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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니에 예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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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03 23:22 조회1,8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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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선물, 예수 JESUS, the Gift of Love / 

장 바니에 Jean Vanier

 

머리말

   나는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이 책을 쓴다. 1950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고, 나는 해군을 떠났다. 그 뒤로, 그분과 함께 걷고자 노력하면서 우주의 비밀을,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비밀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그분이 살고 사랑하고 말씀하셨듯이  그렇게 살고 사랑하고 말하려고, 그분이 당신을 에워싼 악의 세력과 싸우셨듯이 그렇게 내 속에 있고 내 주변에 있는 악의 세력과 싸우려고, 나름대로 ―물론 자주 실패했지만― 노력하였다. 예수의 간절한 바람[希望]은 사람들을 그들의 가난과 상처와 함께, 그들의 가면과 방어기제를 또한 그 아름다움과 함께,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데 있다. 그분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도 저마다,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사람인 까닭에   능히 이룰 수 있고 황홀한 삶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를 에고이즘에 묶어놓고 내면의 자유와 성숙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안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에너지를 해방시켜 우리로 하여금 자비로운 남자와 여자가 되게 하고, 당신을 닮은 평화일꾼이 되게 하여 이 부서진 세상의 아픔과 갈등을 간과하는 대신, 오히려 그 안에 자리 잡고 사랑이 숨쉬는 공동체를 이루어 세상에 희망을 불러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세상의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 그분과 그분의 교회를 의심하는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랑과 치유능력을 보여주고자 이 책을 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예수의 추종자로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기쁨을 맛보기도 했고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힘든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속물근성과 이중성에 낙심하였고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남에게 거절당하고 명예가 더럽혀지고 죄인으로 비난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의 깊은 수렁에 스스로 빠져들었고, 내 가슴의 상처입기 쉬운 나약함과 허무와 분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나는 여러 방어기제와 분노와 그 밖의 도피방법으로 상처입기 쉬운 자신의 나약함을 감싸주려 하였다. 예수의 크신 선(善, Goodness)을 드러내려고 나는 이 책을 쓴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엄격하거나 가혹하지 않고 남을 지배하거나 남에게 당신 뜻을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거나 그들을 심판하려고 거기 계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사명감이다. 그분은 강하시고, 그분 안에는 진리의 빛과 깊은 겸손과 어린아이의 천진한 사랑과  세상에 생명을 주려는 소명과 기다림이 있다. 

 

   온유한 연인이자 치유자인 예수께서는 충만한 생명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각자에게 빛을 비추고자 교만, 두려움, 봉쇄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세상 안팎의 어둠을 조용히 파고드신다.

 

   이 책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이 기록한 네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 이야기다. 이 책이 독자들을 예수의 말씀과 행동으로 인도하기를 희망한다. 복음서는 위의 네 기자들에게 영감을 준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들은 직접 목격한 것들을 기록하거나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록하였다. 사건들이 있고 나서 얼마쯤 세월이 흐른 뒤에 그들은 이 책을 썼다. 덕분에 우리가 예수의 언행을 좇아 그분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구전(口傳)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들을 글로 남기는 것이 중요했다. 복음서 기자들은 저마다 글을 쓴 목적과 대상으로 삼은 독자들이 달라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실들을 배열하고 해석하고 편집하였다.

 

   겉으로 표출된 예수의 공생애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생활도 함께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건들을 위주로 네 복음서를 하나로 통합하여 예수 이야기에 대한 묵상 자료로 삼았다. 네 복음서가 저마다 특별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독특한 관점으로 사건들을 간추리고 해석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네 복음서를 한 이야기로 묶자면 각자의 특성을 제대로 살릴 수 없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생애를, 그가 누구며 왜 세상에 오셨고 부서진 인간들에게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통일된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는 이점도 있다.

 

   물론 나는 안다, 복음서들이 많은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있음을.

   ― 이 책들이 기록된 정확한 시점은 언제인가?

   ― 이 책들의 정확한 자료들은 무엇인가?

   ― 이 책들이 희랍어로 되어 있는데, 예수가 당시 사용한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읽는 희랍어 본문은 그 언어의 정확한 번역인가? 아니면 해석인가?

   ― 예수의 정확한 연대기는?

   ― 네 복음서들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와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이 질문들에 답하려 하지 않겠다. 그것은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일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그 질문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복음서들 사이에 놀라운 통일성과 수렴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였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네 복음서들이 함께 선명히 그려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출생에서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드러내고 우주적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길을 가리키라고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신 한 사람을 우리는 복음서들에서 본다. 

 

   그는 특별한 능력을 받아 지닌 사람이었다. 거리낌 없이 자유롭고, 권위 있게 말하고, 철저히 겸손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가난하고 비천하고 약하고 부서진 인간들에게 복된 소식을 특별한 방식으로 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온 사람이었다.

 

   나는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예수와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를 보여주고자 이 책을 쓴다. 그런즉 이것은 성서학자의 논문도 아니고 박학한 역사가 또는 주석학자의 글도 아니다. 그들 모두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지만,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게 아니다. 이 책은, 결점과 부족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받은 것을 세상에 전해주고자 하는 보통사람의 작품이다. 오늘 나는 내게 영감을 주고 내 인생에 거름이 되어준 복음서들을 사십 년 전에 읽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 

 

   착실하게, 또는 착실하지 못하게,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살면서 형성되고 변화된 내 머리와 가슴으로, 영혼의 아버지 토머스 필리페와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약하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형성되고 변화된 내 머리와 가슴으로, 복음서를 읽는다. 나는 또한 잘 기록된 예수의 생애와 그에 대한 주석서들을 먹고 자랐다. 이 책은 예수의 추종자로 살고자 한 나의 성숙과 미숙에 의하여, 나 자신의 삶에 의하여, 잉태된 것이다.

 

   복음서의 언어들에 충실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글을 너무 무겁게 또는 학술적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정확한 인용은 하지 않았다. 이 책은 교과서(textbook)가 아니라 명상록이다. 

 

   복음서를 잘 아는 이들은 이 책의 단어와 구절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것이다. 복음서를 모르는 이들은 이 책을 통해서 복음서를 사랑하고 읽게 되기를 희망한다. 간혹 복된 소식을 전하는 책의 간결한 스타일을 살리고자, 복음서를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의 예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참 예수를 묘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보다 많이 배우고 알고 거룩한 이들을 찾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예수의 영에 의하여 나의 오류들이 수정되고, 더 밝은 깨달음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복음서에 대한 나의 해석들은 분명히 인간존재에 대한 나의 이해에서, 지난 세월 살면서 터득한 인생철학에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에 맺어지는 모자(母子)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나의 깨달음에서 나온 것들이다. 지난 삼십 년 세월, 나는 여러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함께 라르셰에서 살았다. 그들은 약하고 무력하지만 놀랍도록 개방적이고 서로를 신뢰한다. 예수는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오신 분이다.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은 누가 뭐래도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다. 진실로 복음서는 그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그가 누구며, 그의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떻게 아이처럼 그분에게 마음을 열어드릴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하여,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내게 사람의 몸이 지니는 의미와 그 연약함을 특별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몸소 사람 몸이 되어 상처입기 쉬운 나약함으로 내려오신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그들과 더불어 나는 진실한 교제(communion)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맨가슴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교제가 어째서 모든 인간의 기본 경험이며 사랑과 자비를 기르고 사람을 성숙시키는 바탕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 사이의 참된 교제는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 은총의 장소로 바뀔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입술의 말이 아니라 벗은 알몸으로 사랑을 나눈다. 바로 이 사랑의 몸짓에서 나는 참된 인간의 교제를 발견했고, 예수가 어떻게 단순한 말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통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1964년, 토머스 필리페 신부에게 감동을 받아, 정신장애를 지닌 두 남자, 라파엘과 필리페를 삭막한 수용시설에서 데려다가 프랑스 트로슬리-브뤼의 한 작은 집에서 동거하는 것으로 라르셰는 설립되었다. 

 

   그 초라한 공동체를 모태로 하여 같은 꿈과 영감에 기초한 공동체들이 백여 개로 불어났다. 그들 공동체마다, 숙소들과 필요한 경우 작업장과 학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장애를 지닌 이들과, 그들과 함께 살려고 온 사람들이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집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라르셰에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용서하고  그리고 함께 잔치를 벌인다. 우리는 서로 돌봐주고, 하나로 결속된 우리의 존재를 자축한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어, 믿음과 사랑으로 오늘 내 중심에 살아계시고 온 세상 믿는 자들에게 영감을 주시는 예수를 더욱 알게 되면서, 인간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면서,  역사, 특히 이천 년 전 역사를 읽으며 복음서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오늘 나에게 살아계시는 예수와, 시간 속에, 역사 속에, 그리고 당신의 삶과 사랑을 목격한 증인들에 의하여 기록된 복음서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 사이에서, 아무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분은 한 분이요 같은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오늘 우리 중심에 성령을 통하여 출현하시는 예수와 세월을 거슬러 교회의 역사 안에 출현하신 예수가 똑같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두 분이 한 분이요 같은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이기 때문이다. 

 

   갈릴래아와 유다 땅에 사셨던 예수는 오늘 우리의 산 모델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고자 제자들의 발을 씻는다고 몸소 말씀하셨다. 그분을 추종하는 우리는 그분이 사셨고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살고 그렇게 사랑하라는, 그분의 모든 것을 겉모습이 아니라 속으로 닮으라는, 그분처럼 성령의 영감을 받아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로 하나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복음서가 있는 것은 그분이 오늘 우리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살아 계시다는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늘 이 부서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치고자 거기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썼던 것이다.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요일 2).

 

   나처럼, 생명을 갈망하고 의미를 찾고 내면의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 예수께서 당신 아버님의 인도와 영감을 받아 걸으셨듯이 그렇게 걷고, 그분이 당신 아버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며 사셨듯이 그렇게 살고자 원하는 이들, 평화, 사랑, 진실을 찾아서 예수의 다른 추종자들과 함께 자기한테 주어진 길을 걷는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사랑의 선물, 예수 / JESUS, the Gift of Love

 

 

 [1] 배경

 

[예수 당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육십 년쯤 전, 로마군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다. 로마는 교활한 정책에 따라, 본토인들 가운데 제 영달만을 생각하는 자들을 골라서 점령지의 통치자로 세우고, 그들이 황제의 충직한 노예로 남아 있는 동안 여러 특권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예수 탄생 사십 년쯤 전에, 사람들이 ‘대왕’자를 이름에 붙여준 헤로데가 유다의 왕이 되었다. 사악하고 탐욕스런 인간 헤로데는 로마와 온갖 협상을 맺고 비열한 수단으로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의 인기와 행운을 누렸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기 영광밖에 모르는 독재자로서 자신의 재산과 사회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로마는 그를 이용하여 자기네 이익과 권력을 챙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동방의 현자들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기다려온 왕이자 목자인 그리스도의 출생이 알려지자, 그를 없애려고 헤로데가 군대를 보내어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아래 아이들을 학살한 끔찍한 이야기를 읽는다(마태오 2). 

 

인간에 대하여 이보다 무섭고 잔혹한 범죄가 있겠는가? 아이들의 피가 요람을 적시고 베들레헴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가녀린 몸들이 칼에 베이고 찔려 도랑을 메울 때, 어머니들은 기가 막혀 몸부림치고 아버지, 형, 누이, 삼촌들은 분노, 적개심, 복수심으로 이를 갈면서도 칼의 힘과 뻔뻔스런 악의 얼굴 앞에서 속수무책인 채 속으로 절망감과 무력감을 삭여야 했다. 

 

천하의 주인 노릇을 하던 로마인들은 문화, 지식, 기술, 과학 그리고 재물을 거머쥔 자기네가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종족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이상한 옷을 입고 괴상한 종교의식을 치르며 무지몽매하여 하나뿐인 신을 광신하는 유대인들을 경멸하였다. 로마는 두려움과 잔인함으로 그들을 다스렸다.  

 

이교도에 의하여 짓밟힌 유대인들은 로마의 힘에 저항할 아무 대책이 없음을 알고, 분노를 속으로 삭이며 감내하였다. 그중 어떤 자들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유다법과 종교의전(儀典)들을 살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고자 조건들에 타협하고 안전을 도모하였다.

 

한편으로 어떤 자들은 공공연히 유대교 신앙을 포기하고 로마에 협력하여 돈을 벌었고 갖가지 혜택을 누렸다. 그것은 세리, 관리, 장사치, 창녀, 상인들만의 선택이 아니었다. 헤로데와 그의 군대와 왕실에 가까운 자들이 주로 그 길을 갔다.

 

그런가 하면 종교의 이름으로, 문화와 인종에 대한 자부심으로 로마에 저항하는 자유의 전사들,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테러리스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여겨지는 로마 병사들을 단도로 찔러 죽였다. 그러면서 무장 저항군을 조직하여 훈련할 계획이었다. 뜨거운 열정과 용기로 그들은 폭력과 하느님의 능력을 빌려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세상은 그들을 “열심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얼마 전에 실제로 갈릴래아에서 즈카이야의 아들 유다의 지휘 아래 무장봉기가 있었다. 로마의 시리아 총독 바루스는 저항군을 진압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천 명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에,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의 군대에 의하여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여 그 피가 희생제물인 짐승들 피에 섞였다고 기록하였다(루카 13). 유대인들, 특히 갈릴래아의 유대인들은 로마와 그 잔인한 통치에 대한 증오심이 팽배하여 언제고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사제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였다. 많은 사제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그들 곁에는 토라에 능통한 율법학자들, 서기관들이 있었다. 산헤드린은 대사제, 사제, 율법학자, 원로들로 구성된 일종의 의회였다. 정부와 사법부의 최고 의결기구였고 신학토론의 장(場)이기도 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물론 대사제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 점령군에 의하여 조종당하는 신세였다. 로마가 그를 지명하여 자기들 목적에 맞도록 이용했던 것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일종의 경건주의 그룹인 바리사이가 있었다. 바리사이란 이름에는 “구별된 사람들”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다. 그들은 대개 평민들과 장인(丈人)들로 구성되었는데, 예수께서 오시기 전 이삼 세기부터 존재하였다. 보통 유대인들이 신앙과 사랑의 부족을 스스로 고백하며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그들은 마땅히 변화하여 하느님의 율법으로 철저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느님이 거룩하시듯이 거룩하여라!” “거룩하다”는 말에는 “다르다”는 뜻이 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함이 곧 ‘거룩함’이었다. 하느님의 법에 대한 복종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보장해주었다. 

 

여러 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의 지배를 받아왔고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교도인 외국인들이 낯선 생활방식, 제도 따위를 들여왔기에 유대인들은 자기네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율법을 지키는 일, 특히,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이방인의 영향을 물리치고 자기네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편, 율법의 내용들을 정해진 틀로 형식화하는 것이 율법학자와 서기관들의 역할이었다. 그들의 토라 사랑에는 숭고하고 각별한 점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 못지 않게 믿음이 독실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이신 하느님을 기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토라의 중심을 망각하고 세세한 법조문을 고지식하게 지키는 것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의 지평에 출현한 다른 많은 종교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사랑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보다 자기네 정체성을 살리고 정권을 유지하는 데 더욱 열심이었다.

 

많은 유대인이 자기네 정체성을, 그들의 ‘성스러움’과 ‘하느님의 선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반면에, 우상 숭배하는 이교도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깨끗한 세상과 더러운 세상, 선한 세상과 악한 세상으로 분명하게 갈라놓았다.

 

다른 한편에는 좀 더 보수적인 사제들과 부유한 지주들로 구성된 사두가이파가 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히브리 전통들을 고집하였고, 신앙과 종교의전들의 현대화를 배척하였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달리 그들은 권력과 재산을 지키고자 로마와의 타협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 가운데 진지하고 정직하고 진정으로 경건한 자들이 있었지만, 외부와의 갈등이나 박해를 두려워하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고자 권력과 재물의 덕을 보려는 자들도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소수의 부유층, 지주들, 장인들과 상인들이 있었고, 나머지 대다수는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았는데, 율법에 관하여 배운 바는 없었지만 경건한 믿음을 지닌 자들도 섞여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 노동자들 부잣집에 고용된 일꾼들, 그들은 맨땅에 살았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그랬듯이,  부유하고 아는 게 많은 자들은 비천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요한복음에는 바리사이들이 그들을 두고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을 무리”(요한 7)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을 존중하여 ‘아나뷤’(anawim)으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본 자들도 있었다.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은 걸인, 나병환자, 불구자, 장애인들을 그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경멸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잘려진 불순하고 더럽고 악한 자들로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거룩한 성전에는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은혜도 입지 못하고 가치도 없는 그들은 온갖 천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자연히 그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살아있는 것 자체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분노로 치를 떨며 신음하였다. 혹은 정신병으로 도망치고 자기에 대한 절망과 혐오로 몸부림쳤다. 그들은 자신의 이 생과 다음 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저주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의 예언에 충실하여 그들을 자비심으로 돌봐야 할 이웃들로 본 유대인도 있었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이사야 58).

 

“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도 없었고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다. 로마를 위해 일한다는 이유로 동족한테서 미움과 멸시를 당한 세리들, 색욕에 굶주린 로마 병사들에게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창녀들이 그들이었다. 당시 로마군 진영은 티베리우스 호숫가 막달라에 있었는데, 점령군이 주둔한 모든 곳에서 그랬듯이 거기에도 창녀촌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유대인들은 야훼를 믿고 토라를 읽고 시편기도를 바치며 야훼께 희망을 두었다. 아도나이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뷤’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자주 성전을 출입하며 제물을 바치고 날마다 주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하였다.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네 발이 헛디딜까 야훼, 너를 지키시며 졸지 아니하시리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졸지 않고 잠들지도 아니하신다. 야훼는 너의 그늘, 너를 지키시는 이, 야훼께서 네 오른편에 서 계신다. 낮의 해가 너를 해치지 않고 밤의 달이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야훼께서 너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주시고 네 목숨을 지키시리라. 떠날 때에도 돌아올 때에도 너를 항상 지켜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시편 121).

 

예리고 부근에 에세네라는 이름의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분리되어 엄격하고 금욕적인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들은 성전과 다른 모든 종교의전들로부터 의식적으로 떨어져 나왔다. 자기네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철저히 배척하고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하며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열망하였다. 복음서에는 그들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1946년 예리고 부근에서 발견된 ‘사해문서’를 통해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세례자 요한]

 

분노와 절망, 혼란과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시절에 요한이라는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예언자였다. 그때까지 오랜 세월 이스라엘에 예언자들이 출현하지 않았다. 개중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자들도 있었지만, 대중은 뭔가 일어나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인가? 한 세대가 끝장날 것인가? 왕국을 회복하기 위하여 “오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가 과연 올 것인가?

 

요한은 예언자답게 바리사이들의 화려한 옷이 아니라 낙타 가죽을 몸에 걸쳤다. 그리고 예언자답게 메뚜기와 꿀을 먹었다. 요한은 힘과 진실을 담아 하느님의 말씀을 외쳤고,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투로 강력한 경고를 토해내었다. 회개하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불에 삼키는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었다. 

 

세상의 종말인가? 한 세대의 끝장인가? 그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를 향하여 외쳤다. “독사의 족속들아!”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엘리트로 자처하지 말고 마음과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경고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으로부터 몰려와, 하느님께 성실한 죄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을 고백하고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그들 모두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외쳤다. 열심당이 되거나 율법조문을 까다롭게 지키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을 바꾸라고 하지 않았다. 군인이든, 세리든, 직업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다만, 속마음이 달라져야 한다고, 마음을 바꾸라고 말했다. 예언자 이사야의 영감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였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루가 3).

 

무엇보다도,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다른 분”을 말하였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다. 그분은 자기처럼 물로 세례를 주지 않고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다. 

 

요한은 말하기를,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분 위에 내려오실 때까지, 나라 지도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백성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자기한테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자기 뒤에 오실 다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이 자기한테는 없다고 하였다. 그 ‘다른 분’이 바로 예수시다. 그분이 요한에게로 오시어 요르단 강물에서 세례를 받겠다며 요한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셨다. 요한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오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요, 자기가 그 길을 예비한 분임을 알아보았다. 그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 뒤로 요한은 늘 말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늙은 엘리사벳의 몸에 기적처럼 잉태된 요한은 예수의 사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촌인 예수가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분인 줄 몰랐다. 

 

예언자의 역할은 진리 곧 하느님의 말씀을 말재간 부리지 않고 곧이곧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 속임수, 불의, 거짓 그리고 죽음과 악의 세력들 앞에서 생명과 해방의 길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은 마음의 회개를 촉구하며 예수를 가리켜, 저분이 그 길이라고 하였다. 일단 길을 보여준 예언자는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의 역할이 끝난 것이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키고 나서 사라졌다. 진리 곧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당시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아버지 못지 않게 잔인하고 탐욕스러웠던 아들은 예언자 요한의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큰 잔치가 벌어졌을 때 술에 취한 그가, 자기 아내 헤로디아의 딸에게, “뭐든지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약속을 함부로 하였다. 필립비의 아내였다가 시숙인 안티파스와 결혼한 헤로디아는, 그 결혼이 유대 법을 어긴 것이라고 비난한 요한을 몹시 미워하였다. 딸이 무엇을 원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왔을 때 그녀는, 쟁반에 담은 요한의 목을 원하라고 시켰다.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잘라서 쟁반에 담아 딸에게 주었고 딸은 그것을 제 어미에게 주었다.

 

예언자들이 당대의 부정과 불의를 비판할 때에는 분명한 언사를 사용하지만, 장래의 일을 언급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모호하게 말한다. 요한은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묵시적 표현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의 예언에 뿌리를 내리고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우쳐진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 

 

지난날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인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오시어, 하느님 나라와 우주적 평화를 가져다주리라고 예언하였다.

 

유대인들은 굴욕과 절망 속에 빠져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강력한 군대 힘으로 로마를 바다에 쓸어 넣을 열심당의 지도자로 그가 나타나리라 생각하였고, 어떤 자들은 그가 율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으로 임무를 다하리라 생각하였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올는지는 모르지만 다윗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라를 회복하리라는 믿음으로 그를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다. 

 

예수를 이해하려면 유대 민족의 역사와, 자기들이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인류에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리라는 그들의 믿음을 이해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유대 민족과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났고, 아들 이사악과 손자 야곱이 뒤를 이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유대인들을 구원하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일어선 예언자였다. 그는 홍해를 건너 약속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였다. 모세는 하느님의 율법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예언자들이 주축을 이룬 유대 민족의 역사는. 자주 깨어지고 굴욕당하고 살던 땅에서 쫓겨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등지고 외국의 힘과 재물을 부러워하여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배척한 역사다. 하지만, 언제나 적은 수의 남은 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하느님을 의지하고 섬겼다. 

 

예언자들은 입을 모아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왕국, 하느님의 나라, 평화와 사랑의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사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의 이름으로 한 아이가 태어나 하느님의 권세를 어깨에 메고,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이사 9). 그가 다윗의 보좌에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야훼의 영이 그에게 내리면 그가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고 거기서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가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고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을 것이다(이사 11). 야훼의 종, 선택받은 자는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이사 42). 마침내 선민의 빛이 만방에 비추면 인류가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고 평화가 온 땅을 덮을 것이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라.

모두 너에게 모여오고 있지 않느냐?”(이사 60).

 

좀 더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아가 와서 그 빛을 모든 민족 위에 비추고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때에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다(이사 2).

 

 

 ※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에게 세 가지 이름을 준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신랑.”,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이 뽑아 세운 이.” 

 

예언자의 청중에게 이 이름들이 무슨 의미로 다가왔을까?

 

대부분 목자들과 지주들로 이루어진 유대 민족에게 어린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랜 세월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아 제물로 바치며 야훼께 복종할 것을 서약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양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유대인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았을 때 모세는 이집트 통치자에게, 야훼께 복종하여 그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으면 모든 집안의 맏이들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동족에게는,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그러면 그 피가 맏이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유대 집안의 맏이들은 살아남았고 모세가 홍해를 건너 그들을 자유의 땅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해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였고 그날을 ‘과월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니, 이는 그날에 양의 피가 묻은 집을 야훼의 천사들이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그날이 되면 유대인들은 과월절 양을 잡아먹고 자기들을 선택하여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희생제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먹히는 과월절 양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또한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고난 받는 주의 종(이사 53)이기도 하다.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입을 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상처로 말미암아 모두가 고침을 받는다.

 

※ ‘신랑’도 유대 문화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들은 혼인을 큰 잔치로 축하했다. 그들에게 가족과 핏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자주 하느님과 그분이 선택하신 민족 사이의 사랑과 하나 됨을 결혼한 부부의 사랑과 하나 됨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야훼가 신랑이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신부다. 에제키엘,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 모두가 하느님의 선민과 하느님 사이의 신비스런 관계를 사랑하는 신랑과 사랑받는 신부의 관계로 서술하였다. 하느님은 당신 신부를 기뻐하시고 그 아름다움에 화답하시고 사랑으로 관을 씌워주신다. 그녀가 당신을 등지고 창녀처럼 굴어도 용서하며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아 2).

 

신랑과 신부가 서로 애모하여 하나 됨을 노래한 솔로몬의 ‘아가(雅歌)’는 유대 민족과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영감에 찬 노래다. 사랑받는 연인이 노래한다.

   “나의 귀여운 이여, 어서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 나와요. 자, 겨울은 지나가고 장마는 활짝 걷혔소. 산과 들엔 꽃이 피고 나무는 접붙이는 때 비둘기 꾸르륵 우는 우리 세상이 되었소.”(아가 2).

 

요한은 메시아 호칭으로 ‘신랑’을 예수에게 붙여드린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 들은 증인들이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사랑하는 이 예수, 사랑받는 이 예수, 신랑 예수가 모든 예언을 이루고자 세상에 오신다. 그렇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와 있다.

 

※ 요한은 하늘에서 울리는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1). 그래서 그는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이 뽑아 세운 이’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맏아들, 특별한 아들 또한 유대 문화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그는 사랑받는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내가 받을 영광을 뉘게 돌리랴? 내가 받을 찬양을 어떤 우상에게 돌리랴? 전에 말한 일들은 이미 이루어졌다. 이제 새로 될 일을 내가 미리 알려준다. 싹도 트기 전에 너희의 귀에 들려준다.”(이사야 42).

 

예수는 그토록 겸손하고 그토록 숨어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예언자가 나타나, 그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바로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분”임을 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선물, 예수 JESUS, the Gift of Love

 

 [1] 배경   [예수, 그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린양, 신랑,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이 뽑으신 사람, 예수.

   그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요한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는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겸손히 무릎 꿇은 

   그 사람이 누군지, 그게 궁금하였다.

 

   그는 투표권자들 눈치를 살피는 정치인이나 

   거만한 장군처럼 거리를 활보하지 않았다. 

   온유한 태도로 겸손하게 걸으면서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온 몸으로 말하였다. 

   하지만, 신랑의 아름다움과 젊음, 

   사랑하는 연인의 기쁨, 

   상처 입은 가슴의 신부를 찾는 진지함이 그에게 있었다. 

   그는 보냄 받은 자의 확신과 힘을 지녔고, 

   자기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출생에 대하여, 하느님의 능력으로 

   나자렛 마을 젊은 여인 마리아 몸에 잉태되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마리아는 거룩한 성령으로 충만한 처녀였다.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말씀과 더불어 말없이 살아온 그녀는 

   하느님의 선민인 동족의 비참한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많은 사람의 불신과 부정(不貞)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하느님 나라를 애타게 갈망하였다. 

   또한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얼굴과 정의에 목이 말랐다. 

   그런 그녀에게 하느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어, 

   장차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말을 전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알았기에 

   떨리는 가슴으로 천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the Word)이 

   그녀의 그윽한 자궁 안에서 사람 몸으로 되셨다. 

   그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하느님의 입맞춤으로 

   말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져들었고, 

   그렇게 잉태된 아이를 사랑으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너무나 크고 높고 놀라우면서 

   너무나 작고 낮고 겸비한 이 일 

   하느님이 사람 몸으로 되신 일이 있은 뒤에 

   마리아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에게로 서둘러 갔다. 

   그때 엘리사벳은 늙은 나이에 기적처럼 임신한 몸이었다. 

   마리아가 그녀에게 간 것은 

   오랜 세월 석녀라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해온 

   그녀를 위로하고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당시 여인의 중심가치는 종족의 번식을 위한 회임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늙은 몸으로 아이를 잉태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우스꽝스런 코미디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마리아는 그녀 곁에 있고자 하였다.

 

   두 임신한 여인이 만났을 때, 

   그리하여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던 요한, 

   뒤에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기뻐서 뛰어놀았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에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

 

   마리아도 자기의 노래, 

   기쁜 소식의 노래,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노래,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의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가 1).

 

   마리아는 의롭고 착한 남자 요셉과 정혼한 몸이었다. 

   누구도 요셉만큼 그녀를 사랑하진 못했다. 

   하느님께 오로지 바쳐진 그녀 가슴과 영혼의 아름다움이, 

   그녀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뿜어내시는 빛이, 

   그 눈과 말과 몸을 통하여 환하게 빛났다. 

   그녀 몸은 온전하고 거룩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인 그녀 몸은, 

   말씀이 그 안에서 몸으로 되셨을 때 더욱 밝게 빛났다.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알았을 때 

   요셉은 그녀의 정절(貞節)을 의심할 순 없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에게 

   천사 가브리엘의 메시지를 말해줬을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 

   자기가 어찌 할 수 없는 하늘의 선물이요 신비임을 알았다. 

   모든 것이 그가 없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예수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고민 끝에 그가 사랑하는 여인, 자기를 하느님의 빛으로 데려간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여기 있었으리라. 

   요셉의 멍든 가슴이 고뇌와 번민으로 찢어질 것 같았다. 

   동시에, 어찌 보면 수치스럽고 괴로운 상황에서 

   사람 몸으로 되어야 했던 '말씀'의 겸비함 또한 거기 있었다.

 

   그러나 요셉의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 

   그가 이 신비로운 사건에 한 몫을 감당해야 하고, 

   그러므로 정혼한 마리아와 결혼하여 

   하느님의 영으로 잉태된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여인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 그에게 맡겨진 것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마리아에게 달려갔으리라! 

   그리하여 사랑하는 여인을 안았을 때 

   그는 태중에 숨어있는 아이를 함께 안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요셉은 그 자리에 있었고 

   기뻐하는 목자들의 흥분을 지켜보았다. 

   동방에서 온 현자들이 어린 왕을 경배할 때에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마태오 2), 

   아이를 성전으로 데려가 

   거기서 시므온의 예언을 듣기도 하였다(루가 2).

   두려움과 질투에 눈 먼 헤로데가 

   베들레헴 근교의 아이들을 학살할 때에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한밤중에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그곳 이집트에서 가난한 난민생활을 하는 동안 

   어린 아들로부터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대왕이라고 불리던 헤로데가 죽자 요셉 일가는 

   갈릴래아의 가난하고 천대받는 마을 나자렛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스물여덟 해쯤 예수는 

   가난하고 힘없고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목수의 아들로 사셨다. 

   스물여덟 해 동안 어머니 마리아, 요셉과 함께 

   물질로는 가난하지만 

   사랑과 신앙으로는 풍요롭게, 

   로마에 짓눌리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굄을 받으면서, 

   그리고 온갖 피조물을 겸손하게 즐기면서, 

   나중에 사람들에게 일러주신 

  '여덟 가지 복'(the beatitudes)을 몸소 사셨던 것이다.

 

   사람 몸으로 된 '말씀'이신 그분이 

   어떻게 요셉, 마리아를 모시고 

   살고, 기도하고, 일하고, 창조하고 

   하느님을 예배하였는지, 

   그것은 최후의 혼인잔치에서 밝혀질 때까지 

   비밀로 남을 것이다.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셨다. 

   어떻게 그분이 성삼위의 하나 됨, 

   성가정의 하나 됨 안에서 사셨는지, 

   당신 모친과의 거룩한 교제 안에서 사셨는지, 

   그것은 신비에 감싸여 있다. 

   어떻게 그분이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 하나를 이루어 같은 식탁에서 먹고 

   깊은 교제를 나누셨는지도 마찬가지다. 

   나자렛에서 보낸 그분의 세월은 

   가난하고 비천한 약자들의 

   평범한 가정생활과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그분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말씀'이 사람 몸으로 되시어, 

   단순하고 가난하게, 

   하느님의 사랑받는 인간존재로 우리 가운데 사셨다.

 

   복음서들은 마리아 뱃속에, 

   나자렛에서의 가난하고 비천한 생활 속에, 

   말없이 숨어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예루살렘의 권좌, 

   헤로데와 빌라도의 궁전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잘 대비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예수께서 나서신다.

 

 [2] 예 수 [긍휼의 사람, 예수]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아마도 예리고 부근 어디쯤 되는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사십 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신 뒤에 

   예수께서는 고향인 나자렛으로 돌아오셨다. 

 

   마을 회당에서 그분이 이사야의 한 구절을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이사야 61). 

 

   그런 다음, 바로 그 자리에서 선언하셨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의 비전, 

   당신의 프로그램을 세상에 밝히신다. 

 

   주님의 영은 그를,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부자와 지배계층, 

   권좌에 앉은 유식한 자들이 아니라 

   낮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짓눌리고 아픈 사람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율법을 지킬 수 없어 스스로 좌절하는 사람들, 

   예루살렘 성전에서 추방당한 사람들, 

   하느님한테서도 쫓겨났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소외당하여 괴로운 사람들, 

   죄의식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로 보내셨다. 

 

   바야흐로 그분이,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니 두려워 말라고, 

   용서하고 이해하시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니 겁내지 말라고, 

   복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할 것이다. 

   그들은 값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바로 이것이 복된 소식[福音]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들, 

   하느님이 선택하신 자들이다. 

   여기 희망이 있다! 

 

   예수께서는 들어갈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이사야의 예언을 온전히 이루신다. 

   율법의 눈에는 불결한 자들이 

   하느님 눈에는 깨끗할 수 있다고 말하며, 

   죄인들과 세리들을 만나 함께 음식을 먹고 

   나병환자들을 손으로 만지신다.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과 여자들을 가까이 하며 

   그들을 고쳐주신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푼 요한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처럼, 

   불결한 사람들, 

   거절당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참으로 중요한 존재임을 스스로 알도록 일깨워주시니, 

   많은 사람이 치유되고 새롭게 자기를 발견한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측은지심에 의하여 움직이셨다고 말한다. 

   ‘긍휼’의 그리스어인 ‘스플랑크나’(憐憫, compassion)는 

   육신의 구성요소(physical component)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의 창자를 뒤틀리게 하는 깊숙한 감정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목자 없는 양떼처럼, 

   배척당하고 버림받고 짓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그분은 창자가 끊어지듯이 괴로워하신다. 

 

   어떤 계층, 종파, 민족에 속해 있든지,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과 함께 아파하신다. 

   그분 안에는, 

   재물과 권력을 움켜잡고 

   하느님의 대리인 행세를 하는 

   사제들과 지배자들이 

   괜한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 

   가진 것 없고 병든 사람들, 

   천한 불구자들,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노골적인 불의와 위선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스플랑크나’에는 분노라는 뜻도 포함된다. 

 

   예수는 세상이 비천한 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분노하신다. 

   분열, 증오, 두려움, 분노로 온통 어지러운 이스라엘에서, 

   가난과 고통과 삶의 질곡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긍휼의 사람, 선의와 친절과 

   자비의 사람으로 나타나신다. 

 

   예수는 관계와 교제의 사람이시다.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시고, 

   친히 손으로 만져주시고, 

   그 손을 잡아주시고, 

   신뢰와 신앙으로 부르시고, 

   가난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일깨워주신다. 

  

※ 

   예수는 사람들한테 배척당하고 쫓겨난 나병환자를 보고 

   불쌍한 마음에 가슴 아파하신다. 

   나병환자들은, 더러운 자기가 여기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로 작은 종을 계속 울려야 했다. 

 

   그 나병환자가 예수께 소리쳤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마르 1). 

   예수께서는 그도 사람임을 인정하고 

   환영하는 뜻으로 

   손을 내밀어 그를 잡으셨다. 

   그리하여 그의 병을 고치셨지만, 

   그보다 그의 깨어진 마음과 부서진 

   자아상(self-image)을 고쳐주셨다. 

 

   예수는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들어 

   그의 열두 살 된 딸을 살려주셨다. 

   그의 집으로 갈 때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런데 너무 늦어서, 도착했을 때는 소녀가 죽어 있었다. 

   예수는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라”는 뜻이다(마르 5). 

 

   얼마나 온유하고 따스한 정경인가! 

   소녀와 그 부모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표현인가! 

 

   그분은 열두 해 동안 하혈로 고생하며 

   의원들을 찾아다니느라고 

   가산마저 탕진한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녀가 깊은 믿음으로 

   지나가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자, 

   즉시로 병이 나았던 것이다. 

 

   예수는 당신 몸에서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셨다. 

   그분이 여인에게 이르셨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그분은 “내가 너를 고쳤다.”고 말하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부드러운 겸손함인가! 

 

   예수는 (적군이자 이교도인!) 

   로마 백인대장의 종도 고쳐주셨다. 

   그분은 당신에 대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고 감탄하셨다.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 

 

   또한,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그리스 태생 가나안 여인의 딸도 구해주셨다. 

   처음엔 예수께서 그 여인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으셨던 것 같다. 

   제자들은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예수는 짐짓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는 듯이, 

   당신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자 여인이 대꾸하였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복음서들은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과 

  악령한테서 놓여난 사람들에 관한 

  자세하고 특색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게, 병든 사람들과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자기 발로 또는 남의 도움으로 예수께 와서 

  고침도 받고 그들을 온전하게 해줄 힘도 아울러 받았다. 

 

   예수는 참으로 섬세한 감성을 지닌 분이셨다. 

   그분은 자주 우셨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그 누이 마리아와 함께 우셨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당신 말씀을 배척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듣지 않은 그들을 위하여, 

   장차 멸망당해 많은 사람이 

   죽어갈 것을 내다보며 우셨다(루가 19). 

 

   그분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 

   아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 

 

   그분은 성전에서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 

   예수의 피 흘리는 가슴이 

   고통과 죄의식으로 길 잃은 사람들, 

   생명과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당한 변두리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자 모두를 고쳐주고 

   구원하고 해방하려고, 

   그들에게 안식과 힘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든든히 서서 사랑이 하는 일을 보고 듣고 

   그대로 따라하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 

   예수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보여주려고,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사제 하나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지만 지나쳐간다. 

   사제 집단에 속한 레위인 하나도 그렇게 한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반쯤 죽은 사람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고서 그를 품에 안고 돌봐준다. 

 

   예수께서 물으신다.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말할 것 없이, 동료 인간의 아픔과 곤경에 마음이 움직여 

   친절과 자비를 베푼 세 번째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하필 사마리아 사람인 것이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정통 유대교에 등을 돌렸고 

   그래서 선민의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교도로 취급하여 외면하고 멸시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고통에, 

   여인들의 고통에 민감하듯이, 민감하셨다. 

 

   유대 사회는 대단한 남성 본위였다. 

   여인들은 출산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유대 사회와 문화에서는 

   그들에게 설 자리도 낼 목소리도 없었다. 

   그들은 열등인간으로 어디서나 따돌림 받았다. 

 

   간음을 처벌할 때에도 

   돌에 맞아 죽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예수는 그들의 아픔에 유별나게 민감하셨다. 

 

 

※ 

   예수의 자비심은 용서의 자비심이다. 

   많은 사람이 죄의식과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갇혀서 

   마음과 영혼이 망가져 하느님을 두려워하였고, 

   하느님과 율법의 대리인 행세를 하는 

   이른바 순결한 자들에 의하여 멸시당하고 소외당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벌하시는 하느님 아닌 용서하시는 하느님, 

   참된 사랑과 교제를 그들과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고자, 

   그분은 세상에 오셨다. 

 

 

※ 

   누구를 용서하는 것은 그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살아있을 가치가 충분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누구를 용서하는 것은 

   깨어지고 뒤틀린 자아상(self-image)에서, 

   집요한 죄의식에서, 그를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용서는 평화의 입맞춤, 약속의 입맞춤으로, 

   하나 됨을 축하하는 것이다. 

   용서는 자기 자신의 빈곤함, 비열함, 

   모자람과 죄를 제대로 아는 것을 뜻한다. 

   또한 자기를 열어 사랑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말씀하시는 예수에게 

   바리사이들과 서기관들은 화가 났고 약이 올랐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가, 

   율법이 정한 정결의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감히 자기를 율법보다 높은 자리에 

   두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그들은 간음하던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나운 늑대들처럼, 

   반나체 여인을 끌어다가 예수 앞에 내어던졌다. 

   마침 예수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 율법으로 굳어진 성난 남자들, 

   무자비한 고집불통들은 

   예수를 올가미에 가두었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그가 여자를 용서하라고 한다면 

   모세의 참 제자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고,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해도 

   역시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뒤집는 셈이다. 

 

   “됐다. 꼼짝 없이 얽혔어!”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옷, 

    검게 무성한 턱수염, 

    거만한 얼굴, 

    굳어진 가슴으로 그들은 

    자기네 권력과 논리의 정당성을 

    감추면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는 말없이 몸을 굽혀 땅바닥에 뭐라고 쓰신다. 

   “뭐 하는 거야?”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예수가 일어나서 천천히 입을 열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성을 내다가 한 대 맞은 들개처럼, 

    사람들이 당황하며 하나 둘 꽁무니를 뺀다. 

 

    예수께서 여인을 바라보시자, 

    그녀의 수치심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놀라움으로 바뀐다. 

    이분이 누구신가? 

    예언자? 

    그분이 사랑어린 눈으로 

    여자를 부드럽게 내려다보시며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그녀가 대답한다,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예수의 자비와 용서가 죽을 뻔한 

    여인에게 새 생명을 안겨준다. 

    이제까지 묶여있던 죄의 사슬에서 풀려난 그녀는 

    사랑 안에서 변화된 자유의 몸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한 

   작은아들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루가 15).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아들은 그것을 가지고 멀리 가서 흥청망청 다 써버린다. 

 

   마침 그 땅에 기근이 들자 무일푼이 된 작은아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돼지 치는 집 일꾼이 된다. 

   너무나 배가 고파 돼지 밥통을 뒤지던 그에게 문득 

   아버지 집이 떠오르면서 

   아들이 아니라 하인 신분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헝클어진 머리에 지치고 굶주린 몸을 

   넝마로 가리고 그가 집으로 돌아온다. 

   아직 집에서 먼 거리인데도 아버지는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에 달려가서 두 팔로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그렇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 아들 모습이 보이자 달려가 뜨겁게 환영한 것이다. 

   아들은 어리둥절하여 눈물만 흘린다. 

 

   자기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명을 내린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이야기를 듣고서, 방탕한 삶으로 재물을 낭비하던 

   남자와 여자들은 

   하느님이 유산으로 주신 기운과 재물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쓴 것을 깨닫고 

   죄의식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들은 알게 된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이른바 의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상처 입은 남자와 

   여자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들 안에 희망이 되살아난다. 

   자기들이 하느님한테서 잘리지 않았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 맞추는 아버지가 거기 계신 것이다. 

 

   예수는 이야기를 계속하신다.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이 

   집안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인들이 나와서,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과 

   아버지가 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야기해준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달려가 따진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큰아들은 윤리도덕에 어긋남 없이 

   법을 준수하며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비와 용서의 가슴이 없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세상에는 

   엄격하고 순진하지만 가슴이 굳은 큰아들들과 

   나약하고 여리지만 용서를 아는 

   부드러운 가슴의 작은아들들이 언제나 있어왔다. 

 

   예수는 당신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하여 

   죄의 깊은 의미를 새롭게 드러내신다. 

   그것은 단순히 법조문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욕정과 교만 때문에 법을 등지거나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죄는 사랑의 관계를 파손하는 것, 

   계약을 파손하고 신뢰를 파손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사랑을 향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길이신 예수에게 등을 돌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약속과 당신의 사랑과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내 길을 걸으며 내 뜻대로 내 일을 하겠다.” 

   죄는 사랑과 사귐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느님 자리에 자기를 앉히고, 

   진리에 굴복하지 않고, 

   진실을 부인하고, 

   거짓을 살아가는 것이다. 

 

   죄는 생명을 파괴하고, 

   죽음을 추구하고, 

   사람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부수고, 

   약자와 가난한 자를 짓밟고, 

   그들의 신음을 틀어막고, 

   그들의 깊은 상처에 재를 뿌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을 거절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의 용서하는 품이 

   작은아들을 사랑으로 껴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하셨듯이, 

   예수는 그에게도 말씀하신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내가 하는 말을 믿어라,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으면, 

   그렇게 우리가 함께 있으면, 

   너도 남에게 생명을 줄 수 있고 그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를 봉쇄하여 죽음에 가두는 

   어둠과 두려움의 무서운 세력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품에 안고 예수께 다가와 

   축복을 간청했을 때 제자들이 막아서서 

  “성가신” 여인들을 쫓아버리려 했다. 

 

   자기네 선생에게는 해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이 있고, 

   게다가 그분이 고단하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예수는 화를 내며 말씀하신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막, 10).” 

 

   예수의 가슴은 사랑의 선물인 친교에, 

 

   인간관계와 하느님의 현존에 목마르시다. 

   사랑과 신뢰 안에 거하고 

   사람들 가슴 안에 거하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욕심이다. 

 

   힘 있고 권력을 행사하는 남자들이 

   힘없는 아이와 여인들에게 “아니”라고 말할 때, 

   그분은 가슴이 아프시다. 

 

   권력과 재물의 허망함을 깨닫고 

   현란한 오락의 덧없음을 등지고 

   당신과 깊은 친교를 나누려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토록 기뻐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랑의 품에 안기고 싶은 어린이들을 만날 때, 

   자기를 알아달라고, 

   자기와 사귀자고 호소하는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만날 때 

   예수, 그분은 크게 기뻐하신다. 

 

    몇 가지 신비스런 방식으로 예수는 

    가난하고 상처 입은 자들의 울음을 달래주신다. 

 

    그의 가슴에 묻혀있는 사랑을 그들의 울음이 일깨운 것이다. 

    사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한 예수를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여전히 자신들의 계획과 권력, 메시아의 꿈을 성취하는 데 

    그 몸과 마음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마음은 외로운 사람, 거절당한 사람들에게 쏠려 있다. 

    당신이 바로 거절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그분은 거절당한 자의 아픔을 이해하신다. 

    당신 가슴이 부서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부서진 가슴을 너무도 잘 이해하신다. 

 

   그들의 아픔은 그분의 아픔이고, 

   그들의 외로움은 그분의 외로움이고, 

   그들의 울음은 그분의 울음이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부서진 자들에게 

   그분의 마음이 끌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는 여기저기 치료를 나눠주는 

   넉넉하고 부유한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다만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사랑과 친절을 쏟아내려고, 

   당신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려고 몸부림치는 연인(lover)이다. 

 

   어느 날, 성전에서 그는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 

 

   그는 사랑을 주려고 몸부림치고, 

   그의 몸과 마음은 

   사랑을 달라고 몸부림치는 자들에게 쏠려 있다. 

 

사랑의 선물, 예수 / JESUS, the Gift of Love

 

 [2] 예수 

 

   [거짓, 위선 그리고 악에 맞서는 예수]

    예수 가슴 속의 연민(compassion)은 

    빛과 진리가 없는 온순함이나 나약함이 아니다. 

    그의 연민은 진정한 사랑과 거대한 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연민은 

    약자를 괴롭히고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들이 사랑 안에서 존중받으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온갖 악과 거짓과 위선과 편견의 세력에 맞서는 

    거친 투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편견에 치우쳐 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거짓의 지배를 받는 

    제도나 체제에 맞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예수는 갈등구조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가신다. 

    그리하여 권력자들과 위선자들에 맞서고, 

    그로써 상처를 입게 되어도, 

    타협하지 않고 당당하게 

    하느님의 진실을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 때문에 세상은 그분을 따돌리고 비난하고 미워한다.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뒤에 알게 되겠지만, 

    그분은 여러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셨다. 

    당신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사랑으로 살기보다는 

    억압과 두려움과 죽음의 세상에서 

    방어기제와 장벽들 뒤에 숨어 

    서로 다투면서 사는 쪽으로 더욱 잘준비되어 있는 듯하다. 

    끝없는 경쟁과 다툼 속에서 힘과 명예를 얻고자 

    남들과 싸우며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더 편한 듯하다. 

    모든 사람, 모든 집단 안에 

    어둠과 번뇌의 힘 있는 세상이 있고, 

    새로운 사랑으로 자기를 열지 못하게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이끌림이 함께 있는 것같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피부에 스며들어 있는 원죄요 근본적인 죄다. 

    온유하고 따스한 연민과 사랑이 

    오해받고 거절당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들은 예수를 원하지 않는다. 

    어둠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랑의 왕국을 원하지 않는다.

 

    그분의 첫 번째 싸움은 악한 영, 사탄과의 싸움이다. 

    사탄은 그분을 광야에서, 

    명성을 얻고 맡겨진 임무를 쉽게 이룰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강력한 방법으로 유혹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단순 명쾌하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하시지 않았느냐?"(마태오 4).

 

    예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신다. 

    그리고 하느님이 일러주시는 방법으로만 일하신다. 

    약하게, 작게, 열린 자세로, 여리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권력, 특히 정치권력을 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체제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부터 체제를 개혁하려고 싸우지 않으신다. 

    당신의 길이 사람들과의 사귐에 있고, 그것이 

    각 사람에게 자기를 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분은 받아들이신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얻어맞아 깨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으신 다음,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첫 번째 순례를 가셨을 때 

    그분은 돈 바꾸는 자들과 짐승들을 사고파는 자들로 인해 

 

    하느님의 성전이 더럽혀져 있는 것을 보시고 

    맹렬하게 화를 내셨다(요한 2).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고, 

    동전들을 사방에 흩뿌려 큰 소동을 일으키며 외치셨다.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모독당하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그의 가슴은 불타올랐다.

 

    예수는 체제에 계속 도전하셨다. 

    법보다 사람이 중요함을, 

    사람을 위해서 법이 있는 것임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을 치료하고 사랑으로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거기 계심을,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행위로써 보여주어, 

    지도자들의 분노를 사셨다. 

    그분은 권력에, 힘없는 사람들을 짓누르는 

    종교 세력에, 도전하셨다. 

    힘없는 사람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는 차라리 

    큰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루가 17) 하셨다. 

 

    부자가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지 않으면 

    죽어서 천당에 못가고 지옥으로 떨어진다고도 하셨다. 

 

    그분은 부자들에 마주서서, 

    고통과 번민이 그들을 덮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권위 있게 진리를 선언하신다. 

    묻혀있는 진실을 그분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타협을 용납할 수 없고 

    당신 아버지에 대한 거짓말을 용납할 수 없으시다.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굳어져 있는 

    유대교 지도층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신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여기 있다."(요한 8).

 

    그분은, 사람이 만든 법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닫고 있다고 

    그들을 책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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