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신학교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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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10-20 23:55 조회5,5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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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조선선교 백주년 기념제일
주님의 성적(聖蹟)을 따라 순례의 길을 떠난 지
해를 세어 거듭거듭 몇 해였던고.
세월은 가고 사람은 쇠하는데
돌아보니 걸어온 길 많지 않아라.
앞으로 가고 가서 겟세마네로 골고다로
울고 엎드리고 서서 피 흘리신 곳
낱낱이 참배함이 있고자 하나
이 걸음 어이 이리 지지부진하는고.
이러다가 서산에 해는 기울어지고
그나마 다리의 힘조차 말라버리면 어찌 할 건고.
그러나 걸음은 떠도 마음은 급합니다.
내 걸음이 뜬 까닭은
안과 밖으로 거리끼는 막대기와 가로질린 돌이
수없이 많은 까닭이로소이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주여 인도하소서. 아멘.
"신학생 수가 적어요." (여신학생 원산 최영희)
다른 길과 달라서 올 때도 적은데 또 하다가 떨어지니깐. 과연 어려운 길이다. 가장 어려운 길이 가장 복된 길인 줄 세상이 알았다면 신학교 문이 미어졌을 것을. 그러나 '신학교가 참된 생명을 주고 있느냐'도 또한 문제.
1931년 9월 26일 (토)
사회주의에서 예수주의로 전향한 뒤 1930년대 초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닌 김광우 목사는 당시 신학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입학 전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신학생의 생활을 들어와 보고 낙심하였다. 나뿐이 아니라 동급생 대부분이 그런 말을 하였다. 기숙사에 들어와 그 분위기를 좀 지나친 말로 하면 형편없었다 … 당시 우스운 이야기가 있었다. 신학교 입학 면접시험 때에 교장이 '당신 왜 신학교에 입학하려 하오?" 물으니, 대답이 '다른 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어서 신학교나 가보자고 왔읍니다' 했다는 이야기이다.
신학교에 들어와보니 모든 학생이 다 풀 스칼라십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피도수 선교사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신학교 입학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요, 입학만 되면 어떤 면으로든지 학비는 보장이 된다. 투철한 소명감을 가지고 공부하는 학생이 드문 것을 발견케될 때 개탄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 무신론자도 하나 있었다. 그저 공부를 하게 되니까, 미국 가는 길을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신학교나 가보자고 와서 공부한 사람 치고 졸업 후 목회로 나간 사람도 별로 없고 목회를 하다가 중도에 탈락된 사람이 많았다. 6.25 때에는 공산당과 합작하다가 나중에 피살된 사람도 있었다. 교수거나 학생이거나 신앙적 소명의식이 불철저했던 사람은 말로가 좋지 않음을 보았다.
오늘날 가난한 캄보디아의 많은 청년들을 한국 선교사가 보조하여 공부시키듯, 당시는 서양 선교사가 많은 대한의 인재들을 길러냈다. 그래도 그때의 신학공부란 여러모로 따져보아 "가장 어려운 길"이었다.
이제는 어느 선교사가 학비를 대주지 않고 각자가 해결해야 함에도 신학공부는 "가장 어려운 길"이 더 이상 아니다. "가장 어려운 길이 가장 복된 길"이라면, 오늘날 '수월해진' 신학교의 길에서 쓸데 있는 고생을 자처하는 어려움이 동반되어야만 복된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오늘날 신학교가 참된 생명을 주고 있습니까? 목회가 하나의 살아갈 방편이 될 때 참된 말씀과 사랑의 희생이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처럼, 신학교육이 제 몸을 살리는 방편에서 그치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주의 참되고 선한 일꾼들을 길러낼 수 있겠습니까? 친히 주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주는 나의 신학교가 되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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