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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목사를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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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24 12:56 조회2,5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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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_ 이호빈 목사  

   우리 베다니교회 유년 부흥대에서 이용도 목사를 추모하는 회합에 나가 같이 참석하게 된 것을 무한히 기뻐합니다.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끄는 바가 있어 오늘 저녁 내가 여기 오게 되었어요. 그간 안주에 가 있다가 오늘 저녁차로 평양에 왔습니다. 안주서도 용도 목사 추도 예배를 본다고 퍽 붙잡고 명촌 교회에서도 추도회에 오라고 하나 응하지 못했는데 끌리어서 여기에 온 것은 순진하고 열심있는 유년들이 끌어당김이 있어 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용도의 얘기를 하려면 몇 날을 계속해도 끝이 안 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격의 일면과 그의 생활의 편린만을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용도 목사는 어린이를 가장 사랑하였습니다. 나는 그와 같이 신학교에서 같이 배우기도 했고 기숙하에 같이 있기도 했고 돈이 곤란하여 진해, 용도, 나 3인이 작은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한방에 함께 지내기도 했으므로 잘 압니다.

   그는 언제나 말하기를 "나는 일생을 유년 사업에 바치겠다"고 했고 "유년을 위해 죽겠다"고도 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졸업하고 서로 헤어진 지 얼마 후에 장전(長箭)서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의미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형님, 놀라지 마세요. 형님 생각에도 분명히 나는 일생을 유년을 붙들고 지내다가 죽을 줄 알았지요. 그런데 글쎄 나는 지금 부흥 목사가 되어진 셈이에요. 세상 일은 알 수 없다지만 내가 이렇게 될 줄은 형이나 내나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바가 아니에요!


   그의 목표는 언제든지 유년 사업이었습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에도 그는 유년 주일 학교 일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석교 주일학교와 경교(京橋) 주일학교 둘을 맡았었습니다. 이로써도 그가 유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와 서니 마음이 아주 이상해집니다. 용도가 그렇게 사랑하는 유년들이 용도를 위해서 울려고 모여 있는 이 자리에 와 서니 마음이 이상히 흥분되기도 합니다. 용도가 세상 떠난 후 용도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개인과 회(會)가 많이 있었으나 나는 늘 피하여 왔는 바, 용도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하고 마음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할 임시에 우리 세 사람(진해, 용도, 나)은 단단한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교회에든지 파송을 받게 되면 3인이 한 교회에 파송을 받아 가지고 1인분 월급으로 3인이 살아가며 용도는 유년 주일 학교, 진해는 기독 청년회, 나는 교회를 맡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여의한 것이라 셋이 다 헤어져 나는 북간도로, 용도는 강원도로, 진해는 연희 전문 학교 입학으로 길이 아주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렇게 헤어지게 되기는 했지만 이런 생활은 몇 달이나 몇 해 밖에 안 할 것으로 믿고 우리 셋은 열심히 편지를 서로 교환하며 불원에 한곳에 모이기로 약속하며 바라며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 지경이 되었어요(눈에 눈물). 내가 전보를 받고 북간도서 평양으로 달려오니 용도가 병상에 누워 있는데 말라빠진 그 몸은 벌써 송장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되어진 모든 광경은 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나서기는 용도가 죽을 때에 한 이야기를 몇 마디 하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이상하게도 마음이 흔들리움으로 옛날이야기 하나를 먼저 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유년을 좋아하던 용도가 왜 어찌 되어서 부흥 목사가 도었을까 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싶어 하는 바요, 여러분도 궁금히 생각하겠기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용도와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진 후로는 만나보지 못했다가 간도(間島)서 부흥회를 열고 용도를 청하게 되어 그때에 만나보았고 그후에는 함경남도 영무(靈武)에서 교역자 수양회가 열리는데 용도가 인도한다기에 거기 가서 만났던 것입니다.

   영무 집회 5일째 되는 날 밤 열두시가 넘어 자려고 누웠는데 발소리가 들려오며, "형님 주무십니까" 하는 것은 분명히 용도의 음성이었습니다. 맨머리 동저고리 바람으로 와서 하는 말이, 좀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나갔습니다. 내가 문밖에 나서니 말도 없이 그는 앞서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말없이 그냥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말 한마디도 서로 안 하며 그냥 가더니 해변 송림 사이에 이르러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형님, 기도하시우."

   밤중에 무슨 일인지 몰라 나는 골이 뗑 하였습니다. 나는 곧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내가 부흥 목사로 아십니까" 하고 묻더니, 자기가 부흥 목사가 되어진 경로를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와 통천 교회로 파송 올 때는 그는 이론꾼이요, '이적'이란 말부터 싫어했고 선생님을 골려주기로 유명했고, 너무도 이지적이어서 설교도 필기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통천에 가서도 처음 일 년 반 동안은 ​제 힘으로 무엇이나 다 해본다고 노력지상주의로 나갔습니다. 제 힘으로 한다던 모든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각고 야단이 나자 속이 답답하게 되니 그때에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하더랍니다.

   몇 달 동안을 두고 산기슭에서 예배당에서 밤낮 기도를 했답니다. 어느 날 밤에도 자지 않고 예배당에 나가서 기도를 하는데 2시 경에 이르러 강대상 뒤에 있는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기에 기도를 끝내고 일어나니 소보다 더 큰 머리에 커다란 뿔이 난 짐승이 큰 눈을 번쩍이며 문에 앉아 있더래요. 그래 겁이 나서 도망을 해 나가려니까 어느 새 달려들며 앞길을 막더래요. 그래서 싸움을 시작했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예배당 문으로 ​뛰쳐나가면서 싸우는데 그놈이 내가 가는 문마다 먼저 가서 막더래요.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되어 결사적으로 달려드니 그때서야 어디로인지 없어지고 말더랍니다.

   그래서 용도는 다시 엎드러져 기도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두 시간 가량을 영광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을 강대상을 붙잡고 기도를 하였으니 이것이 용도가 자기를 잊어버리고 주님 품에 안기기를 처음 맛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두 시간 이상을 기도를 하고 나니 그 짐승이 그 교회 속장의 집으로 가려고 하더래요. 속장 집에서는 밥을 먹고 있는데 그 짐승이 그 집으로 들어가려기에 용도는 버선발로 따라가서 못 들어가게 싸웠답니다. 그랬더니 그 짐승은 또 다른 집으로 또 다른 집으로 4, 5집을 차례차례 들어가려 함으로 용도는 모조리 따라가서 싸웠답니다.

   예배당 안에서 제 정신을 잃고 몇 시간 동안 별 야단 별 고함을 다 치며 싸우는 소리에 동리가 온통 떨쳐 났답니다. 예배당에서 큰 싸움 났다고 동리 사람들이 막 모여 들었다고요. 이때에 용도의 목은 아주 꽉 쉬고 그는 맥이 아주 푹 빠져 기절한 듯했습니다.

   근처가 모여 웅성거리는데서 빠져 나오려는데 12년 동안 배교 상태에 있던 집으로 마음이 끌리기에 그 집으로 들어가서 말없이 엎드리며 "아버지……" 하니 그렇게 굳어졌던 가족이 일시에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이렇게 6, 7집을 찾아갔는데 그저 엎드려 "아버지" 소리 한 번만 찾으면 온 가족이 전부 통곡하며 회개를 하더라구요.

   이때부터 용도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만사를 온통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온 몸과 맘을 완전히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바쳤다고 합니다. 그 후 양양교회의 부흥회 인도 때에도 큰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용도의 편지를 나는 많이 받아보았습니다. 아마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받았겠습니다. 나는 원래 울지를 못하는 사람인데 용도의 편지를 받고 한 번 크게 운 일이 있습니다.

   용도가 병이 중하여 자리에 누웠는데 어떤 교회에서 자꾸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조르더래요. 그래서 죽기를 결심하고 그 땅을 향하여 집을 떠나며 쓴 편지였습니다.

   가슴이 아파 누웠던 몸에 성경 책 하나 들 힘도 없어 가장 작은 성경 하나를 겨우 들고 지팡이를 잡고 토당을 내려서서 눈물을 흘리며 정거장으로 향해 가면서 그 심중을 그려낸 편지이었는바, 하도 마음과 가슴을 뚫어냄으로 나는 그 편지를 읽다가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는 생활과 활동을 언제나 결사적으로 하였스빈다. 그는 신학교에 있을 때 여러 번 피를 토하여 벌써 죽음의 선고를 받은 지 오래였습니다. 함께 학교에 가다가 혈담을 토하게 되면 그는 자기 발로 재빨리 부비고 달라나곤 하였습니다. 졸업 후 교회 일에나 부흥회 인도에 그는 사실상 자지 않고 먹지 않고 힘써 했습니다. 그 병약한 몸으로 그런 생활을 3년이나 계속했다는 것은 제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분명히 하나님이 실려주어 산 것이었습니다.​

   그의 병이 점점 중하여져 왔습니다. 바로 운명하는 그날 새벽에는 한 시에 나를 깨우더니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전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입을 도무지 열지 않았는데 그날은 새벽 1시에 말을 시작하여 7시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유언이었습니다. 그 후는 청년들을 불러 찬송을 불러 달래고 그날 오후 1시에는 또 다시 눈이 번개같이 빛나며 말을 힘 있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과 기대는 그 형님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최후의 우리에게 향하여 들려주고 권고한 말은 두 가지입니다.


   ​① 도서실에 대한 것

   ② 교역자에 대한 것


   ① 그의 평생소원은 책을 사는 것이요,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소년, 유년에게 적당하고 필요한 책을 사들인 후 유년방, 소년방,ㅡ 청년방을 각각 따로 정해 놓고 독서케 하여 그들을 바로 길러줌이 이상이었습니다. 자기는 다니며 책을 모아올게(손을 들어 형용을 하며) ㅡ 이렇게 이렇게 쌓아놓고 어린이들을 모아다가 독서와 기도를 함께 시켜 어린이를 잘 길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② 교역자는 하늘에서 왔는지 땅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게 다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자를 데리고 다니면서는 진정한 의미의 결사적 교역은 불가능할 것이니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되기 전에는 나서지 말라고 ㅡ 기혼자는 처자를 데려다가 멀리 감추고 일에 착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① 청소년 지도에는 고요한 곳에 모아놓고 책과 기도를 주라 ② 주의 일을 하려면 가족의 책임을 벗어놓고서 하라는 것.

   이즈음에 이르러 내 생각에도 청소년을 잘 길러야 할 것과 일꾼은 가족을 떠나야겠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임종시에 그는 자꾸 평양으로 가자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덤 ㅡ 그가 길이 잠들어 누운 흙집은 평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시대부터 그는 가는과 고생으로 살아왔습니다. 양말 뒤축이 꿰어져서 주일학교 선생 하기를 주저한 때가 있었고 옷이 너무 추해서 여학생을 무서워한 때가 있었답니다. 기숙사에서 식비를 못 내서 밥 때가 되면 밥을 안 먹고 슬그머니 나가서 만월대에 올라가 공기만 마시며 달을 보기만 한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영더 먹시 ㅡ 그는 나이 비록 많지 않으나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었고 시일이 길지 못했으나 전체를 주님께 맡기고 외칠 바를 다 외치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편 불행한 자 같이 보이나 주님의 은총을 많이 받기도 하였습니다.


   죽읍시다.

   그가 다시 살아올 수 없으니 우리는 죽읍시다.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일에서 죽어지면 그와 반가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땅에서 살이 이미 썩었습니다. 이제 그가 땅 위에서 백골로 우리에게 가르침이 있고 소리침이 있으나 우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용도가 생전에 옳다고 하던 그 길을 걸어가기로 힘씀이 있어 마땅할 뿐입니다.

   땅에 ​들어가 썩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이니 죽을 때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하루를 뜻있게 살아야겠습니다. 무의미하게 살다가 땅을 치며 통곡을 해도 그것은 무용입니ㅏ. 우리는 땅 위에 살아있는 동안 일초라도 아버지의 자녀다운 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따라 땅에 피를 흘리면 땅에는 귀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거나 모르거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벨의 흘린 피가 땅에서 호소하고 있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의 의를 위하여 피와 땀을 쏟으면 하늘은 아십니다. 이 썩을 것을 위하여 허덕이지 말고 하루라도 주의 뜻대로 살다가 죽읍시다.

   용도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추도회를 연다는 것도 그 본의는 그가 가던 길을 걸어가자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가 전해 준 그 진리에 살고 그가 외친 그 교훈에 살며 그가 가다가 꺼꾸러진 그 길에서 죽는 자만이 참으로 그를 못 잊는 자요 그의 동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1935년 10월 2일

문채재 기자

 

 

​   신앙을 압제하고 민족을 약탈하며 감옥, 고문, 처형 등으로 위협하는 일제 강점기 상황 아래 이런 결사적 신앙은 시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강인하고, 적극적이며, 위대한 한 신앙형태였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가난과 총칼의 죽음을 곁에 달고 살던 때. ㅡ 허락된 일분일초, 살 수 잇는 하루하루를 아버지의 의와 나라를 위하여 죽도록 살다가 죽겠다는 신앙은 일제와 시대와 환경과 그 어떤 조건에도 굴함이나 정복당함이 없는 불패의 신앙이었다. 먼저 그때 그분들을 높여드리자. 그들 앞에 절하며 칭송을 드리자. 그 다움에는, '이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를 질문하자.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가 해야 할 것이다. 단, 그 안에 담긴 숭고한 예수신앙정신은 다르지 않으리라.

   우리에게도 한 번의 생이 주어졌다. 모든 죄를 주 앞에 털어내고 모든 의와 사랑을 주와 함께 행하고, 이것을 죽기까지로 행하는 것. 혹 피곤하고 혹 나른하고 혹 시선을 빼앗기고 혹 반대를 당하거나 욕과 노명을 받아도, 그래도 인내하고 소망하며 의와 사랑과 진리의 길을 끝까지 감에 믿는 자의 일이 있지 않은가.​

  

"주님, 문명의 진보는 우리 삶을 복잡하게 몰아가곤 합니다. 고를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 '고르는 걱정'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계산적으로 되고, 예상치 않은 손해나 희생을 당하지 않으려고 정보력을 총동원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하여, 결사적 신앙이 조금씩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몸을 사리는 신앙의 독주 시대가 되었습니다. / 주님이 주신 하루의 일분일초라도 주님의 뜻에 합한 생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려는 그 신앙, 세상의 눈이 아닌 하늘의 눈에 합한 삶으로 땀과 피를 쏟는 신학적 생활, 세상이 알아줌이 아니라 하늘이 알아줌을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죽는 길 ㅡ 그 결사적, 천애적 신앙을 회복할 수 있게 하소서. 오늘의 성도들이 진리를 붙들고 사랑으로 죽음으로써 승리하여 고 이용도 목사의 좋은 벗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칭찬을 받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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