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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웰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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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55 조회1,5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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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웰 해리스

(Howell Harris, 1714 - 1773)

180px-Howell_harris.jpg교회사의 큰별 하웰 해리스는 1714년 1월 23일, 영국 웨일즈의 브레콘셔 지방 트리페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 부친을 읽고 해리스 자신이 표현한 대로 한때 '허영과 교만과 청춘이라는 유희의 물결'에 휩쓸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교육을 아주 조금 박에 받지 못했으나 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가 21세가 되던 해인 1735년 3월 30일 그는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해 탈가트에 있는 교구교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성찬에 참여하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질책하는 교구 목사의 광고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면 기도하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고 살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고, 살기에도 합당치 못하다면 죽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입니다" 그는 이 광고를 가슴에 끓어안고 고민하다 두 번째 성찬 예식에 참여할 때 회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성찬식 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내 눈앞에 서 계신 것 같았습니다. 능력이 내게 주어져서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짐을 벗었습니다. 나는 기뻐 뛰면서 집으로 가서 슬퍼하는 내 이웃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왜 슬퍼합니까? 내 죄가 용서받았음을 나는 압니다. 오 복된 날이여! 언제나 그것을 기억하고 더욱더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1735년 6월 18일 그는 랭가스티 교회의 종탑 안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다 엄청난 성령의 체험을 합니다. 그는 고향 웨일즈의 칠흑 같은 영적 암흑을 깨우라는 소명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평신도의 신분으로, 죽음이 그를 쉬게 할 때까지 불꽃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먼저 '견건의 실제'(The Practice of Piety)라는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책 읽는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회심하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1937년 랑게이토의 다니엘 로렌드를 만나고 1739년에는 카디프에서 조지 휫필드를 처음 만납니다. 그의 교제는 점점 확대되고 1743년 카필리에서 연합회가 열리는데 그때 회장이 휫필드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많은 핍박과 어려운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1750년 그는 다니엘 로랜드와 다른 지도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서로 다툼이 일어났고 분리되어 그는 트레베카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독일의 경건주의자 어거스트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가 할레에서 조직했던 공동체(일종의 고아원이자 종교 공동체)에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트레베카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시작합니다. 그는 10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종교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763년에 웨일즈의 메서디스트 공회로 돌아오게 되어 옛친구들과 동료들과 함께 일을 계속해 나갑니다. 1768년 헌팅돈 백작부인과 함께 다른 이들의 도움을 얻어 설교자들을 훈련시키는 대학을 건설합니다. 휫필드는 그 학교가 세워지는 개교 예배 때 설교했고, 1769년에 휫필드, 존 웨슬레, 로랜드와 다른 사람들이 설교했습니다. 해리스는 이일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다 결국 기진맥진하여 지치고 피곤해서 1773년 7월 21일에 죽었습니다. 이들의 연합 운동은 결국 웨일즈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교회를 만들게 되고 1811년 처음으로 그들의 교역자들을 안수했습니다.
그는 본문을 미리 정하지도, 원고를 준비하지도 않았지만 성령이 이끄는 설교를 사자의 포효처럼 토했고 그 설교는 지금까지 국교회의 판에 받은 건성의 설교에 무감각해졌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천국의 생기를 불어넣기에 족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영혼들을 회심시켰고, 회심한 자들을 신앙 모임으로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양육했습니다. 그의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운동은 웨슬리 형제의 그것보다 4년이나 빠른 것이었고, 그의 노천 설교는 조지 휫필드의 그것보다 역시 4년이나 빠른 것이었습니다. 훗날 교회사가들은 하웰 해리스가 웨슬리 형제와 휫필드의 선구적 모델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 사는 동안 런던에 39번 이상 방문했습니다. 그는 무어필드의 태버나클 교회에서 설교할 때 다른 누구보다도 조지 휫필드에게 더 자주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약 3년 동안 잉글랜드와 웨일즈 양지역에서 칼빈주의 메서디스트들의 수반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휫필드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의 칼빈주의적인 관점 때문에 존 웨슬레보다 휫필드에게 더 친근함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와도 막역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여러차례 그들의 연례 집회에 참석했고, 휫필드와 웨슬레 사이의 화목에 관심을 가져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 데 언제나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헌팅돈 백작부인의 대단한 친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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