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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예수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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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1-15 00:00 조회2,6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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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형제들에게

   덕은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으나 (德不孤라 必有隣이어니와)

   진리는 외롭지 않을 수 없으니 이웃도 허락치 않는다 (眞理는 莫不孤라 隣不許로구나).


   덕은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지 않고 다만 시제(施濟)하고 선대(善待)함에 그 생명이 있으나 진리는 선악정사(善惡正邪)를 가르지 아니치 못하나니 대체로 이른바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이 운동하여 이를 심판함으로 그 본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른바 보혜사 곧 진리의 신이 오면 죄와 의와 심판으로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함과 같다.

   진리의 일은 시제선대(施濟善待)가 아니라 심판이었느니라. 고로 진리는 이웃도 이를 허락하지 않고 형제도 이를 용납하지 않으며 친구도 이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예수! 저는 한 때에는 이웃도 많았고 형제와 친구도 많았음을 네가 아느냐. 그러나 그 어느 때에는 이웃도 형제도 친구도 다 없어졌던 일도 네가 기억하느냐.

   사랑은 덕을 낳고 의는 진리를 내세우는 것이라. 예수가 사랑에 움직여졌을 때 거기에는 덕이 나타났다. 그래서 많은 무리는 덕을 보려고 이웃이 되어 모여 왔었다.

   그러나 예수가 의에 움직여졌을 때 거기에는 진리가 일하였으며 모든 무리들은 심판과 책망을 싫어하여 흩어지고 말았느니라.

   저희의 마음보와 행동은 여하간 그냥 주어 먹이고 칭찬만 하였더면 끝까지 좋아하였을 것을 저희들을 가르쳐 진리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심판을 내리고 책망을 가하였으매 나중에는 저를 미워하고 저버린 것이었다.


   아 이 얻어먹고 망할 백성들아!

   병고침을 받고도 다시 죽을 무리들아

   연설을 듣고 망하고

   기도를 하여 망하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망할 현대 신자들아,

   너희가 어느 때에나 진리의 속에 들어갈 것이냐!

   진리를 앎이 곧 영생임을 알지 못하였구나!

   사랑과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를 앎이 곧 영생이라 하심을 너희는 그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였구나!

   너희가 성신을 원하기는 하였다만 성신은 실상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하는 신이심을 알지 못하였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그의 일이 악함을 증거함이니라."

   오그리스도의 사람들아! 사람이 좋아함과 나빠함을 좇을게 아니라 다만 진리를 좇아라!

   "의 아닌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라." 이것이 곧 천적애(天的愛)의 일이니라. 지적애(地的愛)는 덮어놓고 시제선대(施濟善待)하여 저희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지만 천적애는 그 성질이 다르다. 물론 불의를 행하는 자까지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나 이는 저희가 감당키 어려워서 물리치고 가는 것이었느니라!

   "내가 여러 번 너희를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으려 하듯이 품으려고 했으나 그러나 너희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당시의 정지를 살필 수 있는가?

   천적애의 불의에 대한 시제는 심판과 책망이 그 최선의 것이었느니라. 불의한 자가 심판과 책망을 모르는 것보다 더 불행함이 없나니 저를 건지기 위하여는 곧 심판과 책망으로써 죄와 의를 알게 하여 영생에 들도록 함이 최선의 일이었느니라.

   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너희가 모든 시험을 만나거든 그 가운데서 인내와 소망을 배워 비로소 신앙의 완성을 볼 줄 알고 온전히 기쁘게 여길지니라.

   인내는 곧 신앙의 한 면(面)이니 인내가 없는 신앙은 곧 북데기(검불) 불과 같아서 한동안은 붙으나 곧 꺼지고 마느니라. 인내를 완전히 이루므로 그 신앙은 비로소 승리적 신앙이 될지니라.

   소망! 이도 또한 신앙의 일면이니 소망(기대, 바람) 없이 신앙은 설 수 없느니라. 소망이 있어 그 신앙은 빛을 발하게 되며 전진 향상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니라.

   우리의 신앙은 소망이 확립되고 인내가 완성될 때 비로소 생명 신앙이 되어 우리를 움직이느니라. 그런고로 생명 신앙은 환난과 시험 중에서 연단을 받아 소망의 확립을 보며 인내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니라. 따라서 부족이 없는 완전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생명신앙을 원하느냐? 그러면 시험이 올 때 온전히 이를 기뻐하라. 왜? 소망과 인내를 그 중에서야 완성할 수 있음으로.

   오형제들아! 너희에게 신앙이 있느냐.

   그러면 끝까지 참으라.

   끝까지 바라고 또 끝까지 기다리라.


   예수를 향하여 소망하고 예수를 인하여 인내하라. 네 소망과 인내가 다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움직이라. 만일 1초라도 예수에게서 떠나면 이는 어디인지 방향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신앙이니 곧 아무 소망도, 아무 인내도 있을 수 없는 형체만의 신앙일지니라! 이로써 어찌 우리의 영혼이 구원 얻기를 바랄 수 있으랴?


   예수다!

   우리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해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요

   자도 예수요 일하여도 예수다!

   그저 우리 생명의 초점은 예수뿐이다


   오 예수는 곧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요

   또 우리의 생명이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이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유익도 없게 되는 것이다


   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살지 못하옵니다.

   오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 우리의 길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행할 수 없습니다.

   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여!

   영원히 우리와 같이하여 주옵소서​.


4월 19일

 

 

   15일은 송창근의 편지를 받고 천국이었다. 17일은 김인서의 편지를 받고 지옥이었다. 그리고 19일, 평양의 형제들에게 신음하며 답장을 쓴다.

   덕(德)의 역할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베풀고 선하게 대해주는 것이나, 진리는 법관처럼 옳고 그름을 따져 좌우를 나누는 역할을 한다. 즉 자기의 허물을 감추고 싶은 인간들의 잘잘못이 갈린다. 사람은 덕과 은혜는 싫어할 리 없지만, 진리로 인한 책망과 심판은 좋아할 리 적다. 그리하여 진리를 외치는 자는 형제도 친구도 떠나가기 마련이다.

   이어지는 이용도의 시구(時句)는 진리 편에서의 대성대질이다.

 

아ㅡ 이 얻어먹고 망할 백성들아!

 

   덕은 좋아하지만 의는 배척하는 자들은, 덕을 얻어먹었을지라도 결국은 망할 것이다. 덕을 입었어도 의와 진리의 길로 가지 않기에 결국은 자멸의 길로 가는 것이니, 그 끝에 무엇이 있겠는가?

 

병고침을 받고도 다시 죽을 무리들아

 

   병 고침을 받았더라도 의와 진리의 책망은 거절함으로, 병고침이 무용지물이 된다. 의가 없으면 다시 죽음에 거하게 되나니.

 

연설을 듣고 망하고 / 기도를 하여 망하고 / 찬송을 부르면서도 망할 현대 신자들아

 

   설교도 듣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지만 결국 망한다. 할 건 다하지만 망한다. 달콤한 말은 듣고 따가운 말은 뱉기 때문이다. 사랑은 받고 의와 진리는 밀쳐내기 때문이다.

 

   사랑과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를 앎이 곧 영생이라 하심을 너희는 그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였구나.

 

   예수님은 사랑만이 다가 아니요 사랑과 함께 진리의 주님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한쪽만 받아들여서는 올바르게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를 앎이 없다면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이어서 이용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와(요7:7) 지금 자기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그의 일이 악함을 증거함이니라."

 

   1931년 여름 황해노회로 시작되어 1932년 봄 평양노회로 이어지는, 상식과 보편을 거스르고 각본이나 짜진 듯한 공회적 견제와 압박! 이용도가 버림받는 것은 교역자들의 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단에서 회개와 심판을 외친 것도 이유였다. 교권자들에게 회개란 매우 불편한 음성이었나니, 그 귀가 교만하기 때문이라.

   그럼 이용도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자기가 큰 인물로 보이고자 회개를 외쳤던 것인가?

 

   불의한 자가 심판과 책망을 모르는 것보다 더 불행함이 없나니 저를 건지기 위하여는 곧 심판과 책망으로써 죄와 의를 알게 하여 영생에 들도록 함이 최선의 일이었느니라.

 

   결국, 책망도 사랑이었다. 다만 다른 표현이었던 것 뿐이다. 눈물로 받아주고 구제해주는 덕의 사랑이 있고, 의와 진리의 회초리로 때려 악을 털어내는 책망의 사랑이 있다. 이용도는 강단 위에서는 책망이요 아래에서는 눈물이었으나, 둘은 동일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책망해야 했는가? 그냥 눈물로만은 되지 않았겠는가?

   눈물로 고쳐지는 병이 있고 책망으로 고쳐지는 병이 있다. 이용도는 죄인들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교권자들은 눈물로 들을 위인들이 아니었다.

   덕과 진리에 대하여 논한 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답한다. 신앙이란 모든 시험 속에서 "인내와 소망을 배워 비로소 신앙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환란을 역설적으로도 기쁘게 받아야 한다. 환란의 인내를 통해 믿음의 온전함을 이루게 된다는 진리는 역전의 소망이 되어준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그리하여 이용도는 형제들을 격려한다. 끝까지 참고, 끝까지 바라고, 끝까지 기다리고, 끝까지 예수를 향하여 소망하고, 끝까지 예수로 인하여, 예수 때문에, 인내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

   그는 야고보와 바울로부터 배운 진리의 언어와 정신을 고통 중에 부단히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고 있다.

   작년 황해노회로부터 공격을 받은 뒤 다시 큰 아픔을 겪는 이용도는 이번 시험에서도 적대자들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신세타령을 늘어놓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한 수의 시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 터져 나온 것인가를 생각하고 볼 때, 이는 발라드(ballad)가 아니라 최전방 정예병이 부르는 군가(war song)였으니, 예수를 위하여서만 살고 예수를 위하여서만 죽는 예수군가였던 것이다.

 

예수다!

우리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해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요

자도 예수요 일하여도 예수다!

그저 우리 생명의 초점은 예수뿐이다. 

 

15일은 천국

17일은 지옥

19일은,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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