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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Francesco)의 영성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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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3:17 조회2,3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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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Francesco)의 영성 배경 

 

I. 성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 영성의 개요 및 생애

 

2. 프란치스꼬 성인이 받은 영향(영성 배경)

2.1 일반적 영향

2.2 중세 교회 안에서의 악습에 대한 거부

 

3. 성 프란치스꼬의 영성

4. 프란치스꼬 영성의 근본정신

5. 프란치스꼬 성인이 끼친 영향

6. 결론

 

2. 聖 프란시스코(Francesco d'Assisi) 영성의 배경 - 프란치스꼬 성인이 받은 영향

2.1 일반적 영향

 앞에서도 조금 언급했듯이 프란치스코에게 영향을 준 영성이나 성인들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써 당시의 사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았을 것으로 보여지는 교육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면, 프란치스꼬는 자기 집에서 멀지 않은 아씨시의 성 제오르지오 성당 교회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가 이 학교를 얼마나 다녔는지 혹은 그의 교사들이 얼마나 유능했는지 혹은 이 기간 동안 그가 얼마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전 생애와 글에서 비추어 볼 때 그가 자신을 일컬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식한 사람이거나 문맹자는 아니었다. 

 

그의 글들을 보면 프란치스꼬가 성서를 폭넓게 알고 있었고 다른 책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성서 구절들을 200회 이상 인용하거나 적어도 암시한다. 그는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을 인용하였다. 더욱이 프란치스꼬는 성베네딕도의 회칙이나 다른 자료도 사용하고 있다.[참조 : 프란치스꼬회한국관구, 같은 책, 24쪽]

 

이 외에도 그가 받은 교육은 그 당시 아씨시와 같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서정시인들이나 음유시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보충되었다. 음유시인들은 당시의 인기있는 재담꾼들이었으며, 일반 시민들이 굶주렸던 문화의 한 형태를 전수해 주었다. 또한 프란치스꼬는 상인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으로서 의류 제품을 거래했는데 자신의 상술은 물론 사업에 대한 애착심을 아들에게 불어넣어 주려 하였다. 

이처럼 프란치스꼬는 적어도 당시의 젊은이들과 같은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일단 그가 회개하고 아씨시와 이웃 지방의 젊은이들이 그의 생활양식을 따르기 시작한 후부터, 그는 오직 자신의 완덕을 성취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완덕으로 이끄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참조 :  프란치스꼬회한국관구, “아씨시 성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의 글”, 분도출판사, 1985, 22-23쪽]

 

2.2 중세 교회 안에서의 악습에 대한 거부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고자 했던 프란치스코의 이상은 어쩌면 성 베르나르도 이후부터 시작해서 그 당시 전 중세 영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 중심주의” Lazaro Iriarte.“작은 형제회의 역사”[참조 : 작은 형제회 한국 관구 수련소 편저. 128쪽] 의 영성적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받은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조던 오만’의 “가톨릭 전통과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이해해 보도록 하자.

 

성 프란치스꼬의 첫 전기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는 성 도미니꼬가 성 프란치스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란치스꼬 형제여, 나는 당신의 수도회가 우리 수도회와 하나가 되어 교회 안에서 단 하나의 생활방식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을 한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사실 두 탁발 수도회는 그 기원에 있어서, 특히 복음적 청빈의 실천 및 설교 사도직을 준수함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매우 많았다. 

 

이러한 유사성의 유력한 이유로는 도미니꼬와 프란치스꼬는 동시대인으로서 둘 다 교회 안의 악습을 바로잡고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그들의 선교와 청빈을 통하여 복음서의 표준으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했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교회에서 복음은 대개 어디서나 무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사제 및 수도자의 재물과 교회 고위 성직자의 세속 권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악습과 그로 인한 죄악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는데, 그것은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개심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일부 개혁자들이 힘에 의지했고 - 몽포르와 브레시아의 아놀드가 그랬듯이 - 다른 이들은 극단주의자가 되어 교회에 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참조 : 조던 오만. “가톨릭 전통과 그리스도교 영성”. 이홍조․이영희 역. 분도 출판사. 1991.197쪽]

 

한편, 프란치스꼬 성인은 마태오복음서의 10, 9~10의 청빈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썼으며, 1209년 혹은 1210년에 11명의 제자들을 이끌고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구두 승인을 받은 생활 규칙을 보면 가난, 겸손 및 교회의 권위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참조 : 조던 오먼, 같은 책. 198쪽] 

 

프란치스꼬 성인은 고통받는 형제인 나환자들을 통해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을 만났고, 그의 형제인 그리스도는 그가, 지상선이시고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인간에게 자신을 끊임없이 선물로 내어 주시는 사랑으로 스스로를 현시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삼위일체”는 이 지음받지 않은 사랑의 큰 신비이며 이 사랑은 창조하고 구속하고 희생한다. 따라서 프란치스꼬 성인의 기도는 거의 예외없이 당신 선하심으로 모든 이를 부요케 하시는 지존하신 분에 대한 찬미와 감사와 축복의 기도이었다. 

 

중요한 것 한가지는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노예가 되지않고 생명을 주는 영에 순응하면서, 주님의 영과 그 거룩한 활동을 충만히 간직한 채 순수한 정신과 깨끗한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프란치스꼬 성인의 태도는 자발성과 영의 자유로움으로 특징지워진다.[참조 : Lazaro Irlarte, 앞의 책, 127-128쪽]

 

이제 프란치스꼬 성인이 받은 영향에 대해 결론지어 요약해 보자. 

프란치스꼬 성인이 가난한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성사의 흐름에 잘 적응한 결과가 아니라, 복음이 무시되는 당시 교회의 상황에서 가난(청빈)을 통한 반향적 복음에로의 회귀를 열정적으로 실천에 옮긴 그의 이상이었기 때문이요, 

 

지난날의 방탕한 삶을 종료하고 진실로 회심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이 걸친 실오라기 하나까지도 완전히 버림과 비움을 통함이었다. 이러한 프란치스꼬 성인의 삶의 모습은 당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교회를 쇄신하고 육성하는 생명의 샘이었던 것이요, 그러기에 또 하나의 위대한 영성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간추린 성 프란치스코 영성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 

 

 어느 그리스도인치고 아니 어느 영성학파에게 있어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이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프란치스칸 영성의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은 수도생활의 역사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성소의 기초로서의 복음. 프란치스코 성인은 당시 기존 수도회들의 회칙을 받아들이기를 강력하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곤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복음적 성소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성인은 긴 회개여정 끝에 복음의 메시지들을 통해 자신의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은수자의 옷을 입고 은수자처럼 살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포르찌웅쿨라 성당에서 사도들의 파견Missio Apostolorum에 관한 설교(마태 10,7-13)를 들은 후, 그의 성소는 보다 구체화되고 확고하게 된다. 여기서 성인은 주님께서 그를 사도들처럼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고 파견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이다"라고 외쳤다(1첼라노 22; 대전기 3,1; 세 동료 25). 이 순간에 그가 즉시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고자 하는 첫 동료들이 생기자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복음서를 통해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첫 동료들과 함께 산니콜로 성당으로 가서 그 당시 만연했던 대중 신심인 소위 사도들의 제비뽑기Sortes Apostolorum를 통해 복음서를 세 번 펼쳐보았다. 이렇게 해서 뽑은 세 구절은 ①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마태오 19,21) ② 여행 중에 아무것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루카 9,3) ③ 나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오 16,24)였다.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주제였고, 이에 성 프란치스코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와 앞으로 우리를 따르게 될 이들의 회칙입니다"라고 하였다(대전기 3,3; 세 동료 29; AnP 11). 성인은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성소를 찾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주님 친히 가르쳐 주셨다"고 말한다(유언). 그래서 그는 당시 수도생활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한 반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출처: 권고 6장) 

 

어느 날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성 마리아 성당에 머물고 있을 때 레오 형제를 불러 말했다. '레오 형제, 기록해 놓으십시오.' 레오 형제가 대답하였다. '예, 준비되었습니다.' 프란치스꼬가 말했다.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기록해 놓으십시오. 어느 소식 전달자가 와서 파리 대학의 모든 교수들이 우리 수도회에 들어왔다고 전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참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으십시오. 마찬가지로, 알프스산 너머 모든 고위 성직자들과 대주교들과 주교들이 형제회에 들어오고 또 불란서의 왕과 영국의 왕이 형제회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해도, 그런 것들이 참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으십시오. 마찬가지로, 나의 형제들이 이교도들에게 가서 그들 모두를 신앙에로 개종시켰다고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병든 이들을 고쳐 주고 많은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큰 은총을 받았다고 전한다 해도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 안에는 참된 기쁨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페루지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밤이 깊어 이곳에 도착합니다. 때는 겨울이고 나는 진창에 빠져 추워 떨고 있습니다. 차갑고 시린 물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수도복 자락에 들러붙어 피가 나올 정도로 다리를 치면서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내가 진창에 빠지고 추위와 얼음에 떨며 문에 다가가서 오랫동안 문을 두드리고 부른 다음, 마침내 문지기 형제가 나와서 물어 보기를 '당신은 누구요?' 하자 '나는 프란치스꼬 형제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썩 물러가거라. 지금은 돌아다니는 시간이 아니니 너는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또 다시 애걸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썩 물러가거라.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놈아, 이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도 많고 훌륭한 사람들도 많으니,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또다시 문 앞에 서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늘 밤만이라도 저를 받아주십시오'라고 애걸합니다. 그러나 그는 '안돼, 십자가회 수도원에 가서 부탁해봐'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경우 만약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바로 여기에 참된 기쁨이 있고 또한 참된 덕행도 영혼의 이익도 여기에 있다고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출처: 영적 권고, 참되고 완전한 기쁨. 이 글에서 성인은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만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사실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사람이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매달릴 때 그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활양식.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으로 제시한다(2회칙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일반화되어 있었던 정주적定住的인 양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순회설교적인 생활양식을 기본 생활양식으로 삼게 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글 안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도가 말합니다"라는 표현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초대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33). 그리고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루가 9,24)라고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는 사람이 자기 장상의 손 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장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고 본인 자신이 알고, 또한 그 일 자체도 선이라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가 참된 순종이 됩니다(권고 3장)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중심주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대는 교황권이 지고의 위치에 있는 시기였고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황금기인 시대였다. 지상의 왕권은 교황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시대를 풍미한 그리스도론은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계시면서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 통치하시고, 영광 중에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따르게 될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결국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를 거듭 요청하게 된다. 

 

아무도 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십시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대의 육신을, 또한 당신 자신과 비슷하게 그대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창세 1,26 참조) 그분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마귀들과 더불어 그분을 못 박았으며, 그대는 지금도 악습惡習과 죄악罪惡을 즐기면서 그분을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1고린 13,2 참조) 모든 이상한 언어를(1고린 12,28) 해석할 수 있고, 천상의 일을 환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력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한 마리 마귀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천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지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행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2고린 12,5 참조)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권고 5장) 

 

This is a production of a oil painting by Bartolome Esteban Murillo. The image depicts Our Lord on the cross reaching out to St. Francis as if to allow him the privilege of sharing in His redemptive suffering. It is a beautiful way of explaining visually St. Francis' stigmata. 

 

회개생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었다. 성인은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씨시의 회개자들이라 불렀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 회개는 마음의 변화, 의식의 변화, 시각의 변화였다(유언 1-3 참조). 실제로 그와 초기의 동료들이 교황님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고 처음으로 받은 공식 소명은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들은 먼저 자신들이 회개하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삶으로 보이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할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루가 11,21)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권고 27장)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의 두 번째 측면은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이라는 것이다. 생활양식 자체가 복음서의 예수와 사도들의 삶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계층의 그리스도인에게 개방된 영성. 교회 안에서의 수도생활의 역사를 보면, 어떤 수도생활 양식은 성직자 중심이고 또 어떤 생활양식은 수도자 중심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직계에 속하든 평신도계에 속하든, 또 출신 신분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에게 개방하여 모두를 받아들였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계급과 신분의 지장없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여자들을 위한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으며(글라라회), 평신도들을 위해서도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다(재속 프란치스코회). 이리하여 그는 신분 계급 여하에 상관없이 모두가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실현에 옮겼다. 

 

교회 안에서의 영성. 프란치스칸의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생활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시초부터 자신의 성소가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를 교회가 가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초기 형제들이 선택한 생활양식을 교황 성하로부터 인준 받으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복음적 운동들은 성인처럼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사는 삶을 주창하였지만 때론 교회에 반기를 들며 교회 없는 삶의 구조를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을 범하기도 했다. 성인은 이러한 이단적인 오류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그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친히 사도들을 주추삼아 세운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확인되지 않는 삶이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주 형제들이 교회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최대한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명했으며, 입회의 조건에 있어서도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성사'에 대한 시험을 전제로 하기도 했다. 어떤 속화되고 불쌍한 사제를 만난다 해도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도 가르쳤다. 이렇게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과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요소였다. 그래서 그는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형제들은 거룩한 교회의 발아래 항상 매여 순종함으로, 가톨릭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가 굳게 서약한 가난과 겸손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합시다."(2회칙 12,4) 

 

하느님의 종들은 성직자를 존경할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관습을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는 성직자들에 대해 신앙심을 가지는 종은 복됩니다. 그리고 이분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비록 그분들이 죄인이라 해도 주님 자신만이 이들을 판단하는 것을 당신 자시에게 유보시키시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 즉 자기 자신들도 이를 영하고 자신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이 직분은 다른 어는 직분보다 더 큰 것인 만큼,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큰 것입니다(권고 26장) 

 

삶의 영성.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이끌어준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는 프란치스칸적인 방법은 어떤 사업이나 거창한 활동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무엇보다 삶으로써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요 회개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는 어떤 수도회들의 카리스마처럼 어떤 사업이나 고유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도 근본적으로 복음을 몸소 살아감으로써 그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생활 혹은 삶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이 생활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은.."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사업이나 활동보다는 형제적인 삶, 회개의 삶, 복음적인 생활이 기초가 된다. 사업이나 활동은 삶의 결과로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삶을 통해 스스로 복음화되고 또 복음화시키는 것이 작은 형제들의 제1차적인 과제였다. 

 

선교적 영성.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부름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열려있기 마련이다. 프란치스코 성인 역시 초기부터 이러한 선교적 열정에 북받쳐 수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났고 순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성지탈환의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 그는 동방으로 건너가 홀몸으로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으로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부이며 스승으로서의 선교적인 모범은 작은 형제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서 늘 살아 숨쉬고 있다. 그의 선교적 열정의 덕분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교와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 선교 프로젝트들이 활성화되고 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 성소는 그 본질이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The Home Of St. Francis, Assisi 

 

작음과 보편적 형제애의 영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 선택. 프란치스코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 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 형제들은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 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뺨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마태 5,39 참조)(권고 14장) 

 

일과 애긍.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 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1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 살아가게 된다.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이든 모든 이가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루가 6,27 참조).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보여 줄 것입니다(권고 9장) 

 

정의, 평화, 환경보호, 보편적 형제애. 나아가 성인이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동물과 식물, 세상 모든 것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보여 주었는데,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로서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평화의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권고 15장) 

 

  

참고서적.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작은 형제회 한국관구, 분도출판사), 기쁨에 찬 가난(성 프란치스코의 영적권고 묵상집, 프란치스코출판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J.요르겐센, 프란치스코), 보나벤뚜라에 의한 성프란치스꼬 대전기(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수도회 한국관구, 분도출판사) 등

 

 

 프란치스꼬의 영성은 한마디로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 

13세기 교회가 거대한 국가조직처럼 되고 신자들 역시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를 받아들였을 때,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교회를 다시 세우고 복음이 지니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성 프란치스꼬가 힘주어 말하는 복음의 주요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아버지이신 하느님

 

 프란치스꼬에게 하느님은 당신 법을 거스르는 인간의 죄를 계속 헤아리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복종해야 하는 엄한 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으로 친밀한 '어떤 분'이었고 그의 아들과 딸들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은총을 주시는 '아버지'셨다. 

 

2. 그리스도의 인간성 

 

 그리스도와 프란치스꼬 사이에는 깊은 애정관계가 있었다. 

프란치스꼬에게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을 맡으신 창조주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신 베들레헴의 그리스도였고, 영적으로 굶주린 인간을 위해 음식이 되어 자신을 내어 주셨던 최후만찬의 그리스도시며, 자기 자신의 비인간적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희생제물로서 죽으셨던 갈바리아의 그리스도셨다. 

 

3.보속, 회개

 

 우리가 그같은 '아버지'와 그 같은'형제'를 가졌음을 깨달으면 자신의 옛 생활을 슬퍼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하느님께 전적으로 회개의 응답을 할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꼬가 바로 그러했다. 그가 한 회개와 보속은 대단히 기쁜 일들이었다. 

 

4. 생활양식이 되는 복음 

 

 그러한 회개 뒤,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들을 다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자신을 그리스도의 삶과 동화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복음은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이겨내도록 해 주고 또 세상이 지닌 죄악을 이기도록 문을 열어 준다. 

 

5. 계속되는 육화 

 

 프란치스꼬에게 육화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과거의 사건만이 아니라 또한 현세에도 일어나고 있다. 복음적 생활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 가운데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도록 계속해서 하느님께 사명을 받는다. 

 

6.. 사도적 사명 

 

 프란치스꼬의 시대에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그리스도교회화 하였으나 그리스도 신자들은 냉담해졌다. 이슬람 세계는 문이 닫혔고 극동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라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셨던 선교사업은 거의 침체된 상태였다. 그런데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둘씩 짝을 지어 제자들을 보내는 새로운 수도회를 교회 안에 세워 이 수도회가 신앙에 관심없는 유럽을 다시 일깨우고, 이슬람과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세상 끝까지 선교 활동을 펴 나가게 했던 것이다. 

 

7. 형제애

 

 프란치스꼬는 유언에서 "그리고 얼마 뒤에 주께서 나에게 몇몇 형제들을 주셨습니다"하고 말했다. 

사회계급이 굳어 있고 이미 있던 수도회들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평수사 직분만 허용하였을 때 프란치스꼬는 적어도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참된 형제애가 아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가 수도회를 작은 형제들의 회라고 이름지었을 때, 형제애란 인간이 인간에게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에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이 도전하는 것임을 분명히 나타냈다. 

 

8.작음 

 

 프란치스꼬가 자신이 세운 수도회를 형제들의 수도회로 보았다면 그는 또한 그것을 특별히 '작은 형제들의'수도회로 보았다. 프란치스꼬에게 '작음'이란 권력과 특권과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으며 무방비 상태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들, 곧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바람이었다. 이것은 봉사하려는 바람이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나누며 서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 도와주려는 바람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려는 것을 이기려는 바람이고 인간의 가장 약한 경향을 이겨내려는 바람이다. 

 

9.청빈 

 

 프란치스꼬는 재산, 풍요, 물질에 깊이 빠지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다.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삶은 사람들에게 보다 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이는 자연잘서를 가장 나쁘게 이용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대단히 빠르게 개인을 비인간화로 이끈다. 인격이 재산보다 더 소중하고 사람들이 물건들보다 더 소중하다. 프란치스꼬의 가난은 확실히 그런 뜻을 지닌다. 

 

10. 인격주의

 

 그는 일부러 사람들을 군중으로 보지 않았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두 존경했음을 뜻한다. 교황에서 거지에 이르기까지, 술탄에서 강도에 이르기까지 그 눈동자를 들여다 본 사람은 누구나 프란치스꼬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개개인의 내적 삶에 관심을 가졌고 그 사람 전체를 가치 있게 여기고 진지하게 대하였다. 

 

11.기도 

 

 기도, 더욱이 관상기도는 프란치스꼬의 삶에서 너무나 중요해 한동안 그는 세상에 대한 사도직 사명을 포기하고 관상생활로 은퇴하려는 유혹을 심하게 받기도 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듯이 그의 임무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는 언제나 기도했으며 성인은 기도 그 자체로 여겨졌다. 

 

12.고통을 받아들임

 

 고통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들에게 고통은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도 피해야 하는 악이다. 그러나 프란치스꼬는 경외심으로 고통에 다가갔다. 그는 분명하게 다음의 메시지를 알아들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고 드높이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프란치스코는 고통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 고통의 남은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겠다"고 했듯이 고통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13.평화 

 

 프란치스꼬는 전쟁상태에 있는 귀족계급과 중산계급, 그리스도 신자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싸움에서 평화를 세운 자로서 인정받았다. 그는 스스로 평화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당신의 입술로 평화를 알리고 있는 동안에, 당신의 가슴속에 평화를 더욱 더 충분히 지니도록 힘쓰십시오, 어느 누구도 당신 때문에 분노나 모욕적인 말과 행동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당신이 스스로 억제하는 것을 보고 평화와 선의와 자비로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하고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한다. 

 

14.교회에 대한 존경

 

 프란치스꼬 시대의 교회는 정치 권력을 지님으로써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 많은 성직자들이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반성직주의가 퍼져 있었던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었고 교회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 현존의 표지가 거의 되지 못했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보다시피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나의 교회를 고쳐라"고 프란치스꼬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 "우리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직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파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들의 부족함을 우리들이 메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평화의 자녀들처럼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성직자도 사람들도 함께 얻을 것이고,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성직자의 타락에서 사람들만을 구하는 것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15. 마리아 신심 

 

 마리아 신심은 프란치스꼬 영성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프란치스꼬 자신도 이 마리아 신심을 생활화하였고 이것을 정신적 유산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했다. 하느님을 향한 프란치스꼬의 사랑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 그것도 영광과 엄위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육화하고 수난하신 인간 예수께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대한 깊은 사랑이 되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16. 피조물에 대한 사랑

 

 피조물에 대한 프란치스꼬의 사랑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밖으로 드러난 표시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탄 프란치스꼬는 동료들과 사람들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미물까지도 사랑하였다.

프란치스꼬에게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전하는 표징들이며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도구들이었다. 피조물에 대한 프란치스꼬의 영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태양의 노래'이다. 태양의 노래는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중요한 걸작 가운데 하나이며 매우 아름답고 낙천작인 노래로서 모든 피조믈을 향한 사랑의 찬가라 할 수 있다. 태양의 노래에서 프란치스꼬는 모든 피조물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우주 전체가 한 형제애 안에서 가족을 이루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이러한 깊은 사랑으로 교황 바오로 2세는 1979년 성 프란치스꼬를 생태학자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자연이 크게 위협당하고 있는 오늘날 성 프란치스꼬가 보여준 자연에 대한 태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하느님 의지하며 청빈의 삶 살아

 거상의 아들로 태어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주님의 음성 듣고 자선하며 가난의 길 걸어

 

 참으로 유명한 분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성인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가장 유명한 성인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개신교 신자들도 공경하는 성인이다.

 

유명한데는 이유가 있다. 감동이 그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St. Franciscus Assis, C. 축일 10. 4)의 삶과 신앙, 그리고 영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이제 그 감동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로마와 피렌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다. 아버지 베드로 벨라도네는 프랑스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거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전 세계를 다니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부자였으니 당연히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라틴어, 프랑스어도 배웠다. 

 

부잣집 도련님들이 대부분 그렇듯 프란치스코는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라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시작했다. 돈을 물같이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하거나 냉혹한 성격은 아니었다. 꽉 막힌 성격도 아니었다. 돈 많이 쓰고, 인심 좋은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자연히 프란치스코 주위에는 놀기 좋아하는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세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내심 흡족해 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온다. 영웅심 가득했던 프란치스코는 기사가 될 꿈을 안고 한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갑부다. 아버지는 엄청난 보석금을 내고 아들을 고향으로 다시 데리고 왔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의 삶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한동안 큰 병을 앓았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올바로 사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됐고, 자주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선을 하면서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다 쓰러져 가는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성 다미아노 성당이었다. 그때 갑자기 십자가상 그리스도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이는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말씀이었지만 당시 프란치스코는 ‘그 집’을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는 성 다미아노 성당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성당은 당장 수리가 필요했다.

 

프란치스코는 즉시 성당 수리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집에서 귀중한 물건을 빼내와 판 뒤 그 돈을 성당 사제에게 내놓으며 수리비로 써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신부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프란치스코는 돈을 성당 창문 안으로 던져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당시 여행 때문에 집을 비운 상태였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크게 분노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바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쯤 되자 아버지의 화가 극에 달한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를 좁은 구석방에 가두고, 자신이 직접 성 다미아노 성당에 가서 돈을 되찾아 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재산을 모두 성당에 기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주교 앞으로 끌고가 아들이 더 이상 미친짓을 하지 않도록 충고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생긴다. 훌훌 벗어 던졌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옷까지 벗어 아버지에게 주었다.

 

완벽한 가난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는 이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는 진정한 청빈의 삶을 살았다. 아무것도 갖기를 원치 않았다. 의복도 항상 해어진 남루한 것만을 원했다.

 

특히 1209년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 참례 당시 성서에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고 식량 자루도, 여벌옷이나 신도, 그리고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시오. 일하는 사람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마태10, 9-10)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는 더욱 더 청빈의 삶에 정진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청빈·보속의 삶 살아

 교회에 순명하며 깊은 신앙으로 신자들 이끌어

 갈수록 많은 수도자들 동참… 수도원 날로 성장

 

 신선한 충격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청빈 선언은 새로운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교회와 민중들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새로운 모범을 보였다. 그러자 세 명이 프란치스코의 삶에 동참하겠다며 찾아왔다. 

 

그 세 명 제자는 퀀타바레의 벨라노라는 상인, 순박한 성격의 에지디오, 법학자 카타니의 베드로 등이다. 이후 제자의 수가 차츰 늘어 열 둘에 이르게 됐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해서, 교회를 벗어나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다. 철저히 교회에 순명했다. 교회 전통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섭리에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몰려들면서 수도원 설립의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서 수도회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청원했다.

 

교회는 신중했다. 특히 너무나도 엄격한 청빈 생활 때문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의 요청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과연 하느님에 의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 교황은 꿈을 꾼다. 꿈에서 프란치스코는 쓰러져가는 교회를 떠받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교황은 즉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온 회칙을 인준, 수도회를 강복하고, 일반 신자들에게 강론할 사명도 그들에게 맡겼다.

 

이제 프란치스코가 꿈꾸던 공동생활의 기틀이 마련됐다. 베네딕토회로 부터 받은 아시시 근처에 있는 포르찌웅콜라라 불리는 소성당과 그에 부속된 약간의 토지도 얻었다. 프란치스코가‘작은 형제회’라고 명명한 새로운 수도원이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

 

영적인 힘이 있는 수도회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장하는 법이다. 수많은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뜻에 동참했고, 그에따라 분원도 계속해서 늘었다. 사람이 많아지면 잡음이 일어날 법 한데, 작은 형제회 회원들은 어디에서나 청빈하고 거룩한 생활 태도로 많은 이의 공경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여성들에게도 파급된다. 클라라라는 명문가 출신인 한 처녀가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깊이 감동받고, 청빈과 보속의 생활을 하겠다며 찾아왔다. 모두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보수공사를 마친 성 다미아노 성당 곁에 한 채의 집을 클라라에게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성들도 프란치스코의 삶을 따르겠다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녀의 동생 아녜스도 언니의 뒤를 따랐다. 사람이 늘어나면서 여자 수도회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고, 클라라가 초대 수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수도자들처럼 모든 욕망을 끊고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는 사람 이 외에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위해 제 3회를 창립했다. 이들 중에는 귀족, 서민, 농민 등 빈부귀천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프란치스코는 자주 병을 앓았다. 수많은 설교와 자청한 고난 등이 문제였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이 하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라 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수난과 절대 고독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러한 엄격한 고행으로 인해 그의 몸은 나이 보다 더 빨리 쇠약해져 갔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큰 고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1224년 어느 날, 그가 산에 올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 친히 양손, 양발 옆구리에다 오상을 박아 주었다. 큰 은혜임은 틀림없었으나, 인간적 차원에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참으로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기적을 끝까지 숨기려 노력했다.

 

1226년 9월에 이르러 프란치스코는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훗날 교회로부터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 그는 사람들에게 “나를 맨바닥에 눕혀라”고 했다.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가운데서 세상을 떠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경 중 예수 수난에 대한 구절이 낭독됐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시편 142편을 읽었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간청하네. 그분 앞에 내 근심을 쏟아붓고 내 곤경을 그분 앞에 알리네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며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성자의 나이는 44세였다.

 

그리스도와 가까운 삶 살기 위해 노력

 주님 형성하신 가치 깨닫고 전환점 맞아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하느님께 순명

 

 성 프란치스코는 1182년에 태어나 1226년에 선종했다. 칭기즈칸이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그 시기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44년을 살았다. 짧은 삶이다. 청년이 될 때까지는 하느님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가 하느님과 일치해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프란치스코가 진정한 신앙의 모델로 변모 될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프란치스코는 방탕한 삶을 살았다. 풍요로움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지만 때로는 삶의 독이 되기도 한다. 그는 부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물질적으로도 풍족하게 지냈다. 불편을 몰랐던 성장기다. 돈도 쓰고 싶은대로 맘껏 썼다.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진정한 높은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이 마련하신 방법으로 형성되도록 창조하셨는데, 풍족하면 이러한 하느님의 형성의 섭리를 실현시키기 힘들다. 그렇게 프린치스코는 20세가 될 때까지 반형성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삶의 전환기가 오게 된다. 이제 드디어 형성적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전쟁터에 가서 포로가 됐다가 어렵게 풀려났고, 나중에는 큰 병도 얻었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섭리는 이렇게 오묘하다. 공부도 많이 시켜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었고, 감옥에서도 빼내어 주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때까지 하느님의 형성시키는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큰 병을 통해 조금씩 신비스러운 어떤 힘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병을 앓는 것도 어떤 때는 큰 은총이다. 고통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특별히 그렇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미리 형성시켜 놓으신 그 형성을 하나 둘 재형성하고 초형성하는 노력을 통해 완성해 나가게 된다.

 

하느님을 느끼면 사람은 변화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방법과는 조금 다르게 돈을 쓰기 시작한다. 예전처럼 흥청망청 쓰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 그리고 성당을 보수하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돈이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심지어 다락방에 가두기도 했다. 이때 프란치스코가 보인 반응이 놀랍다. 은총이 아니라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 은총도 보통 은총이 아니다. 옷을 다 벗는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내놓고 “아버님 가져가세요”한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이제부터 프란치스코는 온전히 하느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된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움을 퍼트리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수도회가 설립됐다. 훗날에는 병중에서도 오상을 받고 그리스도와 아주 가까운 삶을 살았다. 진정 그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상으로서의 삶이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음의 보화는 우선 ‘단순함 의성향이다. 우리는 참으로 복잡하게 산다. 욕심 때문이다.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 사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물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이 가난하면 영적으로 충만해진다. 내가 세상의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내 것이 된다. 하나를 버려서 세상 모든 것을 얻는다.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보화는 ‘순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순명이라고 하면, 부모님에 대한 순명, 수도회 장상에 대한 순명 등을 떠올린다. 물론 이런 순명도 순명이다. 하지만 낮은 단계의 순명이다. 진정한 순명은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순명은 무조건 윗사람에게 “예”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물론 자녀보다는 부모의 뜻이 90% 정도 옳을 수 있다. 수도회 장상의 뜻이 90% 더 옳을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얼마든지 다른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순명으로 보이는 것까지 포괄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높은 단계의 순명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완벽한 순명의 삶을 살았다. 하느님께 순명한다는 것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참으로 높은 경지의 순명을 본다. 그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에게는 불순명했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는 온전히 순명했다.

 

지상에서 천상의 삶 사신 위대한 성인

 주님 당하신 고통 겪으며 완벽한 일치 추구

 순명과 기도로 부·권력에 빠진 교회 일으켜

 

 매 순간 순간이 중요하다. 밥 한끼 먹을 때도 중요하고, 잠잘 때도 중요하고, 공부할 때도 중요하다. 살아서 숨 쉬는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인생 공부를 제대로 매 순간마다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마련해 놓으신 형성적 원리를 성취해 낼 수 없다.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그 모범을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 본다. 그 중 하나가 순명이다. 프란치스코는 늘 매 순간의 삶을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았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 하느님께서 은총을 통해 보여주신 것,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위해 절대 순명하며 살았다. 이러한 순명의 삶이야말로 프란치스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덕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또 다른 모범을 꼽으라면 기도 생활을 들 수 있다. 사실 청년기의 프란치스코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방탕하게 살았고, 세속적 행복에만 매달려 살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기도하는 사람으로 돌변한다.

 

첫 번째 계기는 중병을 앓았을 때였다. 사람은 아프고 고통 받으면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하느님께 매달린다. 어쩔 수 없이 매달린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한다. 프란치스코도 그랬다. 병으로 고통을 받으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기도생활은 이처럼 시작이 중요하다. 일단 시작해야 하느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기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러나 단순히 ‘시작’의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때도 계기가 있었다.

 

기도생활을 시작하고 또 열심히 기도를 하다보면 내적이든 외적이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차원 높은 관상으로 가는 체험들이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관상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제는 철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다.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이 음성이 프란치스코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앞에서 이미 보았다.

 

프란치스코의 기도생활의 경지는 점점 더 깊어만 갔다. 27세의 청년이 마태오 복음을 묵상한다. 예수님이 12사도를 파견하는 대목이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마태 10,8-9)

 

이 말씀은 평생동안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라다녔다. 게다가 성경을 단순히 읽고 감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완벽하게 삶으로 실천해 낸다.

 

성경 말씀에 대한 관상에서 더 넘어가자 하느님은 이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오상의 은총을 베푸신다. 오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생긴 두 손과 두 발의 상처와,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요한 19,34)를 말한다. 프란치스코에게도 똑같은 상처가 생겼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똑같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이는 성인이 예수님과 완벽하게 일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완벽한 기도는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일치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치는 선종하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을 앞두고 “땅에 뉘어 달라”고 했다. 땅의 품에, 자연의 품에 안기겠다는 참으로 낮은 모습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세계 형성의 관점에서는 예수님 다음 가는 존재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부와 권력의 유혹에 빠져 들어가고 있던 교회를 청빈과 단숨함, 순명, 기도의 완성을 통해 다시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교회의 초월적 변화를 이끌었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위대한 성인의 삶을 짧은 지면에 옮긴다는 것 자체가 송구스럽다. 그만큼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위대하다. 그는 지상에서 살았지만, 가장 완벽하게 천상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분이다. 이 짧은 내용이나마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의 영혼에게라도 자극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글

 

 제 1 부 영적인 권고 

 

 영적인 권고 1-28

 

 1. 그리스도의 몸

 

  1) 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질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 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3)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 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 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6-9). 

 

   5)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1디모 6,16),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18). 6)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 은 "생명을 주기에"(요한6,63)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7)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 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8) 이 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 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 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 람들도 단죄받습니다. 10)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14,22.24). 11) 또한 말씀하십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12)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13)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주님을 받아 모 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11,29). 

 

   14) 그러니 "한다한 사람들이여,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시편 4,3). 15)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요한 9,35).. 16)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 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17)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18)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19)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 (肉)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 십니다. 20)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21)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 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22)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테 28,20)하고 당신 자신이 말씀하시는 대 로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 

 

 

2.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악(惡) 

 

   1) 주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 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창세 2,16.17). 

 

   2)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3) 그런데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善) 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 4) 결국 아담은 악마의 꾐 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먹은 것이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5) 그래서 벌받아야 마땅합니다. 

 

 

3. 완전한 순종 

 

  1) 주님이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까 14,33). 2) 그리고 :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루가 9,24)라고 하십니다. 3)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는 사람이 자기 장상의 손안에서 순종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4) 그리고 장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고 본인 자신이 알고, 또한 그 일 자체도 선이라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가 참된 순종이 됩니다. 

 

   5) 그리고 아랫사람의 눈에 장상이 명하는 것보다 자기 영혼에게 더 좋고 더 유익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때라도, 자진해서 자기의 것을 하느님께 희생할 것이며 장상의 뜻을 실천에 옮기도록 힘쓸 것입니다. 6) 사 실 이것이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케 하는 것이기에 이 순종이야말로 사랑의 순종입니다(참조 : 1베드로 1,22). 

 

   7) 그런데 장상이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아랫사람에게 명한다면 순종하지 말아야 되지만, 장상 의 곁을 떠나지 말 것입니다. 8) 만일 이 때문에 어떤 형제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그들 을 더욱 더 사랑하도록 할 것입니다. 9) 실상 자기 형제들과 헤어지기보다는 핍박을 감수하기를 택하는 형 제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에(참조: 요한15,13)완전한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10) 장상이 명하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수도자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들은 "뒤를 돌아 다보며"(루가9,62) "개가 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잠언 26,11;2베드2,2) 포기한 자기 의지에 되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1) 이들은 살인자들이며 또한 자기들의 나쁜 표양으로 많은 영혼들을 잃게 합니다. 

 

 

4. 아무도 장상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 

 

   1)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테 20,28)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2) 형제들에게 대하여 권한을 가지고 있는 형제는, 그 장상직에 대해 명예스럽게 생각하려거든 마치 형제 들의 발을 씻어 주는 직책을 위임받은 데 대해 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3) 그리고 발 을 씻어 주는 직책이 면직되는 데 대해 흥분하는 이상으로 장상직이 면직될 때 흥분한다면 자기 영혼의 파 멸을 향해 유다처럼 자기 돈주머니를 챙기는 것이 됩니다(참조: 요한12,6). 

 

 

 5. 아무도 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1)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대로 그대의 육신을, 또한 당신 자신과 비슷 하게 그대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참조: 창세1,26), 그분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 해 보십시오. 2) 그런데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 3) 그리고 마귀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가 마귀들 과 더불어 그분을 못박았으며, 그대는 지금도 악습과 죄악을 즐기면서 그분을 못박고 있습니다. 4)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5)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참조:1고린13,2) 모든 이상한 언어를(참조:1고린12,28)해석할 수 있고, 천상 일을 환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6)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가장 놓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력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한 마 리 마귀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천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지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7)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행한 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 대는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8)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참조:2고린 12,5)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6. 주님을 본받음 

 

  1)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2)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 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3)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7. 지식에 선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1) 사도가 말합니다 :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고린 3,6). 

 

   2)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줄 많은 재물을 획득하려고 다만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3) 그래서 하느님의 문자(성서)의 정신을 따르기 원치 않고 말마디만을 배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 를 열망하는 수도자들은 문자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4) 그래서 알고 있는 문자나 알고 싶어하는 문자를 모두 자기 육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그것들을 말과 표양으로 돌려드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문자의 정신 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8. 질투의 죄를 피할 것입니다 

 

  1) 사도가 말합니다 :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 다"(1고린 12,3). 2) 또한 :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로마 3,12). 

 

   3)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질투하면, 모든 선을 말 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기에(참조: 마테20,15)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9. 사 랑 

 

  1)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저 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참조: 마테 5,44; 루까6,27). 

 

   2)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3) 오히 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4) 그리고 행동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보여 줄 것입니다. 

 

 

10. 육신의 제어 

 

  1) 죄를 지을 때나 해(害)를 입을 때 원수나 남을 자주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3) 그래서 자기의 지배하에 내맡겨진 그 원수를 항상 손아귀에 집어넣고 그에게서 지혜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4) 이렇게 행하는 한,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어떤 원수도 그를 해칠 수 없 기 때문입니다. 

 

 

11. 다른 사람의 악행을 보고 분개하지 말 것입니다 

 

  1)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 어떤 일도 못마땅해해서는 안됩니다. 

 

   2) 그리고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 나 분개하면 그 죄를(판단할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참조: 로마2,5). 

 

   3) 어떤 일 때문에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은 진정코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4)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마테22,21) 돌리면서 자기에게 는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12. 누가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가 

 

  1) 하느님의 종이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를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 2) 주님이 그를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신은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3) 인간의 육신은 항상 모든 선 을 거스르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천한 자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작은 자로 평가하 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3. 인 내 

 

  1) "평화의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테5,9). 하느님의 종은 일이 뜻대로 잘 될 때에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지를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2) 그러나 자 기의 뜻을 받들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할 때 그가 보여 주는 그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4. 마음의 가난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테 5,3). 

 

   2) 여러 가지의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3)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 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뺨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참조 : 마테 5,39). 

 

 

 15. 평 화 

 

  1) "평화의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테, 5,9). 

 

   2)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 

 

 

16. 마음의 깨끗함 

 

  1)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테 5,8). 

 

   2)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사물들을 멸시하고 천상 사물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영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17. 하느님의 겸손한 종 

 

  1) 주님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선보다 자기를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선을 더 많이 자랑하지 않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2) 주 하느님께 자기의 것을 바쳐 드리기를 원하기보다 자기 이웃에게서 받기를 더 원하는 인간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18. 이웃에 대한 동정심 

 

  1) 이웃의 연약함을 보고 자기가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을 때 그 이웃이 부축해 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 이웃을 부축해 주는 사람은 복됩니다(참조: 갈라6,2; 마테7,12). 

 

   2) 모든 좋은 것을 주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종은 복됩니다. 실상 어떤 것이라도 자신을 위해 남겨 두는 사람은 "자기 주 하느님의 돈을 자기 안에 묻어 두는"(마테 25,18) 사람이 되며,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 저 빼앗길 것입니다"(루까 8,18). 

 

 

 19. 하느님의 겸손한 종 

 

  1) 천박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사람들로부터 간주될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 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2)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3) 다른 사람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자진하여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4)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발아래 있기를 늘 열망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20. 좋은 수도자와 헛된 수도자 

 

  1)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 업적 외에 다른 데서는 흐뭇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2) 또한 그것 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에로 인도하는 수도자는 복됩니다. 

 

   3) 쓸데없고 헛된 말을 즐겨 하면서, 또한 그것으로 사람들을 웃기려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21. 텅비고 수다스런 수도자 

 

  1) 어떤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이야기할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또한 함부로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으면서(잠언 29,20), 오히려 말해야 할 것과 대답해야 할 것을 지혜롭게 미리 생각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2)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기보다는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말로 보여 주려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3) 이런 자는 "받을 상을 다 받았고"(마테 6,2.16)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별로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22. 꾸지람 앞에서의 겸손 

 

  1)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충고와 책망과 꾸지람을 마치 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러한 인내심 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은 복됩니다. 

 

   2) 책망을 들을 때 자기 잘못을 쾌히 인정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고백하고 또한 기꺼이 보속 하는 종은 복됩니다. 

 

3)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되이 참아 견디는 종 은 복됩니다. 

 

23. 겸 손 

 

  1) 아랫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윗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똑같이 겸손한 자로 드러나는 종은 복됩니다. 

 

   2) 언제나 충고의 채찍 밑에 머무르는 종은 복됩니다. 

 

   3) 자기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내적으로 통회하고 또한 외적으로 고백하며 행동으로 속죄하면서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데 지체하지 않는 사람은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입니다. 

 

24. 참된 사랑 

 

  형제가 앓고 있어 보답해 줄 수 없을 때나 건강하여 보답해 줄 수 있을 때나 똑같이 그 형제를 사랑하는 종은 복됩니다. 

 

25. 참된 사랑에 대한 부언(附言)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똑같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형제 앞에서 사랑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뒤에서 말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26. 하느님의 종들은 성직자들을 존경할 것입니다 

 

  1) 로마교회의 관습을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는 성직자들에 대해 신앙심을 가지는 종은 복됩니다. 

 

   2) 그리고 이분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비록 그 분들이 죄인들이라 해도 주님 자신만이 이 들을 판단하는 것을 당신 자신에게 유보시키시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 즉 자기 자신들도 이를 영하고 자신들 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이 직분은 다른 어느 직분보다 더 큰 것인 만큼, 4)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큰 것입니다. 

 

27. 악습을 몰아내는 덕행 

 

  1)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2)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3)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4)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5)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루까 11,21)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6)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28. 은총의 선물을 잃지 않도록 감출 것입니다 

 

  1)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마테 6,20), 또한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2)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당신이 원하 시는 대로 당신의 업적들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비밀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는"(루까 2,19. 3,51) 종은 복됩니다. 

 

 

참되고 완전한 기쁨 

 

1) 어느 날 복되신 프란치스꼬가 성 마리아 성당에 머물고 있을 때 레오 형제를 불러 말했다 : "레오 형제, 기록해 놓으십시오." 

2) 레오 형제가 대답하였다 : "예, 준비되었습니다." 

3) 프란치스꼬가 말했다 :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기록해 놓으십시오. 

4) 어느 소식 전달자가 와서 빠리 대학의 모든 교수들이 우리 수도회에 들어왔다고 전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참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으십시오. 

5) 마찬가지로, 알프스산 너머 모든 고위 성직자들과 대주교들과 주교들이 형제회에 들어오고, 또 불란서의 왕과 영국의 왕이 형제회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해도, 그런 것들이 참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으십시오. 

6) 마찬가지로, 나의 형제들이 이교도들에게 가서 그들 모두를 신앙에로 개종시켰다고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병든 이들을 고쳐 주고 많은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큰 은총을 받았다고 전한다 해도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 : 이러한 모든 것들 안에는 참된 기쁨이 있지 않습니다. 

7) 그러면 참된 기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8) 나는 페루지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밤이 깊어 이곳에 도착합니다. 때는 겨울이고 나는 진창에 빠져 추워 떨고 있습니다. 차갑고 시려운 물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수도복 자락에 들러붙어 피가 나올 정도로 다리를 치면서 상처를 냅니다. 

9) 그리고 내가 진창에 빠지고 추위와 얼음에 떨며 문에 다가가서 오랫동안 문을 두드리고 부른 다음, 마침내 문지기 형제가 나와서 물어 보기를 : '당신은 누구요?' 하자, 나는 '프란치스꼬 형제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10) 그는 '썩 물러가거라. 지금은 돌아다니는 시간이 아니니, 너는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11) 그러나 내가 또 다시 애걸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 '썩 물러가거라.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놈아, 이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도 많고 훌륭한 사람들도 많으니, 너같은 놈은 필요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12) 나는 또다시 문 앞에 서서 :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늘밤만이라도 저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애걸합니다. 

13) 그러나 그는 : '안돼, 십자가회 수도원에 가서 부탁해 봐'라고 대답합니다. 

14) 이러한 경우 만약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바로 여기에 참된 기쁨이 있고 또한 참된 덕행도 영혼의 이익도 여기에 있다고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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