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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1931년 12월 평양 산정현교회 부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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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11-29 11:12 조회2,6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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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의 예정대로 한다면 명촌집회를 마친 후 곧 상경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산정현교회의 직원과 신도 모두 한 덩이가 되어 열렬히 간청하여 그 교회에 닷새 동안 서기로 하였다. 날이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차츰 더 모이더니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모인 곳이 좁아서 벽을 밀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뜨겁게 달아 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산정현의 닷새 동안은 더욱더 높은 열변이었고 더욱 힘찬 신적(神的) 활동이었다. 그 넓은 예배당이 빽빽이 들어 차고 마당에까지 사람으로 가득하게 찬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었다. 산정현교회에서의 가장 힘차고 인상 깊은 설교는 마지막 날 저녁 시간이었다. 이때만큼 많은 사람을 울린 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일생 동안 조소와 멸시, 천대와 구박을 받으며 사시던 모습을 2시간 동안이나 얘기하시다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십자가에 달리시는 광경을 눈물로 설명하셨다. 이윽고 운명하시는 장면에서는 그 바짝 마른 몸을 쥐어짜듯, 반쯤 쉰 힘든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마침내 땀에 번득이는 얼굴을 하늘을 향해 들더니 그 손을 하늘을 향해 휘두르며 울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에ㅡㄹ리 에ㅡㄹ리 라마 사박다니!"

   이때 모여 앉은 수천 명의 무리는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아픔을 느끼며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 기막히고 처절한 광경을 도저히 눈을 들어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높아 갔다.


   이날 밤은 싸락눈이 엷게 땅을 덮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예배당을 나선 목사님의 발걸음은 정거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걸어가는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목사님의 숙소였던 남산여관 앞길에 이르렀을 때는 많은 사람으로 불어났다. 그날 밤 미끄러운 눈길을 따라 나온 남녀 신자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거장에까지 따라 나와 목사님과 헤어지는 것을 애달파하는 애끊는 광경도 잊혀지지 않는다.

   산정현교회에서는 목사님께 침대권을 사드렸다. 그러나 목사님은 침대에 들지 않고 한사코 내 곁에 와서 앉으셨다. 자꾸 침대차에 가셔서 주무시라고 권했으나 사양하셨다.

   "아, 글쎄 걱정 말아요. 침대차에 혼자 가서 누워있는 것보다는 변 선생과 함께 앉았다, 누웠다 하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르겠어."

   새벽 7시에 경성역에서 내린 우리가 현저동에 이르렀을 때는 8시가 넘어서였다. 그런데 목사님은 9시부터 또 동대문교회의 부흥회를 시작해야 하셨다. 집에 들어 앉아보지도 못하고 선 걸음으로 그대로 또 떠나신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은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변종호는 [전기]에서 산정현 집회에 대해 덧붙이기를,


   산정현교회는 첫날 첫 시간부터 초만원이었다. 집회 시간 30분 전에 가면 벌써 사람으로 문이 꼭 닫혀 회당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한 시간쯤 전에 가서 겨우 뚫고 들어가면 앞뒤에서 조이는 바람에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 곤란과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평양의 산정현교회라면 지식계급의 신자와 생활이 유족한 신자가 많기로 유명한 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으니 평양 시내의 지식인, 신학생, 숭실전문 학생들 중의 유력한 정수분자가 다 모였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1주일 동안의 집회는 사실상 평안남도의 각 교회를 1년 동안 순회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5일 동안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땀을 흘리며 더 결사적으로 외쳤으니 그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이때에 이렇게 산정현교회에 뿌린 이용도 목사의 피땀의 씨가 옥토에 떨어져 잘 자라난 것을 알 수 있었으니, 그 후로 산정현교회는 평양에서 가장 은혜스럽고, 건실하고, 굳센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부흥회 당시에 담임목사는 강규찬 목사님이시었다. 그 늙으신 몸이 그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격하여 기뻐하시던 그 모습도 또한 잊혀지지 않는 바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송창근 목사가 시무하였고, 그 다음에 오신 이가 전세계에 알려진 주기철(朱基徹) 목사님이시었다.

   주 목사님의 순교는 물론 목사님 자신의 순교적 신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사모님 오정모 씨, 산정현교회의 제직, 든든하고 강력한 교인 전체의 필승과 불패의 결사적인 뒷받침이 합동하여 크게 역사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산정현교회의 배인숙 전도사가 가끔 찾아와서 울면서 그간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줄 때마다 나는 항상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용도 목사님의 모습을 연상하였고, 주 목사님의 순교의 승리의 소식[1944년 4월 21일]을 들은 후로는 산정현교회에서 그때 그 닷새 동안에 그 땀과 그 눈물을 흘리면서 외치고, 몸부림치던 용도 목사님의 모습과 다년간의 악형과 옥고에 뼈만 남으신 몸이 평양 감옥의 천정을 보며 고요히 영광스럽게 눈을 감으시는 주 목사님을 연상하나니 이용도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은 어느 점에서인가 단단히 연결된 굵은 선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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