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킷 > 믿음과 지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믿음과 지혜

토마스 베킷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2:56 조회1,592회 댓글0건

본문

중세 잉글랜드 교회의 순교자

111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토마스 베킷은 중세 잉글랜드 교회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로 성자이자 순교자이다. 런던 노르만 가문의 상류 계급에서 태어난 베킷은 키가 크고 미남이었으며 활기차고 지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법률교육을 받은 후 잠시동안 켄터베리 대주교의 수석집사로 재직하였으며, 이때 국왕 헨리 2세의 주목을 끌어 왕의 비서직에 임명된다. 그는 임무를 매우 유능하게 수행하였으며 왕의 신뢰받는 신하이자 친구가 되었다. 베킷은 1156년과 1158년에 있었던 프랑스와의 몇 차례 싸움에서 잉글랜드를 위해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등 탁월한 능력으로 왕실을 섬겼다. 그는 또한 프랑스 루이7세의 딸 마가렛과 헨리2세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밖에도 그는 순회법관, 잉글랜드의 조세 정책 감독, 외교 통신의 장관, 국왕이 베푸는 각종 시혜의 집행자 역할을 하였다. 국왕에 대한 감동적인 섬김을 통해 그는 국왕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리하여 토마스 베킷과 헨리2세는 진지한 국사뿐만 아니라 사냥과 주연 등에서도 같이 시간을 보낼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1162년 켄터베리의 대주교 데오볼드가 죽자 베킷은 헨리2세에 의해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헨리왕은 토마스가 교회의 사무는 물론 정부를 위해서도 계속해서 잘 섬기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베킷은 대주교직에 선출되자 지금까지 신하로서 헨리왕에게 보여주었던 충절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지내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던 생활방식을 버리고, 경건하고 엄하며 극기적인 삶을 사는 성자다운 인물이 되었다. 잉글랜드 전체 성직자의 대표자로서 베킷은 왕실 정책의 강력한 지지자로부터 교회 권리의 든든한 옹호자로 변화된 것이다. 그는 교회에 왕의 뜻을 강행하려는 정부의 온갖 시도에 일관성 있게 대항하였다. 특히 유죄 판결을 받은 성직자들의 처벌에 관한 문제를 놓고 왕과 대립하는 가운데 교회와 정부 사이의 큰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베킷과 영국왕 헨리2세 사이에 일어난 대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유럽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하나님과 세속 국왕 사이에 긴장 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이미 기독교의 본질 자체에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 교회는 자체의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많은 점에서 세속 정부의 법률과 모순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신자들은 근본적으로 인간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배웠다. 5세기 무렵 기독교는 이미 로마제국의 공식적 종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방의 로마제국교회들은 자연스럽게 황제의 통제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서방에서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어떤 경쟁관계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에 세속 통치자들과 베킷 같은 지도적 성직자들 사이의 투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교회와 성직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경우,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국가의 통치가 본질적으로 부정적이라고 믿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세속 권력은 악을 억제하고 범죄하는 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국가를 세울 필요성이 발생하였으므로, 세속 권력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권세와 사랑과 용서의 원천이 되는 교회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교회의 대변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황을 꼭대기에 두고 세속 통치자를 하위에 둔 계급 조직을 지상에 세우셨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왕권을 지지하는 자들도 나름대로의 주장을 폈다. 그들은 세속 권력이 보다 높은 지위를 가져야 할 이유에 대하여 다윗과 솔로몬 같은 구약시대 통치자들의 선례를 들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왕들이 신적 권리에 의해 통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로마서 13장의 진술을 포함해 사도 바울의 진술이 왕권의 위치를 지지하는 데 이용되었다. 왕권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두 본성, 곧 그리스도는 왕이자 제사장이었으나 왕으로서 그는 종교적 기능에 있어 제사장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중세기 서방교회는 교회와 왕권의 주도권 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끊임없이 교회와 왕권의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고 있을 때, 사실 잉글랜드는 별 문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는 오래전부터 교회와 정부 사이에 언제나 밀접한 관계가 존재했으며, 무엇보다 교회는 대체적으로 정부권력에 순종적이었다. 

1135년부터 1154년까지의 기간에 잉글랜드는 시민전쟁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교회는 상당한 독립을 획득하였다. 국왕 헨리2세의 대관식과 더불어 무정부 상태의 기간은 종막을 고하였으며 이 새로운 통치자는 자기 영토에 대해 왕권을 굳게 확립하기로 결심하였다. 헨리2세는 엄격한 성품과 화산 같은 정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격조 높은 교양과 매력적인 태도도 지니고 있었다. 헨리2세는 훗날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데, 계승과 혼인을 통해 그는 아일랜드로부터 피레네 산맥까지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관할함으로써 당시 그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보다도 더 부유하였으며 프랑스왕의 세력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그후 2세기 동안 영국의 군주들은 영국제도 외에도 프랑스의 영토 반을 통치하였다. 하여간 헨리2세는 재위 35년간에 영국에 있었던 것은 13년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있어 가장 위대한 국왕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헨리2세가 유명한 것은 그의 업적보다는 한 성직자의 살해 때문이다. 헨리2세는 친구였던 베킷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베킷은 잉글랜드 최고의 성직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대주교가 되자마자 베킷은 금욕주의자로 일변하여 여생을 기도와 종무에 바쳤다. 베킷은 그를 대주교로 임명한 왕을 처음부터 반대하였는데, 이는 선임되자 왕에게 “폐하께서는 곧 이 사람을 총애하시던 이상으로 증오하시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는 대주교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둘의 갈등은 죄지은 성직자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나타난다. 헨리는 종교재판소에서 재판받음으로써 엄한 벌을 피하는 성직자들의 재판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죄지은 성직자’의 신분을 박탈하고 세속재판소에 넘겨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킷은 이것을 세속왕권의 교회 권위에 대한 탄압 내지 침해라고 여기고 끝까지 반대한다. 그러나 헌법을 강화하려는 왕권 앞에 대주교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후에 헨리왕은 베킷을 날조된 죄목으로 왕실재판소에 소환하여 재산을 몰수하였다. 결국 베킷은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유배 생활을 가게 되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호소했으나 이 교황은 왕의 입장과 교회의 입장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주저하였다. 그러한 화해는 결국 불가능하였으며 베킷은 더욱 극단적으로 완강히 왕에게 저항하게 되었다.
  1170년에 헨리왕은 순조로운 계승을 위해 아들에게 왕관을 씌어 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할 켄터베리 대주교 베킷이 영국에 없었기 때문에 헨리는 요크의 대주교 로저와 기타 성직자들로 하여금 대관식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노한 베킷은 영국으로 되돌아가 국왕에 대한 배척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헨리왕은 타협안을 내놓았고 베킷은 주교직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귀국한 베킷은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국왕 편에 선 주교들을 차례차례 해임시켰다. 정교를 분리하려는 시도가 방해 받자 헨리 2세는 분노를 터뜨렸다. 왕이 홧김에 내뱉은 말이 화근이 되어 그의 충복이었던 4명의 기사가 1170년 12월 29일 캔터베리 대성당 안에서 베킷을 살해하였다. 베킷이 살해된 결과 즉각적으로 공공연한 분노가 쏟아지자 헨리는 어쩔 수 없이 교황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고해하였고, 살해 무대가 된 대성당에 참배하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베킷의 밑에 있던 수사들은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고 철야 기도를 올렸다. 베킷이 죽은 후 그가 살해 당한 제단 위에서 승천하는 환상의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보겠다며 몰려드는 통에 대성당은 갑자기 순례지로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성당을 찾는 순례자가 늘어났고, 순례자를 위한 숙박 시설뿐만 아니라 수도원까지 건립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최초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이다. 신학자 에라스무스는 베킷의 무덤이 보석 등으로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여행 메모에 ‘성 토마스 베킷은 틀림없이 자신의 무덤이 꽃으로 뒤덮이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썼다. 베킷의 무덤을 참배하는 순례자들로 캔터베리는 몇 세기 동안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오늘날 베킷의 무덤에는 간소한 묘비뿐이다. 교회의 옹호자인 베킷의 무덤은 1538년에 헨리 8세의 명령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과 신학자들, 창의력이 풍부한 저술가들은 토마스 베킷이 성자인가 반역자인가, 교활한 정치가인가 아니면 정신착란에 걸린 환상가인가를 논해 왔다. T.S.엘리엇의 묘사에 의하면, 베킷은 영적 교만 및 선한 일 등과 관련된 유혹들을 물리친 후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긴다. 토마스 베킷은 1173년 성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성자가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의 순교현장으로 사람들은 몰려오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