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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그 성역聖役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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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23 12:56 조회2,4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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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_ 이호빈(李浩彬)  

   고(故) 용도 군의 추상기(追想記)를 변우(邊友)에게 청탁받은 지 어언 반년이 훨씬 넘은 듯싶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붓은 들리지 않았다. 물론 나의 늘어진 성격 탓도 있겠지만 웬일인지 '용도'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아파져왔다. 그러니 그에 대한 옛일을 추억한다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억지로 이 붓을 들고보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않고 눈이 아득하고 한숨만이 나오며 가슴이 빽빽하고 막혀짐을 느끼게 한다.

   용도 군을 보낸 후 내 마음이 이리도 아프고 서러워지는 까닭은 웬일일까? 땅 위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섭섭함, 미진한 사업을 태산같이 남겨두고 한창 나이인 30 청춘에 간 아픔, 이 강산 위에 피땀을 쏟아 말라빠진 피골만의 그 몸을 둘 곳이 없어 남북으로 몰려다니던 그 모습, 생각할수록 나는 쓰라린 설움을 금할 길이 없다.


   오, 군(君)아! 나보다 먼저 간 용도 군아!

   나는 군을 기억할 때마다 가슴만 터지는 듯 아프구나. 첫째는 군의 중심을 내 알지 못했던 아픔이요, 둘째는 군의 유한(遺恨)을 내 풀지 못하는 아픔이로다. 군은 나를 믿어 손잡고 울었으나 나는 군을 몰라 군의 눈물을 뜻 없이 바라만 보았으며, 군은 나를 믿어 많은 일을 부탁했으나 내 아직 한 가지도 군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군아, 나의 무지를 네 얼마나 설워하였으며 나의 무능무신(無能無信)에 네 얼마나 울고 있느냐. 생전의 군의 중심을 알지 못하였던 슬픔도 내 가슴을 견딜 수 없이 아프게 흔들거니와, 군이 걸어가던 사랑의 길과 진리의 길을 내 걷지 못하는 답답함 ㅡ 무엇에 비할꼬. 고요히 군을 추억하니 나는 오직 눈물이 흐를 뿐이로라.

   나를 주께 부탁하는 군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어 나의 무지, 무언을 변하게 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다시 힘을 얻어 순종하여 기다릴 뿐이로다.

   나는 이제 옛날의 용도를 더듬어보려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흥분되어 두서의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더 밀릴 수도 없어 잡은 붓을 억지로라도 끌어 생각나는 대로 몇 자 적어보기로 한다.

 

 

   내가 본 그때 그 사람  

   그는 특재(特才)이었다. 말도 잘했고 글도 잘 썼고 음악도, 운동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두뇌가 명철하여 비판력이 비범하였던 것이다.

   그는 열정적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손대어 하기를 시작한다면 자는 일도 먹는 일도 잊어버리고 팔팔 뛰는 극단의 정열병(情熱兵)이다. 재학 당시에 그는 유년 주일학교 일을 계속 시무하였는데 교회 절일(節日) 특별순서나 맡게 되면 못 먹고 못 자며 애쓰기에 입술이 말랐다. 어떤 때는 가로상에 불쌍한 병걸(病乞)을 보고 들어와서는 하염없이 울기도 하였다. 마음 있는 일이라면 소유도, 명예도, 지위도, 인정도, 생명도 초개(草芥) 같이 내던지고 대드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인자한 사람이라면서 지독한 사람이었다. 해말쑥한 얼굴에 웃음을 싣고 보드라운 음성으로 나타날 때면 양(羊) 중에서도 가장 여리고 보드라운 암양 같이 인자하지만 단에 올라 불의를 공격할 때에는 사자보다 더 무섭고 사납게 지독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단상(壇上)의 용도만 만나 보고는 말 붙이기가 무시무시하고 가까이 할 수가 없는 듯 싶지만, 급기야 단하(壇下)에 내려 사석에서 마주 앉으면 그처럼 인자하고 온순한 자가 다시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물질에 등한(等閑)한 사람이었다. 수년간을 함께 생활한 일이 있었는데 금전에나 의복에나 모두 네 것 내 것이 없이 지내며 피차에 마음을 통하여 본 결과, 그는 분명 물질에 퍽 등한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제 것이라고 묶어두거나 채근하여 찾아 들이는 꼴을 못 보았다. 없는 사람에게 주지 못해 애쓰는 별사람이었으니 일생을 구차하게 그날그날 살아나갔다. 그러나 그 입에서 물질에 대한 이야기나 걱정을 결코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는 옷맵시를 잘 보는 사람이었다. 옷이 몸에 꼭 맞지 않으면 잘 입지를 않았다. 군의 부인되시는 송봉애(宋鳳愛) 씨가 옷을 고치기에 어지간이 고생을 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옷을 고치다가 너무 속이 상해서 울었다는 소문까지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옷맵시를 보던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은 탓을 잡지 않아도 의복은 한 술, 한 올을 꼬집어 들던 맵시꾼이었다.

   그는 걸음이 빠르기로 유명하였다. 인왕산 밑에서 통학할 시절, 시간이 좀 바쁠 때 앞에 세우고 구경하면 꽤 장관이었다. 몸 하나,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대처럼 발뒷축만 뺑뺑 돌리며 달아나는 것을 보면 나 같은 느림보는 따라가보려는 마음도 못 냈지만 어지간히 덤벼드는 진해(震海)군도 쩔쩔매며 따라가노라고 애쓰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보통 걸음에 배 곱은 빠르던 사람이다.

   그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용도 군은 신학방면보다 예술방면이나 법학이 좋을 듯이 생각되었다. 그는 특히 극(劇)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극에 특장(特長)도 있었고, 이론을 즐길 뿐만 아니라 예민한 판단으로 이론이 명료하여다. 군이 지도하는 석교(石橋)교회 유년주교의 가극단이 항상 대인기를 집중시키고 있던 것만을 보아도 그가 극에 취미와 특장을 가졌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회의석상에서 이론 투쟁이 생길 때 군의 주론(主論)은 보통이 아니었다. 논점이 명백하였고 이론에 강미(强味)와 권위가 있어 다시 재론할 여유가 없도록 판단이 명료하였다. 친구 중에서 가끔 군을 향하여 법학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라고 권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누가 보든지 그에게 그런 권면을 할 만큼 그 방면에 소질이 많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은 문장에 장점도 많이 있었다. 시를 좋아하고 가끔 명구(名句)를 써내었다. 그 방면으로 수련을 결(缺)하였고 또는 그 방면으로 진출할 기회를 못 가졌으니 말이지 분명 군이 글에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던 것은 그를 아는 이로서는 누구나 긍정하는 바이다. 나는 군을 향하여 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군이 신학을 하게 된 이유는 부득이한 환경에 몰리어 된 일이지 만일에 모든 외적 조건이 순조로이 허락이 되었다면 예술방면으로나 법학방면으로 진출하였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혹시 문학이나 교육방면이라면 몰라도 신학방변으로 진출하였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는 일 같았다. 법관이나 교육자나 문사(文士)나 연극가의 소질은 풍부하여도 교회의 소질은 가장 적다고 누구든지 인정할 것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서도 나의 생각에 공명(共鳴)하는 말을 늘 하였었다. 아무래도 자기는 목회에 자신이 생기지를 아니하나, 기왕 신학을 시작했으니 종교교육방면으로나 전공으로 나아가겠노라고 늘 이야기하던 것을 보아 그는 분명 길을 바로 들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불러 쓰시는 데야 어쩌랴! 군이 부흥목사로 돌아다닐 때 나에게 이렇나 편지가 왔던 것을 기억한다.


   형님, 내가 종교교육 총무가 되었다면 형님도 긍정할 수 있으나, 내가 말이지요 부흥목사가 되었다면 누구나 놀라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하시는 일은 알 길이 없나이다. 오직 끄시는 대로 순종할 뿐이외다.


   ​이 한 구절의 뜻을 미루어 본다면 용도 군의 최종사업인 부흥목사직은 제 스스로가 택한 바가 아니라 어떤 능력에 이끌려 따른 것임을 넉넉히 엿볼 수 있었다. 자기 소질에 맞지 아니하는 사업이었으나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최종(最終)을 고(告)한 군의 승리가 지극히 큰 줄로 믿는다.

 

 

   인왕산 밑의 자취생활  

   1926년이라고 기억된다. 환신 군과 세 사람이 인왕산 밑 현저동 송림 가까운데 방 한 칸을 세 얻어가지고 자취 생활을 시작하였다. 본래 넉넉지 못한 고학생들이라 살림은 무척 구차하였다. 가끔 좁쌀죽을 쑤어먹는 형편이었으니 경제적으로 당하는 곤란은 너무 심하였다.

   그러나 그때처럼 기쁘고 그때처럼 감사를 느끼던 때를 다시 맛볼 것 같지는 않다. 용도 군을 찾아오는 어린 학생들은 우리 집을 천사의 집이라고 하여 찬송과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동리 사람들은 가끔 우리 집에 웃음 구경을 오는 것이었다. 새벽에 산에 올라 기도하던 일, 길어먹는 샘물이 항상 말라서 밤중마다 물을 긷던 일, 요행 만나는 토장국 속에 숨긴 고기 부스러기 때문에 일어나는 희극 등 모두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이때에 용고 군의 몸은 무척 약하였다. 신의(新醫)도 구의(舊醫)도 몇 날 못 살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짐작하기는 군이 한강을 찾아나가 자살을 하려고 하던 때가 바로 이때였다고 생각된다. 주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 집에 더 강하게 역사하시어 어두운 구름장은 잠깐 동안에 비를 날려 우리들의 생명을 더 윤택하게 하였다. 나도 이때에 신앙의 경험을 조금씩 맛보기 시작하였고 용도 군은 이 시기가 좋은 고개를 넘으려는 준비의 첫 문이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새벽마다 산 밑의 돌 틈을 더듬어 몸부림치며 울던 용도 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죽음에 직면한 군의 기도이었으니 극히 간절하였을 것이요, 간절한 기도였으니 응당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었다.

 

 

   열정의 사역

   신학을 마친 후 나는 북간도로 파송을 받고 군은 통천으로 파송을 받았으니 남북 이역(異域)에 피차 만날 기회가 쉽지 않았다.


   통천 구역을 맡은 처음부터 근방 교회의 부흥에 진력하던 용도 군은 1930년 겨울에 벌써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그래서 1931년 이른 봄부터는 아주 순회부흥을 전문으로 하다시피 각처로 끌려다니게 되었다. 군이 이렇게 침체해가는 교회와 메마른 심령에 뜨거운 불과 새로운 원기를 불어 넣어준다는 소식을 멀리서 들은 나는 군이 간도(間島)에 좀 다녀갈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며 군에게도 여러 번 졸랐다. 그러나 원체 바쁜 신세라 그리 쉽게 허락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기도를 멈추지 않고 조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잠깐 다녀갈 수 있다는 허락이 생기게 되었다.

   용도 군이 북간도에 들어오기는 1931년 이른 봄이었고 체류하기도 겨우 2주간에 불과하였다. 2주간 체류하는 동안에 용정감리교회에서 1주일간, 두도구감리교회에서 3일간, 국자가감리교회에서 2일간 집회하고 돌아나가는 길에 다시 용정장로교회에서 2일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비록 긴 시간의 역사는 아니었으나 나타난 일로 보아서 간도 역사는 주께서 특별히 사용하시사 간도에 있는 뭇 심령들을 깨우쳐주신 줄로 믿는 바이다. 나의 심령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 심령 속에 커다란 돌을 던지었고 불을 질러 놓았다.

   군이 간도를 다녀간 후 계속하여 각 예배당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며 통회하는 일이 지나치게 격렬하다 하여 말썽이 생기고 문제거리가 되었던 것을 보아 보통 역사가 아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새벽마다 각 예배당에 기도하는 이가 그치지를 아니하였고 산상기도군의 수도 상당히 늘어났다. "우리의 무기는 오직 기도이다"라고 외칠 뿐만 아니라, 숙소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예배당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있었다. 말과 행실과 더불어 기도가 우리의 호흡이요, 생명이며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주께서 용도 군을 간도에 보내신 뜻은,

   "기도로써 다시 살아라."

   "신앙은 가슴으로 받아라."

   이 두 가지 교훈을 주려하심인 듯하였다.

   용도군의 설교의 중심점은, 현 교회에 기도가 없음을 책망하고 '가슴에 피로 받아야 할 신앙'이 두뇌로 따지어 받으려고 철없이 덤비는 오늘날의 신자를 꾸짖었다. 더욱이 교역자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꾸짖었다.

   "머리의 부분으로만 따지고 꾸며 교회를 먹이려는 교역자들이여, 가슴에 피를 쏟아 생명으로 먹이어라."

   "교제(交際)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여라"

   이렇게 외치어 교역자를 격려하였다. 그 설교가 어찌도 열렬하고 권위가 있으며 생명의 불길이 뿜어나왔던지 구경꾼에 불신자까지라도 사람의 말 같지 아니하다고 놀래었거니와 실로 성령에 끌리어 불타는 애통의 간증이었으며 천군이 호령하는 뇌성(雷聲)과 같았었다.

   청중은 울다가 무서워 떨었고 무서워 떨다가 다시 울면서도 남이 알지 못하는 시원한 맛을 가슴에 맛보게 되어, 폐회를 선언하나 헤어질 줄을 몰랐고 언제든지 집회 정각 전에 만원으로 문밖까지 여지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용도 군은 아주 딴 사람으로 변한 용도이었다. 1년 전에 보던 용도 군과는 아주 딴 사람이었다. 그리도 맵시를 잘 내던 샛치꾼이 아주 어수룩한 산골 서방님 모양으로 언어와 동작도 변하였고 의복까지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군이 도착하는 날 용정서 20리 되는 동성용(東盛湧)역까지 마중을 나가서 기다리다가 차내에서 만났는데 20분 이상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서 용정역까지 오게 되었으니, 물론 전 같으면 주고받고 말이 많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도 말 잘하던 군의 입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도 입도 꼭 잠가 닫은 듯 열리지를 아니하였다. 나의 손끝만 힘있게 꼭 쥐었고 이따금 떨려나오는 숨결만이 코가 좁은 듯 거북하게 뿜어나왔고 때로 차창을 꿰뚫어 먼 산을 바라보아 이를 악무는 비창(悲愴)스러운 태도가 나타날 뿐이었다.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다들 평안하신지요?"

   이 두 마디 말소리밖에는 더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코로 뿜어나오는 숨소리와 내려감은 두 눈초리에 맺혀지는 눈물 방울을 통하여 일생에 주고 받을 말을 다 주고 다 받은 듯싶었다. 가슴속에 끓어넘치는 사정을 말로 어찌 다할 수 있으리요. 뜨겁게 떨려나오는 숨결 한 조각, 피섞인 눈물 한 방울 ㅡ 이밖에 더 바로 더 잘 표현할 방법이 다시 없었던 것이다.

   대하는 맛이 전에 맛보지 못하던 뜨거운 맛을 깨닫게 되었다. 군이 본래 뜨거운 맛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전에 비하여 그 질과 정도가 훨씬 달라져 있음을 깨달아 알 수 있었다. 말 잘하던 달변가인 군은 무언의 침묵자로 변하였고, 애교만만한 사교적 활동가인 군은 눈물 많은 기도자로 변하였고, 맵시에 샛치꾼인 군은 검박(儉朴)한 푸석이꾼으로 변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크게 변한 것은 신앙이었으니, 인본주의(人本主義) 신앙에서 신본주의(神本主義) 신앙으로 대변한 것이었다. 두뇌로 따지어 받아들이던 신앙에서 가슴속 피로 받아들이는 신앙으로 변하였단 말이다. 군이 단에 오르면 불덩어리같이 열렬하였고 단에 내리면 어린 양같이 고요하였다. 용정에 첫날 밤 첫 찬양이 133장(멀리 멀리 갔더니)이었는데 일동이 울면서 거듭거듭 취한 듯 미친 듯 부르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불을 퍼붓는 듯 뜨거운 기도, 폭포같이 쏟아져 나오는 설교, 모두가 회중의 마음을 휘어잡아 흔들어 태울 건 태우고, 씻을 건 씻고, 쨀 건 째고, 싸맬 건 싸매는 듯 아프고도 시원한 맛을 주었다. 땅을 치며 울면서도 가슴이 시원한 맛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이상하고도 유쾌하였다. 내 일생에 제일 많이 울어본 때도 그때요, 제일 기뻐해 본 때도 그때일 것이다.


   내 심중에 큰 변동이 생겼으니 근본되는 신앙의 변화이었다. 기도한다는 일이 무엇인지 그때에 비로소 조금이라도 짐작이 생기었다. 기도는 일종의 집정작용(集情作用)으로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는 일에 필요조건으로만 알아왔던 사고방식이 크게 붕괴를 당하고 만 것이다. 기도는 내게 있는 힘을 묶어가지고 나서려는 일이 아니요, 주님의 옷단을 붙들고 늘어지는 일이다. 지혜를 쥐어짜서 계획하려는 일이 아니요, 무지의 빈 마음을 가지고 주님 무릎 아래서 명령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의 과거의 기도는 주님의 명령을 기다림이 아니었고 내가 직접 주를 대신하여 명령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기도실은 주 앞에 엎드려 명령을 기다리는 곳이 못 되었고 나의 재간(才幹)과 지력(知力)으로 사업을 계획하는 설계실로 되었던 것이다​.

   용도 군이 간도에 들어와 주를 순종하는 생활로써 나타난 일이 여러 방면으로 많았으나 거기까지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간도 황야에서 군을 만난 것이 내 생명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은총의 섭리였던 것만을 믿음으로 감사할 뿐이다. 잠 못 자고 먹지 아니한 군의 말라빠진 몸덩어리에서 짜내는 눈물과 땀방울이 어찌도 그리 많았는지, 땀이 솜옷 겉까지 베어나왔고 수건은 4~5개씩도 늘 부족하였다.

   말하는 자 그 수가 한없이 많으나 하늘의 소리를 그대로 전하는 자 드물 것이며, 하늘의 소리를 말하는 자 있다 하여도 실상은 듣는 자 또한 드물 것이다. 듣는 자 또한 있다 해도 들어 행할 자 그 몇이나 될 것인가.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지 참된 의가 나타나 용납을 받지 못하였나니, 참된 의로써 이루어지는 새 나라가 언제나 이 땅을 차지할 것인가.

   군이 간도 일을 마치고 떠날 때 나는 마침 혼춘(琿春)지방까지 갈 일이 생겨서 두만강변 상삼봉(上三峯)역까지 3~4시간 동행하였고 나 외에 몇 분 신도가 회령(會寧)까지 따라나갔던 일이 기억된다. 용정역을 떠날 때에 울면서 작별하던 교우들의 수가 어림잡아 30명 이상이었고 두도구(頭道溝)로, 국자가(局子街)로 군을 따라 울며 애쓰던 갈구자(渴求者)들이 무려 수백 명이었다.

   군이 떠난 후 각 교회마다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하는 자가 무수히 많았고 산으로 들판으로 굶으며, 헤매며 애타하던 자의 수도 알 수 없으리만치 많았다. 그 해 여름, 그 해 가을, 그 해 겨울까지에 간도 일대가 기도단으로써 큰 변을 낼 듯 굉장하게 떠들었다.​

 

 

   그의 임종

   1933년 10월 2일의 석양이 원산 광석동 골짜기에 기울어질 때 33세의 꽃다운 청춘인 용도 군은 송 부인과 영윤, 영철 군과 몇 동지를 앞에 놓고 눈을 영원히 감아버렸다. 신학생 몇 사람의 찬송가 곡조에 맞추어 맥없이 손가락으로 박자를 놀렸고 동지들이 마지막으로 물 한 술이라도 입에 넣어주고 싶어 둘러앉은 가운데 차례로 떠 넣는 물을 일일이 받아 넘기었고 마지막으로 아들의 손길도 잡아보았고 최후까지 똑똑한 정신으로 평화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그때의 내 심경을 어찌 말로써 표현할 수 있으리오. 발밑의 창해(滄海)도 단풍의 앞산도 눈에 걸리지 않았고 뜰앞에 흐르는 물소리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주 앞에 만날 수 있는 작별이며 가는 길이 승리의 길인 줄 알면서도 가슴이 빡빡하게 아파짐을 면할 길이 없었다.

   최후의 4일 간을 그의 병석에 함께 있었는데 사흘이 되는 날까지도 행여나 건강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기원이 나에게도 있었고 병자 자신도 있는 듯하였으나 마지막 날부터는 분명히 회복 못될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병자의 기운은 마지막 새벽에도 아주 명랑했고 똑똑하였다. 풀어졌던 눈동자가 반짝반짝 번갯불같이 움직이었고 음성도 똑똑하여졌고 몸을 기동하는 정도도 놀라우리만큼 자유스러웠다. 그러나 몇 시간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된 것은 군의 이야기 전부가 다 최후의 유언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상으로 하는 교회와 수양기관과 교역자는 어떤 것이라는 것도 발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부탁한 말도 많이 있었다.

   나는 아직 그때에 들은 말을 말하지 않으련다. 부탁을 감당 못하는 무신(無信), 무력한 자로 울고 있는 형편이니 붓을 들 용기도 없고 또는 아직 기회가 아니라고 느끼어지기 때문이다. 피 한 방울, 살 한 점 없이 껍질만이 남아있는 몸으로 내 눈 앞에서 숨결이 잦아지던 군의 모습을 내 또한 숨질 때까지 잊을 수 없다. 주님의 참된 종으로 피를 말리고 살을 야위어 쓰러진 군을 추억할 때마다 우둔한 내 가슴에도 귀한 충동을 많이 받고 있으며 새로운 생명이 힘있게 뛰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미 가신 용도 군!​

   군이 임종시 내게 준 유언의 부탁을 내 힘써 지켜 보려고 하노니, 주님께 구하여 나의 약함을 도와주시게.


   주님이시여, 용도 군을 통하여 나에게 주신 교훈이 한없이 큼을 깨닫게 하시고 따라서 실행할 수 있는 힘까지 주심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1935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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