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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숭고한 뜻 그리고 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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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20 13:04 조회2,5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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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을 보낸 후 눈물과 한숨으로 며칠을 보내는 동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픔과 후회가 날로 가슴 깊이 일어났다. 그 많은 은혜와 신세를 조금도 갚지 못한 후회, 좀더 오래 사시도록 힘써 보지 못한 뼈 아픈 자책감. 내 가슴은 항상 찌르는 듯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장례식에 조차도 참석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말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팠다. 허공을 향해 눈을 들고 앉은 나에게 목사님의 반쯤 쉰 듯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정말 무엇을 해서 목사님에게 사죄와 위로를 드리고 또 목사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에게 어떤 위로나 유익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이때에 내 마음속에 분명히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이 목사님이 각처에 보냈던 편지들을 모아서 서간집을 출판해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 영전에 드리고 남아 있는 목자 잃은 양들에게 선물로 보내자고 내 결심을 곧 그날부터 행동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편지들을 모으기 위하여 짬짬이 시간을 내어서는 평양, 안주, 해주 등지로 쏘다녔다. 교파를 가리지 않고 편지가 있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다녔다. 그러나 이렇게 착수는 했으나 언제쯤 출판을 한다는 계획은 막연하였다. 그저 슬금슬금 편지를 한 통, 두 통 모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34년 봄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모 잡지에서 이 목사님을 격렬한 어조로 험구, 악담을 퍼부어 모욕함이 있었으매, 나는 이를 부드득 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내가 이 목사님의 신앙 내용을 신학적으로 잘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시요, 나의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많은 사람 앞에서 이리저리 몰리고 매를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볼 때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이 목사님의 서간집 출판을 위해 있는 힘을 다 쓰기로 결심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공부는 천천히, 그러나 죽어도 이 일만은 

   짧은 봄방학 중에도 편지를 모으는 여행은 황해도, 평안도로 계속되었다. 4월 9일 아침에야 서울로 돌아왔는데 그날이 바로 개학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는 제쳐놓고 모아온 편지를 늘어놓고 정리하느라고 시간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원산을 향해 또 떠났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 눈을 감으니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열중하는 학우들의 모습이 눈에 나타났다. 비 내리는 밤의 열차는 무거운 정적을 뚫고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밤 11시에 출발한 기차는 이튿날 아침에야 나를 원산역에 내려주었다. 나는 곧 발걸음을 재촉해서 목사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절하고 우노라니 붉은 흙 사이에 새롭게 돋아나는 새싹이 손바닥에 닿았다.

   원산에 사흘을 머무르는 동안 구할 수 있는 편지는 모두 모아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부터는 학교에도 빠지고 끼니고 건너가며 밤낮으로 편지와 씨름하며 살았다. 학비를 내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내 처지로는 괴로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은 학생 전체가 백운대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나는 사진기와 필요한 도구 일체를 짊어지고 이리저리 따라 다녔다. 왕복 70~80리를 걷고 하루 종일 사진을 찍노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시달리고서도 돌아와서는 곧 원고를 쓰기 시작하여 12시가 넘도록 계속하였다. 정말 이를 갈면서 썼다. 나에게는 분초가 아깝기만 하였다. 그러기에 그렇게도 법석대는 창경원 벚꽃구경이나 한강 뱃놀이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한번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원고를 쓰다가 늦어진 조반을 꾸역꾸역 퍼 넣고서 마신 물을 목에 넘기지도 못하고 신을 신느라고 허리를 구부리다가 물이 코로 흘러내려 하루종일 기분이 이상하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원고의 본문은 거의 다 정리가 되었는데 서문을 아직 쓰지 못했다. 사실은 그 짧은 서문 하나를 쓸 시간이 없어 못쓰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2시 반에 평양역에 내린 후 역대합실 한구석에 앉아서 쓰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는지 눈을 들어 바깥을 보니 아침해가 올라와 있었다​.


 

   심우원(心友園) 창립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과 구걸을 하며 창피함까지 참아가면서 모은 편지 100여 통으로 만들어진 원고가 4x6판 300페이지 가량이 되었다. 그러나 출판을 하려는 내 앞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고 뭉치를 들고 별사람을 다 찾아다니고, 있는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출판에 힘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서점이나 인쇄소에서 발행을 거부당할 때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발행소 이름만 빌리자는 데도 곁눈을 흘기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내가 발행소를 하나 창설해서 출판하리라는 결심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며칠을 두고 기도하며 궁리한 끝에 발행소의 이름을 심우원(心友園)이라고 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함은 시무언(是無言)과 음(音)이 근사하고 또 그때의 나의 심정은 단 한 사람의 심우(心友)라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었다.


 

   드디어 서간집은 출간되었으나 

   원고를 모으는데 발 벗고 나서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김예진 형의 열성과 한성도서주식회사 김진호 선생의 절대 희생적 도와주심에 의해서 [이용도목사서간집 제1권]이 1934년 6월 11일에 드디어 출판되었다.

   책이 출판되자, 나는 곧 기독교 관계 언론기관을 찾아갔다. 책의 광고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곳에서 거절당하고 말았으니 그런 책은 광고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웬만한 책방은 다 찾아다녔으나 그런 책은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평양에 갔더니 거기서도 꼭 같은 말을 하며 빈정거렸다. 조롱과 멸시만 당했을 뿐이었다.

   나는 책을 가지고 또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한두 권씩이라도 팔아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 한 권도 사는 삶은 없고 아예 상대도 안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인쇄비를 갚지 못하는 채무자, 말하자면 '빚진 죄인'이 되고 말았다. 절대적 희생으로 출판을 맡아 주신 한성도서회사의 김진호 선생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정말 쓰러져 울다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반년 동안의 결사적 노력과 출판 후의 절대적 타격으로 인해 몸의 병증세가 위중해지고 말았다. 몸과 마음이 아울러 맥이 빠진 나는 6월 하순 방학을 1주일 앞두고 병든 몸을 끌고 시골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소, 멸시 그리고 또 

   집에 와서 얼마 동안 실컷 앓고 난 나는 전날 편지를 모으려 다녔던 곳을 차례차례 찾아나섰다. 가는 곳마다 나를 기다리는 것은 조소와 멸시 그리고 냉대뿐이었다.

   "책을 낼 바에는 웨슬리나 루터의 책을 낼 것이지 그 따위 덜된 책을 무엇이라고 썼느냐?"

   "그렇게도 밥 먹고 할 짓이 없으냐?"
   "변종호란 자는 어떤 자식이냐?"
   "그 학교에서는 그런 것도 붙여두나?"

   "참 별 것들이 다 있어."

   들리는 소리가 그저 이런 것들이었다.

   그 해 여름, 나는 여기 저기 책을 들고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전에 잘 알던 교회 어른들을 만나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나를 만나서는 대뜸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것이었다. 어떤 이가 멀찍이 오는 것을 보고 가노라면 얼른 딴 골목으로 슬쩍 피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쯤은 나에게 아무런 아픔도 설움도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 도리어 내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요, 축복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가슴을 아프고 쓰리게 하는 일은 인쇄비 미불에 따르는 죄송함과 심통(心通)이었다. 8월 초에 나는 해주에 가 있었다. 하루는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용당포로 소풍을 나갔었다. 종일 지내다가 어두워져서 숙소에 돌아오니 우표 두 장을 부친 편지 두 통과 전보가 와있었다. 인쇄비 독촉 내용이었다. 그 후 계속해서 독촉장이 날아왔을 때 내 마음은 무너지는 듯했고 가슴은 눌리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열광했던 나는 이제 책귀(冊鬼)에게 눌리어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내 세상에 와서 빈궁하게 살았으나 사회생활에 깊이 들어간 바 없었기 때문에 남의 빚을 져본 일이 없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갚을 길 없는 빚을 지고 독촉을 자꾸 받게 되니 몸을 둘 데가 없었고 정신을 지탱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내가 미치지나 않는가 하여 나 스스로를 경계하며 감시하게 되니 이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정말 나는 죽거나 발광할 듯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이 중압과 이 채찍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훌쩍 떠나버리고 말 수밖에 없다는 궁지에 몰려들고 말았다. 의식적으로 남의 돈을 축내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이 상태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으매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여기서 뛰쳐나가려는 본능적 행동으로 연결되어갔다. 그래서 나는 공부고, 체면이고 다 잊어버리고 그저 이 감옥에서 빠져나갈 생각만이 불 일듯하여 견딜 수가 없어 멀리 없어질 결심이 굳게 섰다.


주와 고인(故人) 위하여

눈물 땀 쏟았건만

조소 멸시뿐이요

죄인 명패(命牌) 채우니

내 혼 심히 괴롭고

가슴 심히 아파서

용납 않는 이 땅을

나는 떠나갑니다


​   가재바위 작은 길에서 나는 함께 가던 친구들과 작별하였다. 좀 먼 데로 가겠다고 했더니 친구는 나를 위하여 기도를 하다가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두만강 붉은 물결 바라보면서 

   2학기가 개학되는 날인 9월 2일 저녁에 경성을 떠난 나는 봉천으로 신경으로 정처 없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디뎌 유랑객이 되고 말았다. 신경역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에게 구걸까지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경도선(京圖線) 차 안에서 끝없는 벌판 저 멀리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외롭게 방황하는 혼이 되고 말았다. 차 안에는 승경(乘警), 군인, 헌병 등이 찬 총검이 번쩍거릴 뿐이고 철도 연변에는 습격으로 부셔져 껍데기만 남은 기관차가 처참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용정촌에서는 한층 더 통분할 소식들이 나를 맞아 주었다. 이용도 목사에게 호의를 갖거나 그 서간집을 읽는 자에게는 공개적으로 구박과 책망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도적의 무리', '그 나쁜 책' ㅡ 이런 말이 교회 강단에서 자주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도문에 이르렀다. 두만강 하나만 건너면 고국의 그리운 땅을 밟을 수 있는 도문. 거기를 옛날에는 회막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에는 도가(圖佳) 철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수구까지는 이미 개통이 되어 있었으매 거기까지 온 기차 손님은 동경성(東京城)까지는 군용차로 연락하고 있었다. 이리해서 북만주 철도에 이어지던 때였다. 이때에 동경성 영고탑 부근은 돈벌이도 좋았고 마적경기도 썩 좋아 돈을 잡을 수도 있었고 흥청거리고 혼잡한 그 속에서 찍 소리 없이 죽어지기도 좋은 형편이었다.

   두만강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에라, 그냥 가버리고 말까?'

   도문에서의 이틀 동안 나는 도문역과 두만강 사이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갈까, 말까?'

   발길이 강가에 와 닿았다. 누런 흙탕물이 넘실넘실 흐르고 있었다. 바로 몇 발걸음 저편에는 우리 산과 우리 집이 그림 같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흑노망향가(黑奴望鄕歌)의 구슬픈 곡조를.


이 강을 건너서 빛 고운 저 산 너머

내 고향 거기에 있으니 나 가고 싶어라

차디찬 이 땅을 나는 어이 헤매나

흐르는 내 눈물 두만강 물결을 덥히네


​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나는 왜 저기를 가지 못하는가. 왜 거기를 가고 싶어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내 눈에서 다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당장 뛰어서 이 강을 건너고만 싶어졌다. 그러나 이 작은 몸뚱이 하나를 용납하지 않는 곳이라면 아무리 곱고 아름다운 산천이라 해도 거기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분명히 나의 산천이 아니다. 나는 일어섰다. 저 멀리 펄럭거리는 도문역의 깃발을 향해서 걸었다. 그러면서 노래를 불렀다. 헤매는 나그네들이 불렀던 유랑가(流浪歌)의 처량한 노래를.


가자 가자 어서 가 네 걸음 빨리 걸어

끝 없는 넓은 벌판 죽기 좋은 곳으로

눈물 한숨 거두고 어서 거기로 가자

용납 않는 내 고국 잊고 거기로 가자


​   큰 길로 나서서 걷는 동안도 흐르는 눈물은 그칠 길이 없었다. 정거장 벤치에 무거운 몸을 맡겼다. 기차표를 사노라고 밀고 제치고 하는 아우성이 시끄럽기만 하였다. 영고탑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표를 살까?'

   힘없이 내려감은 내 눈에는 강 건너 고운 산천이 어른거렸다. 순간 가슴속으로 날카롭게 뛰어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멀리 가서 죽어진다면 어찌될까? 그렇게 되고 만다면 나는 영원히 OO자가 되고 이 목사님은 OO자라는 이름을 영원히 벗지 못할 것이 아니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일어섰다.


   가자 고국으로 가자!

   죽더라도 거기 가서 죽자!


​   드디어 서울을 향해 가는 기차에 내 몸을 실었다. 두만강을 건너는 나의 눈 앞에서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허덕허덕 걸어오는 탕자의 초라한 모습이 나타났다. 남양(南陽)발 기차가 영무(靈武)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거기서 황급히 뛰어 내렸다. 이곳은 몇 년 전 목사님이 말로 할 수 없는 땀과 눈물을 뿌리시고 큰 역사가 일어났던 곳이었다. 곧장 예배당을 찾아가 예배당 사진을 한 장 찍고서는 곧 바로 경성으로 향했다. 청량리역에 내린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운무(雲霧)에 잠긴 싸늘한 가을의 새벽거리는 초라한 나를 향해 냉소와 멸시의 시선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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