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용서와 평화의 근거 > 365묵상집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365묵상집

주님은 용서와 평화의 근거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1-20 23:32 조회2,666회 댓글0건

본문

   김교순 권찰님,

   몸이 얼마나 부대끼시며 영이 얼마나 몰리시나이까?

   주 안에서 점점 깊이 들어 갈수록 핍박은 점점 더할 것임을 꺠닫는 동시에 핍박이 더할수록 은혜와 영광도 더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 중에서 예수의 정지를 더욱더 잘 깨달을 수 있는 것이올시다.


   허무한 세상이지요. ​​잘 믿으라고 하다가 저희들보다 잘 믿게 되면 그떄는 잡아 내리느라고 애쓰는 세상!

   기도하라고 권고하여 마지않더니 저희보다 좀더 기도한즉 이제는 기도 그만두라고 깎아 내리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신앙의 길을 걸어나가시려는 이 어이 곤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원래 사람을 따라감이 신앙이 아니요, 다만 주님만 따라나감! 이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신앙이었으니 주님만 보고 그를 따라가는 길에 실족하지 않도록 할 것이올시다.

   핍박을 받고 멸시를 받아도 저희들을 관용하며 나의 마음이 화평과 안위를 잃지 않는다면 이! 과연 주님으로 더불어 같이 있는 증거라 하겠사오나

   저희들을 원망하거나 또 나의 심중의 화평을 잃고 불안과 수치를 느낀다면 이는 주께서 떠나신 증거니 우리는 힘써 구하여 주를 심중에 영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멀어질수록 주님과는 가까워지나니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는 일이 오히려 복되지 아니하오리까!

   주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하나라도 땅에 떨어뜨리지 못할 것이요, 머리카락 하나라도 검고 희게 못하는 것이니 든든히 믿고 돌진할 것입니다.

4월 20일

이용도 배(拜)

 

 

   김예진에게 편지를 보내던 그날 이용도는 평양 김교순에게도 편지를 썼다. 두 서신 모두 그들이 받는 외적 핍박과 그들이 가져야 할 내적 반응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오늘 편지를 통하여, 앞선 궁금증이 조금 풀린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것이 어떻게 주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런 중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더욱더 잘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핍박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더 깊게 알게 해주는 비길 데 없는 특별한 여행이다. 주님은 거절, 누명, 핍박 등을 고루고루 당하셨던 분이시니, 주께서 받으셨던 고난을 당해보는 것은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길이 된다. 주를 따르다 받는 욕과 손가락질과 매질은 예수님에 대한 많은 앎을 주고, 그 앎은 주님과의 더 깊은 만남의 문을 열며, 그 만남은 주님의 성품과 영광을 더 깊게 체험하게 해주니, 성도가 겪는 핍박과 억울함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자만과 방심은 그러나 금물! 핍박으로 주님을 포기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용도는 말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핍박 중에 주님의 다스리심을 기억하라고, 주님 허락 없이 참새 하나도 머리카락 하나도 어찌되지 못하는 그 주님을 든든히 믿으라고. 그리고 이 믿음 위에서 오히려 돌진하라고!

   그러다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혹 그것이 버림받음이라도, 오히려 복됨을 알라. 주님과는 더없이 가까운 상태에 있으니. "세상과 멀어질수록 주님과는 가까워지나니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는 일이 오히려 복되지 아니하오리까."

   이용도, 그는 누구보다 그 자신이 버림당하는 사람이었다. 이용도의 이 고백이 참되지 않았다면, 즉 그가 실은 주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주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였다면, 그는 세상에서 버림당하지 않고자 바동바동댔을 것이다. "네가 진정 세상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심각한 표정이 아닌, '버림받음 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찬송하는 하루하루'를 통해서 대답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핍박이란 단어는 멀게만 느껴진다. 경험으로 만져보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들어본 단어, 뜻 모르는 한자어처럼 되었다. 왜 그럴까? 왜 이전 세대처럼 예수를 믿음으로 당하는 고통이 없는 걸까? 우리의 신앙이 '일요일용'이 되었기 때문일까? 세상과의 신앙적 부딪침이 없기 때문일까? 자기 먹고 사는 것을 숭배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고생을 사들이는 수밖에…….

 

 

"젊은 날에는 젊음을 아껴 주님 만나는 고생을 사게 하소서. 젊지 않다는 나이에 진입했다면 그 위치에서만 할 수 있는 힘을 바쳐 고생을 사게 하소서. 더 이상 기력이 솟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면 이제까지 쌓아둔 지혜의 보화를 널리 나누어주는데 고생하게 하소서.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