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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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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16 13:10 조회2,4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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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파란곡절을 넘어 겨우 한 학기를 마친 나[변종호]는 재령 집을 다녀서 금강산엘 갔다. 금강산에서 나오는 길에 '혹시 목사님이 아직도 원산에 계시지 않나' 해서 원산에 들렸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직 원산에 오시지는 않았고 지금 평양을 떠나 원산에 오시는 길에 삼방약수포에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 서둘러 삼방으로 길을 떠났다.

   삼방협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10시경. 역에서 내려 인가가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을 한참 들어가니 오른쪽 언덕 아래에 초가집 너덧 채가 가지런히 시내를 등에 지고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 집들 중 맨 마지막 집 아랫방에 바로 목사님이 누워계신다는 것이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니 목사님 부인과 아들 영철 군이 반색을 하며 뛰어 나오고 목사님도 누워계시다가 힘들여 일어나 앉으셨다. 가족들은 먼저 내가 무사함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뜻밖에도 목사님의 병세가 경(輕)하지 않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목사님 얼굴빛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몸은 극도로 쇠약했다. 기침은 쉬지 않고 가슴을 쿵쿵 울리듯이 쏟아져 나왔다. 벌써 나의 마음은 눈물로 젹셔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1시 차로 원산을 가려던 참이었다오."

   두 분이 꼭 같이 말씀하셨다. 점심때가 되었다. 목사님은 국수를 드시고 우리는 차가워진 밥을 먹었다. 1시가 가까워오자 목사님은 옷을 입으셨다. 그러나 1시 차에도 그 다음 2시 차에도 목사님 가족은 떠나지 못하고 나만 2시 차로 먼저 떠났다. 목사님에게 10원을 빌려간 어느 친구가 1시 차를 탈 수 있게 갖다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목사님이 옷을 입고 앉아계셔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여쭈었더니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그 사진도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사진이 되고 만 것이다.

   마침내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방 안을 한번 휘둘러보았다. 문득 목사님의 부인에게 시선이 멈췄다. 한동안 움직일 줄 모르던 나의 눈길이 다시 목사님의 얼굴에 멎었다. 핏기 잃은 목사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목사님의 양손은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곧 나을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나의 이 말에 목사님의 얼굴에 미소가 잠깐 스쳤다.

   "아, 그럼요. 염려 말아요."

   나는 목사님의 병실을 나와 총총히 걸었다. 같이 나서는 목사님 부인을 만류해서 앉혀드렸다. 목사님의 곁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아들 영철군이 정거장까지 따라 나왔다. 언덕을 올라서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마루에 서있는 목사님 부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얼마를 더 걸으니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언덕 뒤로 숨어 들어가는 집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제는 송 부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적막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사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목사님, 분명히 나을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꼭 낫게 해주세요' 하며 걷다 보니 이미 역에 가까워 있었다.

 

 

   작은 후회 그러나 영원한 후회

   차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호주머니를 털어 돈 60전을 영철군에게 주었다. 내가 갖고 있던 전부였다. 이 돈이라도 내어놓으니 가슴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 돈을 내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점심을 먹을 때부터 어쩐지 허둥지둥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식은 밥을 먹고 목사님은 국수를 잡수시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내 마음은 평온하지가 않았다. 사실은 목사님 부인이 목사님과 귓속말을 주고받는 말을 언뜻 들었다. "우리는 식은 밥을 먹지……"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나는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선뜻 일어서서 "오늘 점심은 내가 사오지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 주제넘은 것 같아서 그대로 앉아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목사님 부인이 국수를 시키러 나가려고 일어섰을 때도 따라 일어나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못했다. 점심을 다 들고난 후에도 목사님이 잡수신 한 그릇 값이라도 내려 했지만, 그것 역시 되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도 돈이라고는 모두가 그 돈 60전밖에 없었다. 경성까지 가자면 못해도 60전의 비상금은 있어야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세 차례나 내어 놓을 듯하면서도 결국은 못 내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병든 목사님을 뒤에 두고 내 갈 길이 바쁘다고 총총히 물러 나오면서 생각하니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도 잘 잡수시는 국수 한 그릇을 내 손으로 대접해 드리지 못한 그것이 못내 나의 가슴을 쓰리게 하고 있었다. 마침내 섭섭함과 송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그 돈을 영철에게 주지 않고서는 그 땅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철이에게는 주었다 해도 내 가슴은 여전히 가시지 않을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손으로 정성껏 국수 한 그릇도 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그때의 심경이 이러했거늘, 후에 이 작별이 바로 영원한 이별임을 알았을 때의 마음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국수 한 그릇 사드릴 기회나마 그때가 마지막이라니,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할 때면 내 마음은 온통 후회와 아쉬움에 휩싸여든다. 가슴에 맺혀 있는 방울을 풀 일이 없고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진다. 오직 가슴을 쥐어뜯고 머리를 깨치고 싶을 따름이다.

   이에 더 통탄할 일은 또 하나의 후회가 겹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삼방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캐비닛 원판 두 개가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 하나로는 목사님의 독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남겨 서울까지 가지고 온 것이었다.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을 수 있었던 것을 찍지 못했던 후회였던 것이다. 그때 남은 한판으로 목사님과 내가 둘이서 찍든가, 그렇지 않으면 목사님 가족을 찍을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눈을 꼭 감고 하나를 찍지 않은 채로 돌아서고 말았다.

   물론 이유야 없지 않았다. 금강산을 향하기 전에 우연히 학교엘 들렀다. 그때 8월 초에 학교에서 열리는 음악강습회의 기념촬영을 한다기에 청탁 받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금강산에서 단돈 몇 원이라도 벌어 왔다면 서울에 가서 또 사기로 하고, 있는 원판을 다 쓸 수 있었겠지만 사실은 손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다가 8월 초는 다되었고, 경성에 가면 당장 원판이 있어야 하고……. 생각 끝에 할 수 없이 원판 하나를 남겨 가지고 돌아선 것이다. 물론 이유를 댄다면 없지야 않겠지만 그때가 목사님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고만 지금[1936년 경], 그때의 그 일이 이렇게도 가슴을 아프게 하고 막심한 후회로 남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요.

   이렇게 끝없는 후회와 함께 목사님을 보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다른 친구들의 사진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찍으려고 힘썼다. 그래서 내가 만일 보통 이상으로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며 사진을 찍는 일이 있다면 이는 그때 생긴 마음속의 뿌리깊은 후회를 조금이라도 풀어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는 가끔 엉뚱한 사람을 끌고 가서 국수를 사 먹인 적도 있었고 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사진 찍어 주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이는 이렇게 해서라도 그때의 안타까움을 잠시나마 앚어보자는 노력이었을 게다. 그러나 아무리 국수를 사주고 사진을 찍어주어도 가슴속의 안타까움은 날로 더할 뿐이었다. 그때 이 두 가지 일이 얼마나 큰 후회를 내 마음속에 안겨주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수롭지도 않은 일들이 그렇게도 큰 후회로 변하는 것을 보고 나는 결심했다. 될 수 있으면 아무리 작은 일에서라도 후일에 후회가 될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길지도 않은 방학[1933년 여름] 동안 기쁜 일도 겪고 슬픔과 모진 후회도 하고 고생도 겪고서야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개학을 하고 공부를 계속한 지 며칠 되던 어느 날, 우연히 거리를 걷던 나는 석교예배당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예배단 뒤뜰에 여위고 초라하게 변한 영철이가 서있지 않는가.

   "아니, 영철아, 네 꼴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니?"

   소리를 지르면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느새 내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그렇게도 충성된 주님의 종, 삼천리를 울리고 웃기던 위인의 단 하나 있는 귀염둥이 영철이가 아무려면 저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던 말인가. 목이 메이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영철이에게 별로 묻지도 못하고 따뜻한 위로도 해주지 못한 채 나는 도망치듯 영철이와 헤어지고 말았다. 이때의 뛰는 나의 마음은 혹시 길에서라도 다시 만날까봐 가슴이 몹시도 떨렸다. 그리고 차마 영철이를 찾아볼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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