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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심판하기를 거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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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6-05 16:28 조회2,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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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서 씨에게

   무모무지(無謀無知)를 나에게서 발견한 형의 정견(正見)과 달관(達觀)에 접하여 소제(小弟) 배운 바 적지 않소이다. 보지 못하는 어두움이 여기 있었으니 보는 밝음이 거기 있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나는 고요히 요한복음 10장 39~40절이 활동사진의 자막같이 나의 영 위로 얼른 지나감에 접(接)하나이다. 나의 입을 향하여 나의 영은 침상침묵(沈想沈默)하고 속삭였나이다. 그리고 다시 '시무언'(是無言)을 부르짖었나이다.


   오 나의 입술아, 너는 삼가 자중하라. 가벼이 사람을 이름 짓지말자. 주 일찍이 누구를 헤아려 이름 짓지 아니 하였느니라. 오 나의 혼아, 네 누구인데 사람을 판단하느냐. 완전한 판단자는 다만 한분이 계실 뿐이니라.

   "나는 죄인이라 정죄하려 온 자가 아니요 붙들어 구원하려고 왔었고 또 올 것이라." 저희를 정죄하고 또 의롭다 할 것이요, 하나님이 최후의 판결을 내리시리니, 오 나의 영아, 너는 나로 더불어 잠잠하자! 인간의 심판은 작시금비(昨是今非)요, 금시명비(今是明非)니, 너는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를 빼앗지 말지니라. 오 주여, 당신은 계시옵나이다. 아멘!

   이사야서 42장 18-35

11월 23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월계리교회

용도(容道)

 

 

   1.

   이용도가 보내는 답장의 엄정함과 진중함 ㅡ 그리고 약간의 풍자까지 ㅡ 은, 이용도가 볼 때 김인서의 편지가 성급하며 지나친 면이 있었던 걸까.

   '한준명 사건'은 김인서의 심중을 흔들었나 보다. 그가 볼 때 한준명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잘못된 기독교'를 전했나 보다. 지난 9월 22일 이용도가 김인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원산과 관련한 논란이 었었다. 여기에 한준명 사건이 더해지니(기도단 모임이었으니 김인서도 한준명의 '원산파' 식의 집회를 보았을 것이다), 김인서는 원산 무리들의 신앙에 대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는 양주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이용도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준명 및 소위 원산파와 관계를 끊으라고 강력하게 권했나 보다.

   당시 교계의 분위기는 어느 사람들이 총궐기하여 용도 공격을 하던 때다. 이용도는 한준명 사건의 본질은 자기를 붙잡고자 하는 것임을 직관적으로 간파한 듯, 요한복음 10장 39~40절이 그의 머리를 스쳐감을 느낀다. 김인서도 여기에 얽힌 정치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겠지만, 심경에 변화가 생겼나 보다.

   한준명에게는 별의별 경멸적 호칭이 쏟아졌다. 이용도는 이에 동조하지 않고,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어느 사람들은 '한준명의 신앙을 용납하는 것이 가하냐? 아니냐?'를 따지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고, 어느 사람들은 이용도를 쓰러뜨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용도의 초점은 이 두 가지 모두를 빗겨간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그의 예리한 눈과 버림받는 자들을 향한 그의 끓는 긍휼 그리고 만물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와 음성을 겸허히 듣고자 했던 이용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가 있다. 어떻게? 어떻게 말인가?

   이용도는 자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무리들이 있음을 잘 안다. 이들은 이용도를 판단하고, 한준명을 판단하고, '원산파'를 판단하고, 또 누구를 또 누구를 판단하고 이름을 붙여준다. 이들은 만에 하나라도 이용도가 항복하여 원산과의 관계를 끊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자들이 아니었다(비교, 마27:42).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겸비한 자들이었다면 회개의 사자 이용도의 말에 진작 회개하지 않았겠는가?

   이들은 하나님을 앞세우나 실제로는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 있는데, 그 증거는 그들이 사람들의 구원이 아닌 정죄와 파괴에다가 힘을 씀이다. 즉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짓'이 그들이 '누구'인지 드러내준다. 이들의 열매는 더 많은 '정죄대상목록'일 뿐이다. 동지라는 자들중에서도 이들의 입장, 즉 권력자, 심판자, 정죄자, 짓이기는 자, 쫓아내는 자, 이름 붙이는 자의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그것이 참 신앙으로의 길바꿈인 것처럼 여기는 위선과 기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용도는 힘센 비판자의 입장, 즉 한준명을 중심으로 옳거니 그르거니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 가까이로 가게 된다. 바로, '판단자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의의 믿음과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은혜의 믿음을 굳게 붙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자 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인정한 이용도와, 자기가 심판자가 되고 또 정죄자가 된 이들 중에서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따르고 있는가? 어느 쪽의 신앙이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보여주고 있는가? '의와 자비'가 빠지고 '경멸과 정죄'만 남아서 그것이야 말로 '정통' 기독교라고 선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적'이다. 의와 자비가 없는 곳에서 도망할지어다. 그 높은 지붕 무너지리니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

 

 

"주님, 최종의 판단자는 주님이시오 죄인의 구원자도 주님이십니다. 자비 없는 자에게 자비 없는 심판을 마련하시는 주님, 자비를 위하여 의를 행하시고 의를 위하여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 그 주님을 닮는 의와 자비의 신앙이게 하소서. 저주 받을 정죄와 경멸의 신앙을 멀리하고, 사랑 받을 의와 자비의 신앙을 갖게 하소서. 아멘."

 

 

    2.

   어느 사람에 대한 평가는 남들이 그에 대해 하는 말에 앞서 그 자신이 한 말을 통해 하는 것이 가정 정당하고 올바르다. '한준명 사건'이 있었던 때로부터 12년이 조금 더 지난 때에 한준명이 동인지요 교단지인 <예수>지에 발표한 글이 있다. 이를 통해 그를 생각할 때, 비판자들의 떠듦은 '실제 한준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진실은 어느 쪽에 있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각자의 눈으로 보면 족하리라.



   예배의 생명 생명의 예배

   할렐루야. 나의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세.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송함이어.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 것이오, 도울 수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로다(시편146:1~3).

 

 

   一

   주의 거룩하신 제단 앞에 드리는 마음, 그 충정의 고백이 과연 이러해야 할 것이다. 오로지 주께로 향한 내 마음에 허락하시는 그 향기로운 접촉과 흘려 들여보내시는 성류(聖流)의 정화에 견디지 못하는 희열과 함께 일어나는 감격! 때로 신위(神威)의 나타나심에 당하는 숭고한 경악.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는 심령의 경지를 예배자는 얻게 되는 것이다.

 

 

   二

   옛날 오벳에돔의 집에서 여호와 법궤를 옮겨올 적에 풍악을 잡고 노래하며 춤추는 행렬 중에서 다윗 왕이 세마포 에폿을 입고 함께 즐겨 뛰놀며 미갈이 업신여김도 헤아리지 못한 희열의 상태(역대상15:27). 변화산 위에서 구름이 와서 가리울 적에 베드로가 제 한 말을 저도 알지 못하더라 한 경악의 상태(눅9:34).

   주께서 가르치시는 생명의 말씀을 전심으로 받고 앉아서 그 형의 수고함도 돌아보지 못한 마리아의 내부 정화에 포로 된 태도(누가10:38~42). 바리새교인 시몬의 집에 주께서 청함을 받아 가셨을 적에 옥합의 귀한 기름으로 주의 머리에 붓고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며 머리털로 씻던 여인의 감격한 태도(눅7:44~50).

   이 몇 가지만 하여도 넉넉히 그 심령의 경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三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4:24) 말씀하신 대로 예배의 생명은 신령과 진리, 그 자체에 있고 예배자의 생명은 이 신령과 진리를 소유하고 운행(運行)하는 생활여하에 있는 것이다. 신령과 진리로써 예배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군중이 장엄한 의식으로 예배다고 하여도 이것은 예배가 아니다.

   예배의 내용 곧 신령과 진리가 예배자의 생명과 분리되는 때에는 이것은 벌써 인간적 무엇과 우상봉사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두에 인용한 성구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 것이오, 도울 수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로다"한 진의가 이 내용에서 떠나는 위험을 경계한 것이다.

 

 

   四

   예배하는 그 일이 예배자의 생명에 생명으로 풍성케 함과 내부에 광명을 가져오는 일이 못되면 벌써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부터 닫혀져서 예배라는 말부터가 염증을 일으키게 되나니 공연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같고 의미 없이 정력을 쓴다는 느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배하는 이의 영(靈)에 주 친히 신(神)으로 오시어 위안을 주시며, 생명수로 시원함을 허락하시는 일이 그 찬송, 설교, 기도를 통하여 없다고 하면 수많은 교회에 주일마다 출입하는 수천수백의 교도가 있을 지라도 벌써 진정한 의미의 예배에서는 해소(解消)를 당한 것으로 보아야 좋을 것이다.

 

 

   五

   생명이 되지 못하는 예배, 혼에 위안을 주지 못하는 신과의 교통이 두절된 예배는 아무리 굉장한 집회에서 성대한 절차를 갖추고 웅변의 설교를 토한다고 하여도 무익한 것이다. 현금에 있어서 이상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교회당이 다 고루(高樓)와 거각(巨閣)이오 예배시간마다 좋은 가곡을 들려주고 유명한 종교가와 신학자들이 단상에서 열렬한 웅변으로 설교를 하여주되 거기에 가지 않고는 못 견디는 마음의 끄는 줄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심령의 위안을 그 예배에서 얻어 볼 수 없는 까닭이오, 꿀송이보다 더 달고 향기로운 주님과의 결합을 거기에서 얻지 못하는 관계다. 교회당을 향하여 주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관념부터 생겨보지 못하도록 신령과 진리가 그 예배에서 떠난 까닭이다.

 

 

   六

   교회당마다 진실로 주 앞에 생명 있는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되어 마음의 답답함과 무거운 짐을 버릴 수 있는 예배자와 주와의 밀회소(密會所)가 된다고 하면 그 거룩한 곳을 사모하여 마지아니하는 간절한 마음의 그 열도가 얼마나 높을 것이냐! 고민하는 가슴, 번뇌에 타는 머리를 존엄하신 주의 성전에 내여 놓고 치료함을 받으며 생명하늘 같이 생명의 신선을 회복할 때 아! 이 예배에서 솟아나는 생명, 그 신령과 진리로 어찌 주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 않을 것이냐(시편130:5~6). 주의 오심을 바라는 애타는 마음이 마치 밤새우는 파수꾼이 밝은 아침을 기다림과 같다.

 

 

   七

   주께서 우리에게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 명하신 것은 당신의 영원하신 생명을 우리 속에 부어넣으시기 위함이오, 지체로서 교통을 완전케하사 구원하시는 신애(神愛)의 법칙대로 생명을 바꾸시는 역사를 우리 마음속에 행하시는 까닭이다(요15:6~7). 이 신령과 진리 속에서 되는 영원한 결합, 영원한 영광, 영원한 구원을 참 생명의 예배자가 얻을 것이다.

   예배의 생명을 얻은 자여! 생명의 예배를 드리는 자여! 네 생전에 여호와를 찬송하며 네 평생에 네 하나님을 찬송할지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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