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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무교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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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11-08 23:56 조회2,6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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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서(金麟瑞) 씨에게

   인형(仁兄)의 편지는 참으로 혜서(惠書)로소이다.

   문서전도 실현을 기뻐하며 이에 주의 축복이 더욱더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영화란(靈化欄)에 대한 책임은 너무 무거운데요. 형이여, 나를 어느 시기까지 용서해줄 수 없나이까? 나는 이 문서전도 운동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면서도 그 방면에 정면(正面) 진출에 있어서는 나는 문제입니다. 지명이 맘에 퍽 들고 삼강(三綱)도 잘 되었습니다.

   다음 호는 ① 너무 굉장하기를 기대치 말고 단순에 착안할 것 ② 너무 이론 투쟁에 기울어지지 말 것 ③ 면수도 많지 않음이 좋을 듯 ④ 책값은 10전 내지 15전에 가(可)할 줄 아옵니다. 인형의 수고가 많은 것을 아오매 주께 간구치 않을 수 없나이다.


   황해노회의 나에 대한 처분설(說)은 한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 우습고 또 감사한 일이외다. 나의 무교회주의설에 있어 나는 변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변명할 여지조차 없지요. 교회 안에 있는 자는 벌써 무교회주의자는 아닐 줄 압니다. 나는 내 교파의 상부에서 파송하는대로 순종하기로 하고 또 지금도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① "재령교회의 불영접(不迎接)을 비방한다"는 것은 흠을 잡으려는 편에 말거리가 된 듯도 합니다. 나는 그 교회를 비방하는데 본의가 있지 않고 오늘날 온 세상의 교회가 외형으로만 사람을 보는 것과 형식에는 능(能)하되 의(義)와 인(仁)에는 먼 것을 경계하여 거지라도 주님과 같이, 아이라도 선지자 같이 대접할 겸비에 들어가서 진실로 의와 인에 움직이어 살기를 바래서 일례를 드는데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② 사리원 자매들의 무고(無告) 평양 집회와 서신 왕복에 관하여는 잘 알 수 없고.

   ③ 소등(消燈) 기도. 이는 큰 문제될 것 없지요. 무교회주의자는 소등 기도 하나요? 대게 강설을 마치고 은혜에 대하여 간절성이 없는 자는 다 가게 되고 특별히 열의 있는 이가 남아 있어 개인이 가도할 때에 흔히 그러하였던 것인데, 그것은 기도 자리에 남아 있는 자 중에는 체면상 돌아갈 수 없어서 앉아서 시간이나 채우려고 하는 자가 있었는바, 그들은 그냥 꼿꼿이 앉아서 남의 기도하는 모양만 보고 또는 이야기하고 기도하는 태도에 대하여 비평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 있었음에 그들을 위하여 차라리 그 눈에 아무것도 볼 수 없어지면 혹 눈을 감고 기도를 하게 될까 하는 바람에서 그리하였고, 또는 연약한 자들은 옆에서 사람이 보고 이야기하는데 끌려서 용감스럽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 같은 때가 많이 있었음에, 저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하여 그리하였고, 또 나는 나의 경험상 어두운 가운데 나가서 늘 기도하는데, 그 어떠한 기괴한 공포와 싸우다가 이를 이기는 성령의 힘을 얻는 경험이 있었고, 또 눈감고 기도하는 데서 더욱 주님을 한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대게 일반이 그렇습니다. 소등은 눈뜨고 겉으로만 도는 자로 하여금 눈감고 암실에 들어가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론도 지금에 와서 이유를 말하라니까 이런 듯하다는 것이지, 그때는 그저 즉각적 어떤 움직임에 따라서 그리했던 것밖에 아무 것도 없으며 무슨 계획적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문제가 아니 됩니다. 그러나 소등 기도 한다고 해서 무교회주의라고 하는 그 미련함에는 일소(一笑)와 일루(一淚)가 없지 못합니다.

   ④ 교직(敎職) 공격이라. 아, 나는 개인적으로 겸비하여 저희에게 배울 바를 찾고 그들의 수고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주의 의편(義便)에 있어서는 진리의 칼로 심판치 아니치 못할 것이니, 이는 나의 일이 아니요, 주님의 일임으로써외다. 죄와 회개라는 말까지도 싫어하는 현대이니 책망을 달게 받을 줄 아는 겸비가 어디 있으리요. 오, 교만한 시대여.

   ⑤ <성서조선>지. 글쎄 그것을 선전이라 할까. 그들이야 흠 잡으려니까 그러겠지, 그것이 어떻게 되어 내 손에 들어온 것이기에. 나는 그것에 절대 가치를 인정하여 선전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라"는 부탁과 함께 2~3청년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몰상식하여 또는 편협하여 어떤 새 것이 올 때 그냥 무턱대로 유혹을 받을 그런 자에게가 아니요, 소화기가 웬만한 가로 인정한 자에게이었으며 조선복음운동에 있어서 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는 그것을 참고해보라고 한 것이었고 또 김경하 목사는 이해성이 있을 줄 알고 그에게 한 권 주었습니다.

   인형! 나는 별 것 다 봅니다. 무교회지도 보고, 순복음지도 보고, 장로회지도 보고, 감리회지도 보고, 사회주의지도 보고 별 것 다 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본다고 그 주의자는 아니올시다. 나는 어떤 때 형제에게는 불경 좀 보기를 권하고, 또 어떤 교역자에게는 사회주의지를 좀 보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런 때 황해노회원 중 어떤 분이 있었던들 나를 불교신자로, 사회주의자로 인정치 아니치 못했겠지요.

   인형! 나는 이 말도 인형에게 이미 말했고 앞으로는 일절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세상 임금이 오나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다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내가 그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을 나타내어 족하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이제 다시 기억하고 그리 되기를 바랄 뿐이올시다.

   나는 누구누구 해야 세상 사람에게서는 그의 전체를 부인(否認)할 것도 찾지 못하는 자이기 원합니다. 취사(取捨)의 일을 주님께 의탁한 나는 무엇에나 다 접근합니다. 나를 기를 수 있어 취하고 나를 기를 수 없어 나는 버립니다.

   나는 창기에게서도 배움이 있는 자요, 난봉에게서나, 아이에게서나, 무식한 자에게서나, 불교인에게서나, 무교회주의자에게서나, 누구에서든지 다 배울 바를 찾는 자이외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어떤 때 저희의 어떤 점보다 못한 것을 내 속에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겸손히 저희에게서 이를 배우지 아니치 못합니다. 나는 남을 가르칠 자가 아니요, 배울 자이니, 일생 학생심을 가지고 배워 마땅한 자입니다. '선악이 개오사(皆悟師)라.' 모든 것이 다 나의 스승이 되어있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고, 즉 이론하지 않고 그냥 살렵니다. 말할 자가 아니고 사는 자가 되어 최대의 축복을 느낄 따름입니다. 진리는 말할바 아니요, 살 바, 장소임을 나는 압니다. 종교는 설교에 있지 않고 삶에 있지 않습니까. 인형, 우리는 삶에 거합시다. 설교, 문서 다 좋지만, 그 뒤에 우리의 삶이 없으면 이는 무익한 것이 될 것이외다. 우리 삶에서 이 모든 것이 나오게 합시다.

   오늘 경상도서 돌아왔소이다. 내일은 충복 진천에. 닭이 벌써 울었는데 피곤한 줄 모르고.

 

10월 [20일]

 

   시점에 대해서 

   이용도가 황해노회의 금족령 소식을 접한 것은 10월 20일 이전의 어느 날 김인서의 편지로부터였다. 그럼 황해노회의 금족령은 이즈음 나온 걸까?

   박용규 교수는 "1931년 8월 12일 장로교 황해노회는 이용도의 금족령을 결정했"다고 한다. 또한 황해노회록에는, "1931년 여름 제40회 노회가 개회되어 은혜 중에 회무를 처리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 황해노회가 금족령을 내리는 시점은 1931년 "여름"이요 문제가 없는 한은 "8월 12일"이 된다.

   그럼 이 '시점'이 던지는 함의를 생각해보자. 8월 12일은 무슨 날이었는가? 이용도가 황해노회 소속 은율교회에서 부흥회를 열던 때였다. 1년 전부터 요청되었던 이 집회는 은율 인근의 각지에서, 심지어 1,600리를 와서 참석할 정도로 기대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모신 부흥사가 복음을 외치고 있는 동안 어느 사람들은 그 부흥사를 추방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외에도 '8월 12일'은 생각할 거리를 적어도 두 가지 더 던진다. 먼저, 박용규의 말대로(8월 12일)라면 황해노회가 이용도를 무교회주의자로 결의하는 '바로 그날' 이용도는 일기를 이렇게 썼다.


   오늘날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참으로 비교도 되지 않는다. 교회는 다 썩었다고 교회의 출입을 거절하는 자들은 예수의 이 태도를(규례대로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서 그대로 다 지키시는 태도를 ㅡ 편주) 어떻게 보는가.

 

   이용도는 예수님의 판단과 사심을 기준으로 삼아 자기의 판단과 삶의 길을 정한다. '이용도는 무교회주의자다'라고 한 바로 그날 이용도 목사는 무교회적 행태를 비판하니 이거 어찌 되는 건가?

   다음으로, 은율 집회의 내용을 보면 황해노회의 금족령이 몹시 부끄러운 표정을 짓게 된다.


   영의 힘이 좀 더 온 듯. 주님의 특은(特恩)을 감사하였다.

   오늘의 성령은 큰 불로써 역사하심을 감사하옵나이다. 근 100명이 철야기도하다.


   황해도 은율 집회는 "주님의 특은"이 내렸고, 성령께서 "큰 불로써 역사"하셨으며, 주일 밤에는 "근 100명이 철야기도"할 정도로 은혜와 능력이 충만했던 부흥회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때 황해노회는 이용도를 오지 못하게 하자는 결의를 내린 것인가? 이러한 '시점'이 주는 의미는 거대하고 두려운 것이다.

   도의와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너무나 유명해서 일 년 전부터 초청해야 했었고, 너무나 사모해서 은율은 물론 인근의 송화, 신천, 장연, 심지어 함경남도로부터 1,600리를 따라와 참석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의 대부흥사를 10개월 만에 모셔서,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집회를 갖고 있는 동안 커튼의 뒤쪽에서는 지도자들이 모여 일개 교회도 아니고 일개 노회의 금족령을 쓰고 있다? 지금 그 부흥사는 땀과 피를 쏟고 있고, 성도들은 회개와 감격의 눈물을 쏟고 있는데?

   황해노회 소속 은율교회가 이용도에게 부흥회를 부탁해놓고서, 다른 황해노회원들은 모여서 이용도를 일절 발 들이지 못하게 하기로 결의한 것이라면, 이 잔악함에 가슴 치지 않을 자 누군가.

   나는, '황해노회가 8월 12일에 열렸다' 함이 잘못된 정보이기를 바란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그렇지 않고 정말 8월 12일에 황해노회가 이용도에게 금족령을 내린 것이라면 누가 이것을 '기독교'라 부르겠는가?

   노회가 열린 정확한 날짜를 알고자 예장합동 황해노회에 전화로 문의한 결과(노희록 열람은 회원만 가능하다고 하여), 정확한 날짜는 없고 "1931년 여름"으로만 되어 있고 이용도와 관련되는 내용은 당시 노회록에 기록된 게 없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렇다면, 황해노회는 다섯 근거로 이용도를 무교회주의자로 몰았는데 이를 어떤 이유에서건 역사적 기록으로는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차분히 생각해볼 일이다. 문서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공식 기록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그 주장이 효력을 가질 수 있는가? 즉 이용도 관련 내용이 1931년 여름 황해노회록에는 쓰여 있지도 않다면, 황해노회가 1931년 여름 '이용도는 무교회주의자다'라고 결의했다는 것은 전혀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 오늘날까지 1931년 황해노회의 결의를 내세워 이용도를 비판한 사람들은 실상은 '속았던' 이들이 되고, 동시에 한국교회와 독자들을 '속였던' 이들이 된다.

   황해노회가 이용도에게 금족령을 내린 사건은 표면상으로 이용도가 문제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황해노회 지도부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다. 1931년 여름 황해노회가 이용도 금족령을 '실제로 결의'하여 효력을 발생시킨 뒤 기록에는 남겨두지 않았으니, 그 꿍꿍이야말로 깊은 타락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법률용어로 치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완전범죄'를 닮은꼴이요, 그렇다면 이 결의에 정통성을 부여해 오늘까지 내세우는 이들은 공개적 공범자가 되는 셈이 아닌가.

   정리하면, 1931년 여름 황해노회는 은율 집회 중에, 혹은 이후에(아마도 이후에, 제발 이후에) 이용도를 황해도 내 장로교회에는 초청하지 말라고 결의한다. 황해도 출신이요, 황해도 동지들도 많은 이용도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다가(동지들도 모르다가),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평양 김인서 장로를 통해 듣게 된다. 노회의 결정처럼 영향력 있는 결의가 그 당사자에게 두 달씩이나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노회가 떳떳하지 못하게 이 일을 진행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렇게 중요한 결의를 공식 회의록에 남기지는 않은 것은 이 주장이 명분이 없어 글로 남길 자신은 없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기 목적을 기어코 관철시켰던, 한마디로 '먹튀'였던 것이다.


   주장에 대해서

   시점의 함의를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그 내용을 보자.

   김인서의 편지에 의하면, 1931년 여름 황해노회가 '이용도는 교회를 혼란케 하는 무교회주의자이니 노회 경내에 들이지 말자'고 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 재령교회를 비방한다.

   ② 여신도들과 서신 거래를 자주한다.

   ③ 불을 끄고 기도를 한다.

   ④ 교역자를 공격한다.

   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선전한다.


   무교회주의자가 무엇인지 정의함 없이, 일단 무교회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해버리면 그게 '나쁜 무엇'일 거란 느낌이 든다. 건물을 가진 기성교회는 불필요하다거나 멸해야 한다는 무리들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무교회주의자로 몰렸던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을 무교회주의자라고 몰아세웠던 이들은 그들이 그렇게 주장을 했다고 혹은 했을 거라고 주장하였다면, 이들'이' 말하는, 아니 이들'만' 말하는 '무교회주의자'란 것은 정작 누가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황해노회는 이용도가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선전하기에 무교회주의자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용도의 말을 들으면 '선전한다'라는 단어가 상당히 선정적임을 알 수 있다.


   글쎄 그것을 선전이라 할까. 그들이야 흠 잡으려니까 그러겠지 …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라는 부탁과 함께 2~3청년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 조선복음운동에 있어서 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는 그것을 참고해보라고 한 것이었고


​   이용도가 더욱 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가복음 4장으로 말씀을 전했던 8월 12일 은율 집회를 마친 뒤 쓴 일기의 내용이 황해노회의 결정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앞서 보았다.

   그는 김인서에게 분명하게 밝히기를.


   나의 무교회주의설에 있어 나는 변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변명할 여지조차 없지요. 교회 안에 있는 자는 벌써 무교회주의자는 아닐 줄 압니다. 나는 내 교파의 상부에서 파송하는 대로 순종하기로 하고 또 지금도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너무 말이 되지 않으니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한마디로 황해노회는 생사람을 잡았다. 무모하게 잡았다. 그러고도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교 신앙이란 이런 것이었는가.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이용도가 만난 적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1931년 7월 20일 월요일 김교신은 일기에, "오늘 처음으로 이용도 목사의 전화를 받아 초대면(初對面)이었으나 우리는 철편(鐵片)이 자석(磁石)에 끌리듯이 기약치 못하였던 시(時)와 소(所)에서 모여 기도회. 형제들의 회개와 찬송이 심각하였다." 즉 1931년 7월 말에 이용도는 김교신을 "초대면"했다. 그러다가 황해노회가 이용도를 무교회주의자라고 지목한 것은 8월 12일 혹은 집회 이후이니,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용도가 얼마나 활발하고도 뚜렷하게 무교회주의자 행세(?)를 했기에 노회는 그가 무교회주의자라며 몰래 설레발 놓은 걸까?

   이는 노회가 이용도 목사를 차단하고자 구실을 찾기 위해 만들어 낸 하나의 빌미밖에 되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로 결론 지을 수 있다.

   변종호는 황해노회의 결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난 봄 재령교회의 집회에서 너무도 굉장한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가 크게 내릴 때 일부 사람들은 시기의 눈으로 보았으니 그것은 교회에 충실치 못한 무능에 속하는 교직자들이었다. 남들은 은혜에 푹 빠져 감격의 생활을 하는 동안 일부의 사람들은 감찰 행동을 취하여 트집을 잡을 연구를 항상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 12일부터 은율교회에서 1주간 집회를 할 때에는 좀더 감찰의 눈을 날카롭게 하여 별 것을 다 꼬집어보고 들추어보는 것이었다. 그리해 가지고 꾸며낸 것이 황해노회의 이용도 매장의 결의이었다.


   변종호의 기록도 황해노회의 결정이 이전부터 있다가 "8월 12일" 은율 집회 때에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이 집회를 통해 "별 것을 다 꼬집어 보고 들추어 보다가" 나오게 된 것임을 지지하고 있다.

   "트집을 잡을 연구"가 폭발하는 개연성 있는 사건이 8월 18일에 일었던 변론일 수도 있다. 이용도는 집회 마지막 날, "교파의 이름으로나 어떠한 의식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면서, "장로교인 중에서도 천주교인 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트집자들은 이때다 하면서, "천주교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로 갈 사람이 있겠으니 문제라"며 들고일어났던 것일 수 있다. 트집 잡으려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교파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두고 그렇게까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까지 정황을 정리할 때, 이용도를 시기하고 싫어하는 몇몇 주도적 인물들이 트집을 잡아 사건을 과장하여 이용도를 들이지 않기로 무리하여 결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이용도가 좀 조심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시 문화 아래 교권을 비판하거나 여성도들과 서신을 주고받은 것은 시대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상황이란 '특수'와 함께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에 대해서도 함께 논해야 할 것이다. 먼저, 이용도가 여신도들과 서신 왕래를 한 것은, 출판된 [서간집]의 내용으로 볼때 참으로 순수한 성도간의 교제요 경건한 목회 서신이었다.

   그런데 여성에게는 그런 편지를 보내선 안 된다고 비난한다면,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사마리아라는 '잘못된 땅'에서 여인이라는 '잘못된 사람'과 대화를 하여 그러한 통속을 깨뜨리신 '잘못'부터 비난하는 것이 어떤가.

   1931년 황해노회 금족령의 결의 내막을 모르고 이용도 비판에 이번 사건을 내세우는 사람은 무지하다고 쳐도, 전체적 맥락을 알고도 이 결의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사람은 상식과 진실을 완고한 고집으로 외면하는 것으로, 그는 과거사를 인정할 줄 모르는 일본의 어느 극우ㅡ우리가 볼 때는 '저가 인간인가?' 싶은​ㅡ정치인과 다를 게 무에랴?


   그 이후

   황해노회의 금족령은 이용도에게 실로 큰 사건이었다. 그것은 공개적 적의였다. 공개적이었음에도 노회는 두 달간 감추고 있었고, 후에 김인서를 통해서 알게 되는 참으로 알쏭달쏭한 적의였다.

   이용도는 편지에서 가볍게, '웃음이 나온다'고 했지만, 이 공격으로 인한 아픔이 이후 그를 늘 따라다닐 것이다. 그는 황해노회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할 명분과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입을 막았다. 대신 '시무언'하고 기도의 입을 열었다. 예수님처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허였음이여"(사53:7)

   여기서 '버림받음의 아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도를 우러러보았다. 누가 보아도 그럴만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주목은 내 거야"라고 하는 아이들은 뭉쳐서 이용도를 쫓아냈다. 이용도는 '이게 무슨 일인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쫓아내는 그들의 손목을 비틀어 꺾지 않았다. 그 뛰어난 언변과 예리한 논리로 묵사발을 만들어줄 수 있었음에도, 돌로 떡 만들기를 거절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버럼받지 않고자 상처받지 않고자 더 좋은 옷, 더 많은 정보, 더 높은 학력, 더 강한 무엇 등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무장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나를 보아줄 것이니.

   그러나 독자시여, 이용도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에게 받는 버림을 무서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소서.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만 버림을 받지 않으면 되겠나이다. 외롭고 겸손한 자를 가까이하시는 하나님이신지라. 이용도가 외쳤던 것처럼 우리는 겸비한 자 배우는 학생이 되면 족하리이다.

   우리보다 먼저 상처받고 버림받았던 주 예수님과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소서. 그럼 우리도 주 예수를 위해 상처 받고 버림받음을 견딜 수 있을 것이요. 이용도처럼 그럼에도 복수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욕 당함을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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