게 가기 위하여 대동강을 따라 40마일쯤을 내려가서 배를 탔다.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는 열병이 아니라 발진티프스였다. 1894년 11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소식을 듣고 로제타가 아들 셔우드를 안고 뛰어 갔을 때, 이미 홀은 혼자 서지 못할 정도로 위급하였다. 열은 화씨 105도를 오르고 있었으며 다음날 밤에는 용변을 가리지도 못하였다.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닥터 홀은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마지막 날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잠자기 위해서, 홀은 아내에게 두 손을 잡힌 채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로제타 홀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남편의 임종을 그린 대목이다.
  닥터 로제타 S. 홀 부인과 아들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1860-1894,한국명,忽,혹은 賀樂)은 카나다 출신 미감리회 의료선교사이며 목사다. 몬타리오주 글렌 뷰엘(Glen Buel)에서 장로교인이며 석공인 죠지 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으며 14세때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다. 1881년 아덴(Athen)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받아 2년간 교사로 일하였다. 1885년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뉴우요오크의 벨레뷰(Bellevue)병원 의과대학으로 옮겨 1889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하자마다 곧 미감리회에서 추천하는 뉴우요오크 빈민가 선교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이곳에서 셔우드(Rosetta Sherwood)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이들은 한국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1892년 6월27일 한국에서 결혼하였다.
  1891년 12월 내한한 홀은 다음해 3월 존스(G.H.Jones)와 함께 고양, 개성, 서홍, 평양, 의주까지 의료순회여행을 떠났다. 어느날 여인숙을 찾았지만 방이 얼마나 비좁았던지 누울때 닥터 홀은 발을 문밖으로 뻗어야 할 지경이었다. 고양에 도착하니 외국인 의사가 왔다고 환자들이 몰려왔다. 의사가 아닌 존스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와 동행하는 의사에게서 성자다운 정신세계를 발견한 것은 그때 였다. 병에 고통받는 시골사람들을 치료해 준다는 그 자체가 그에겐 대단한 기쁨이었다.”
  1893년 노블(W.A.Noble)과 함께 다시 평양지방을 순회하였고 이때 평양 서문통에 기생집을 구입하여 그곳을 병원과 선교센터로 삼았다. 1894년 1월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병원, 학교, 교회사업을 시작하였는데, 학교는 광성학교, 교회는 남산현교회의 전신이다. 기독교에 불만이 가득한 평안감사가 초기 신자인 김창식을 감옥에 집어 넣고 사형에 처하고자 하는 사건이 있었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창식이의 집 창을 두드리며 닥터 홀이 보낸 사람이니 문을 열어달라고 하여 문을 열자 포졸들이 들이닥쳐 잡아 갔다. 그는 매를 맞고 칼을 쓴채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홀은 서울의 스크랜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영국과 미공사관을 통하여 간신히 풀려나왔다. 김창식(金昌植 1857-1929)은 1901년 감리교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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