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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안주에 떨어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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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4-20 11:53 조회2,6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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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빈 씨에게

   순회 일정

   10. 3~10. 9 안주읍

   10. 13~10. 19 운산 북진 최창신(崔昌信) 목사

   10. 23~10. 28 해주 전희철(田熙哲) 목사

   10. 31~11. 6 자교교회

   11. 10~11. 16 수안읍(遂安邑)

   11. 20~11. 26 월계리(月溪里) (경성시외)

   11. 28~12. 2 중앙전도관

   12. 4~12. 10 왕십리(往十里)

   12. 11~12. 18 원익상 목사 구역

   12. 19~12. 25 의정부(議政府)​

   12. 28~1. 6 홍천읍(洪川邑)교회


   안주읍 집회 성화(聖火) 강림. 시무언 가부론자(可否論者) 대립하여 세력을 쓰던 중에 소자를 세워 주 승리하셨으니 손을 들어 만세, 만세. 2일을 더 연기하여 집회하였습니다. 개천읍 황구학 목사도 하루와서 참석하더니 돌아가서 장로와 청년들을 데리고 나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계속됨)

 

 

   지난 9월 안주 주선행 집사의 편지에서는 안주 동 · 서 교회가 이용도 초청을 확실히 결정했다고 했는데, 10월에 '가부론'이 일어난 것은 아마도 반대자들이 다시 안주교회의 제직들을 충동질한 것 같다. 그러나 집회 중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심에 공작자들은 항복하고 이틀간 연장 집회하는 통쾌한 승리가 있었다. 이호빈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부분을 읽기 전에 안주 집회(1932. 10. 3 ~ 10. 11) 간증을 들어보자.

 

   1932년 초이었다. 평양방면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이용도 목사라는 이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며 교계에 큰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때에 평양성경학교에 나갔던 주선행 씨가 돌아왔는데 생활 태도가 아주 달라지고 기도하는 열과 방식까지도 우리에게 이상한 자극을 주었다. 그런데 주 씨의 말도 역시 이 이용도 목사를 극구 칭찬하며 우리 안주에도 이 목사님을 한번 모셔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름에 모이는 청년수양회 집회 인도를 해주시기를 용도 목사님께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미 예정한 여러 곳 떄문에 못 오시게 되었다.

   이에 주 씨 등 우리 네 사람은 이 목사님이 오실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계속하는 한편 동서 두 교회의 제직회에서 이 목사 청빙을 공식으로 가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사들 사이에서 시비가 생기고 방해운동이 일어나 당회에서는 초청부결이 되어버렸다. 서부교회의 모 씨가 주동이 되어 가지고 이런 결과까지 내게 된 것이었다.

   이에 우리의 가슴을 끓었고 우리 중심은 이 목사를 향하여 더욱 간절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몇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교회 제직 중의 일부는 지성과 뜨거운 눈물로써 용도 목사를 초청하자는 주장을 고집하였다. 주님의 뜻을 막을자가 어디 있으리요. 서부교회 제직회는 다시 호전하여 전원일치로 이 목사 초청을 가결하였다. 서부교회에서 이렇게 확정되니 동부교회에서도 합류 일치되었다.

   동부교회 O 목사님이 이 목사님 청빙에 교섭자가 되었다. 경성지방 김종우 감리사에게 수처 간원의 편지를 내고 현저동 목사님 본댁으로 수차 편지를 냈으나, 2개월 동안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은혜에 갈급한 여러 신자, 특히 청년들은 지지한 목사의 초청에 만족할 수가 없다고 하여 다시 교섭위원으로 나를 뽑았다. 이때에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중대한 책임감이 내 어깨에 지워짐에 심히 두려웠다. 밤낮으로 지성을 다하여 간절한 애원의 기도를 드리면서, 다른 편으로 목적 관철을 위한 실천에 결사 활동하였다. 감리사에게와 목사님의 본댁과 광희문교회 등 여러 곳으로 동시에 애원 절원의 초청 편지를 냈다, 그랬더니, 광희문교회에서 한 장 엽서가 왔다. 우리는 그 엽서를 붙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 광희문교회에서 집회 중입니다. 다른 곳에 이미 작정된 곳이 너무 많아 참 큰일이올시다. 그러나 은혜를 갈급해 하는 정도 여하에 따라서 나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끌려갈 수가 있습니다.


   이에 나는 곧 여비를 보내면서 어느 날 경에 와 달라고 또 편지를 하였다. 전보료 2원 이상을 들여 장문의 전보를 수 차례나 쳐 보내는 동안에 이 목사님은 안주에 오시게 되었다. 우리가 청하기는 10여 일 후에 와 달라고 했는데 목사님의 회답은 4~5일 후에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오시는 날 내가 신안주역까지 출영하였다. 무명주의를 입으셨는데 그 동정까지 회색이었다. 파나마 모자를 푹 눌러 쓴 목사님은 그리 큰 소리칠 위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목사님과 함께 안주읍으로 오는 동안에 내 심중에 감격이 컸다. 지나간 몇 달 동안에 제직과 싸우며 교회에 애걸하며 목사님을 모셔오기 위해서 애태우고 고생한 생각을 하며 곁에 앉으신 목사님을 쳐다보니 감개무량하여 눈물이 자연히 흐르는 것이었다.

   1932년 10월 3일 저녁부터 집회가 시작되었다.

   "집회의 일체는 다 나에게 맡기시오. 첫 종소리가 나서 예배당에 오시거든 다른 이야기나 생각은 하지 말고 찬송을 부르도록 하십시오."

   그러시더니 손을 들며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를 꺼내시어 일동이 부르고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첫 번 듣는 이 기도가 우선 우리의 귀에 맛이 다르게 들렸다. 그 유창한 말씨, 열렬한 어세 등 합하고 조화되어 아름다운 시를 외우는 듯, 고운 독창을 듣는 듯이 기도가 약 1시간 계속되었다. 그러고 나시더니 설교는 몇 마디 안 하시고는 "나를 믿지 말고 각각 중심으로 기도하는 중에 은혜 받으라"고 하시며 통성기도를 시키시는 것이었다. 말하자만 첫날 밤은 듣는 바와 같이 굉장하지는 못하여 조금 불만으로 느껴졌다.

   이튿날 밤이 되었다. 이 밤에야 본격적인 후흥회가 열렸다고 생각된다. 설교를 한창 내리 답새기다가 만인의 가슴이 바짝바짝 타 들어왔을 때 목사님은 손을 높이 들며 찬송을 꺼내셨다. 열광된 청중이 화답하여 한 절을 다 같이 부르면 다시 있는 열을 다 내어 찬송의 다음 절을 시작으로 해석 설명하시며 자기의 주장과 소회(所懷)를 퍼붓다가 말이 제3절을 향하여 가경(佳境)으로 들어가면, 또 손을 번쩍 들며 제3절을 발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하기를 분명히 4시간 이상 해내었다. 이날 저녁부터 일반의 가슴은 시원해지고 끓던 가슴은 쾌함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밤에는 요한복음 5장에서 끝장까지 성경 낭독만 하였는데 그 성경 낭독이 어찌도 사람을 감동시키고 울리는지, 그런 역사는 처음 보았다. 주일 오후에는 요한 13장을 보고, 십자가 아래 세 가지 사람들의 ㅡ 막달라 마리아, 못을 박는 자, 따라간 자 ㅡ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데 그 시적 형용과 정적 표현은 참으로 언어 이상의 미술이요, 미술 이상의 매혹(魅惑 )이었다. 이렇게 되니 이 목사님 모셔 오는데 반대했던 사람들도 전부 거꾸러지게 되었다. 그 굉장한 역사가 8일간을 계속하다 목사님이 가실 날이 왔다.

 

   교회에서는 지켜오는 버릇대로 전별회를 한다고 몇 십전씩 돈을 모아 잔치 준비를 해놓았는데, 마지막 날 저녁에 다 함께 기도하자고 통성기도를 시켜놓고서 자기는 일찍 기도를 끝낸 후 몇 사람밖에 모르는 중에 안주를 떠나시고 말았다. 이렇게 몰래 떠났으나 그 밤에 신안주역까지 50리 길을 따라 온 자가 30여 명은 되었다.

   이때에 안주에서의 집회광경에는 누구나 다 놀랐다. 밤 7시부터 예배를 시작하여 설교를 3~4시간씩 하고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수백 명의 신자에게 안수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강대상 아래 엎드려서 기도로 밤을 완전히 새우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오전공부, 또 계속하여 오후공부. 이리하여 안주집회 8일간은 문자 그대로의 불면(不眠), 불휴(不休)이었다. 그렇게 약해 보이는 몸이 그렇게 철석보다 더 강하고 단단함에는 누구나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목사님 오시기 전까지의 우리 교회는 참으로 산판적(算板的)이요, 상회사(商會社)적이었다. 그래서 단돈 10전의 비용도 여러 가지 수속을 지내고서야 판출하였고 단 1전을 쓰는데도 여러 계원과의 상의와 결의가 있어야 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 목사님이 오신 때의 비용은 누가 어떻게 내어서 어떻게 썼는지 모른다. 사경 비용이 얼마 들었다고 문제도 말도 없었고 북진행 여비, 평양행 여비 등 불소한 경비가 났지만 어떻게 들어왔다가 어떻게 나갔는지 아는 자도 없고 물어보는 자도 없었다.

   동서 두 교회 사이에 무슨 담인지가 막히어 사사건건에 격의(隔意)가 있고 합일이 되지 못했는데, 목사님이 왔다 가신 후부터 양당합일(兩黨合一), 동서무별(東西無別)이 된 것이 큰 결실 중의 하나요, 기도란 것은 남이 듣지 못하게 골방에서만 하는 것으로 알던 것이 안주성을 울리고 안주의 산야에서 밤낮으로 크게 들려오게 된 것이 또한 큰 소득이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슬슬 신자의 비위를 맞우면서 속으로는 저 볼장만 꿍꿍이로 보던 교역자들이 정말 주님 앞에 탁 꺼꾸러진 것 또한 뛰어난 성경의 하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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