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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해주 골고다 얼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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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04 15:18 조회2,6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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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과 안주 집회를 마치고 2월 18일 고향에 들러 부모님께 인사를 올린 후 서울에 온 이용도는 황해도 해주로 갔다. 해주 집회 참석자의 회고문이 남아 있다.

 

   이용도 목사님께서 우리 해주에는 두 번 오셨다. 다른 곳에서는 수년 동안을 간청하고서도 한 번도 못 모시어간 곳도 많다는데 우리 해주에는 두 번씩이나 찾아오셨던 것을 생각할 때 오직 감사와 감격이 클 뿐이올시다.

   첫 번에는 1932년 음력 9월 22일부터 1주일간이었고 두 번째에는 1933년 음력 1월 28일(토) 저녁에 해주에 오셨다가 2월 4일(금) 새벽에 해주를 떠나셨다. 첫 번 오셨을 때에 해주의 여러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모든 교인의 심령에 큰 빛을 던져주신 기적적인 역사는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므로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고 두 번째 오셨을 때에 있었던 사실의 일부를 말하겠다.

   1933년 음력 1월 28일은 토요일이었다. 이 토요일 저녁예배가 거의 끝나게 되어 가는데 목사님께서 해주 교회에 나타나 엎드리시는 것이었다.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실 무렵에 우리의 공부도 끝이 났으므로 우리는 목사님을 이영은 씨 집으로 모시고 갔다. 목사님께서 뜻밖에 해주에 오시었으므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강령으로 가시는 길에 잠깐 해주에 들리신 것이라고 했다.

   어느새 모여든 우리 동지들은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아마 1시간 이상 올렸던 것 같다. 기도를 마치고 다 일어났을 때 어떤 부인 한분은 "제가 지금 기도하는 중에 목사님께서 이번에 강령 가시는 것을 중지하시고 해주에서 집회를 여시는 것이 좋을 것을 느끼었습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일동이 다시 엎드려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두 번째 기도가 끝난 후에는 모인 무리가 다 해주 집회를 간청하게 되었으므로 목사님께서 또 긴 시간 기도를 하신 결과 강령행을 그만두고 해주에서 집회를 열기로 작정을 하셨다.

   이튿날 새벽부터 집회가 시작되었다.

   첫날과 둘째 날에 벌써 목사님은 세상에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는 듯이 결사적으로 최후적인 설교와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셋째 날에 이르러서는 이상하고도 극히 중대한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자기의 죄와 부족을 통회하노라고 가슴 치는 모습과 통곡하는 소리가 한편에서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친구를 책망하는 소리와 교역자에게 충고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또 다른 한편에는 기뻐 춤추는 자도 있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다가 그 십자가를 지어본다고 해서 두 팔을 십자로 벌리고 일어나 담벽에 의자하여 십자가를 지고 뻣뻣하여지는 이 등이 생겨 예배는 심각한 긴장과  혼란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 밤에도 목사님은 집회를 마치시고는 모여드는 자에게 안수기도를 하시면서 한밤을 꼬박 새우셨다.

   이튿날 새벽에도 전날 밤과 같은 현상이 많이 나타나니 이날부터 해주예배당 근처에는 별별 소문이 다 돌아가게 되어 거리가 떠들썩 하였다. 불신자들 사이에서는 "예수가 왔다지", "천사가 왔다지" 하면서 쑤군거리고, 예수 구경가자고 몰리어 오기도 했다. 바로 그날 밤에 예배당에는 진리와 은혜를 사모하는 무리와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여 구경하러 모인 무리와 신문기자, 판사, 검사, 도립병원 원장(일본인) 등까지 모여 해주예배당은 정말로 꽉 차고 넘치고 넘쳤고 예배당 뜰도 꼭 차고 예배당 앞 큰 길도 사람 때문에 통행이 곤란한 형편이었다.

   목사님이 단에 나섰다. 한마디, 두 마디 말씀이 진행됨에 따라 흐르는 땀은 눈을 뜰 수 없이 이마와 눈 잔등에서 흘러내려 두 뺨이 번들거렸고 처음에는 조금씩 나던 기침이 약 반시간을 지난 후부터는 점점 심해지게 되어 몇 마디 말씀을 하시고는 땀을 씻고 또 몇 마디를 하시다가는 기침에 숨이 막히어 말까지 막히는 것이었다.

   "날마다 시간마다 산 같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아, 너희들은 날마다 하늘의 큰 벌을 어떻게 면할 수가 있을 줄로 아느냐. 이 자리, 이 시간에 죄를 내어놓고 주 앞으로 나오라. 예수 앞으로 나오라."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열변, 땀, 기침, 그리고서 또 열변, 또 땀, 또 기침. 울며 찬송하시다가 주먹을 휘두르며 열변, 절규, 몸부림을 치시며 고성 질호(疾呼). 창백한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번뜩이고 결사의 고함은 기침에 콱콱 사로잡히는듯 땀에 젖은 손수건을 높이 들며 찬송 또 찬송. 울음 섞인 음성으로 목을 아주 찢어버리시려는 듯 설교 또 설교.

   회중 가운데서 울음소리와 기도소리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그 소리보다 더 높은 음성의 말씀을 들려주시려는 애탐은 두 손을 다 들고 온몸을 다 바쳐 흔들며 떨며 몸부림으로 화하였다. 단상(壇上)에 말하는 이와 단하(壇下)에 말 듣는 수천 명의 청중이 한 울음에 삼키어져 울음의 골짜기가 되었을 때, 번쩍 드는 손수건에 따라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피땀을 쏟는 기도가 있은 후 단에서 내리셨을 때, 시간은 꼭 4시간이 걸렸다.

   땀과 눈물에 완전히 젖으신 그 몸, 있는 기운을 철저히 뽑아내신 그 몸이 강단에서 내리시자 곧 땅에 엎드리셨다.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는 그 찰나에 강단 뒷문이 열리더니 어떤 청년이 목사님을 부르고 끌어내는 것이었다. 목사님이 뒷방으로 끌려가신 후 열정의 찬송을 부르던 회당은 전날 밤과 같은 광경이 더 굉장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때에 교회당 한편에서는 이상한 눈치가 보여지며 웅성거리게 되었으니 이는 이용도 목사가 청년들한테 매를 맞는다는 소식이었다. 기도, 통곡, 회개에 잠긴 이들에게는 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겠지만 구경이나 하러 왔던 사람들은 목사가 매맞는다는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많은 무리가 전도실을 둘러싸고 야단이 벌어졌다. 이때에 전도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7~8명의 청년(교역자의 아들과 친척 교회에서 유력하던 청년들)이 목사님을 가운데 놓고 희롱과 욕설을 퍼부으며 움직이는 손길 발길이 또 목사님을 치고 차려고 하고 있었다.

   "복아지 알 팔러 다니는 자식, 미친놈, 밸 빠진 자식, 때려 족일 놈."

   "얘 이놈아 예수가 무어냐, 너 같은 자식이 하나님이 무어냐" 등 욕설이 높아졌다.

   들고 나는 주먹이 이제 또 바로 이 목사를 치려 드는 것이었다.

   이때에 나는(그때에 나는 예배당에 잘 다니던 사람도 아니요, 교회나 교인을 그리 신통하게 여기던 자도 아니었다) 목사님 곁으로 다가서면서 가장 덤비고, 날뛰는 OOO의 멱살을 붙들고 "어떤 자식이 목사님을 친단 말이냐, 목사를 치려는 놈의 자식은 나오라"고 고함을 쳤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때 싸움깨나 하기로 해주에서 알려진 자이었으니만큼 내가 나서며 고함을 지르자 장내의 공기는 갑자기 돌변하여 잠잠해지는 것이었다.

   이때에야 문밖에 서서 방 안의 꼴을 보며 치를 떨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조이던 부인 몇 분이 몰려 들어와 목사님을 부축해서 겨우 일으켰다. 어서 가라고 목사님의 가방을 바깥으로 집어 던지는 자들의 난동과 이 자리로 해주에서 없어져 버리라고 퍼붓는 욕설을 들으시며 방을 나서려니 목사님의 신발이 없어져 있었다. 여러 부인들이 그 신을 두루두루 찾아도 못 찾다가 얼마 후에 치 떨리는 광경이 보여졌으니, 조각조각 찢어진 하ㅡ얀 고무신 조각이 어두운 밤, 시커먼 땅 위에 히뜩히뜩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

   목사님의 숙소로 정한 이영은 씨 집까지 약 500미터의 길을 목사님은 양말발로 (아직도 얼음이 녹지 않은 찬 땅을) 걸어가셨다. (이때에 나는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비틀 쓰러지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주님을 연상하면서 울었다) 목사님의 뒤에는 언제 모였는지 적지 않은 수의 부인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오직 흐늑흐늑 우는 소리와 가느다란 목소리로 울음의 기도를 올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런데 부인들 뒤로 몇 명의 청년이 따라와서 목사님 숙소까지 이르러 사람을 죽일 듯한 태도로 또 야단을 해댔다.

   "썩 가거라. 가지 않았다가는 죽여버린다. 강령에 가보아라. 따라가서 때려죽인다"는 것이었다.

   이날 밤 영은 씨 집은 통곡과 기도로 가득했다.

 

   목사님은 이후 다시 강단에 나서지 않았다. 강단에 내세우는 자도 없었고 또 그때 목사님의 체력으로는 몇 걸음도 옮길 수 없었다. 목사님은 어디로 가실래야 가실 힘도 없었고 더 있겠다고 우기지도 않으시었으나, 몇몇 부인신자의 간절한 소원과 결사적 수호로 영은씨 집에서 사(私)기도회를 열었다. 건평 4~5평밖에 안 되는 작은 방에 150여 명이 모여 이틀 동안 통분과 기도와 감격으로 지낸 후, 1933년 음력 2월 4일 금요일 새벽 6시, 날이 채 밝기 전에 이른 봄의 새벽 거리를 울리는 발차 경적소리와 함께 목사님은 해주를 떠나시고 말았다.

   이렇게 죄송스럽게, 이렇게 섭섭하게 목사님을 보낸 후 해주의 우리 동지 몇몇은 목사님의 천사 같은 음성을 또 한 번 들어볼 날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조르고 있었는데 목사님 승천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리 몇 사람은 모여서 통곡하였다.

   더욱이 그때 그날 저녁의 설교가 목사님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설교가 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날 밤의 설교를 다 기억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픈 일이요, 또 우리 해주(海州)가 목사님을 죽여버린(주를 십자가에 못 받은) 듯한 죄책감에 참으로 가슴이 찔리고 아픈 것이올시다(해주海州가 해주害主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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