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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용도 형님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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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25 12:55 조회2,4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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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_ 이환신(李桓極

   내가 만주 방랑의 길에서 돌아와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한 때는 서기 1923년 가을이었다. 그 이듬해 봄에 광희문교회에서 토론회가 열렸는데 '때가 영웅을 민드냐, 영웅이 때를 만드느냐?' 하는 논제로 피어선과 협성신학교가 대전하였다. 피어선측 연사로 출전한 나는 말을 해나가다가 진시왕의 예를 들어 영웅이 때를 만든다는 것은 이로써 명증되는 게 아니냐고 단언을 내린 후 하단하였다.

   그랬더니 내 뒤를 이어 저편 쪽에서 청년 하나가 나오는데 키가 자그만하고 몸이 호리호리해서 풍채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으나 그 눈의 광채가 번쩍임이 심상치 않은 인물인 듯함이 직감되었다. 아, 이 사람이 나와서 말을 한참 하고 나서 내 말을 논박하고 쳐내리는데 도무지 꼼짝할 수 없으리만치 몰리었다. 특히 진시왕의 예를 반박하는 데는 어떻게나 몰아세우고 깎아 내리는지 창피해서 얼굴이 확확 달아들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보는 사람이지만 변론 몇 마디를 들어 보아서도 비상하게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청년에게 내 마음이 푹 끌리었으므로 폐회 후 나는 곧 그와 인사를 했다. 아까도 이름을 들어서 알았던 바이지만 분명히 이용도라는 청년이었다. 이날 밤 우리는 서대문까지 전차를 타고 와서 서로 헤어졌다. 이후부터 우리는 노상 혹은 특별한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1924년 5월 이호빈 형이 신학교를 나오시었다. 호빈 형과는 2~3년 동안 간도 벌판에서 동고동락하였고 생사의 경(境)에 손잡고 다니던 일이 있었으니 이미 친교가 깊었었다. 그래서 그 해 가을에 나도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나는 곧 용도 씨를 소개하였다. 이때에 호빈 형은 신학교 기숙사에 계시고 나와 용도 씨는 피어선 기숙사에 유하고 있었다.

 

 

   그의 성격과 재질(才質) 

   용도 씨는 두뇌가 아주 명민했고 경우에 밝고 사리에 명백철저하기로 유명했다. 시비를 가르는 데 있어서 그렇게 지독하고 무서운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무슨 논쟁이 생기게 되면 그는 발벗고나서 달라붙었고 조금이라도 경우가 틀리게 되면 막 들이대고 조목조목 따졌다. 좀 어름어름 하다가는 용도에게 경을 단단히 치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 따위 수작을 하느냐고……."

   그는 말하자면 극단성의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우정이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는 '내'가 없고 '내 것'이 없는 듯이 아주 탁 쏟아놓고 지내다가도 한번 무슨 논쟁이나 승강이가 생기게 되면 절대로 지려는 마음이 없었고 또 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거나 자기에게 어떤 주장이 생기면 그때에는 천만인 앞에서 굴함이 절대로 없는 특성을 가졌음을 여러 가지 실례로 보아서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아주 맺고 아주 지독하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 재간이 비상하였다. 찬양대에서 유력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음악을 잘함을 알 수 있었고 또 극(劇)을 대단히 좋아하고 또 그의 출연은 귀재라고 하리만치 천재적 묘기를 가졌다. 특히 비극의 주인공으로 나서면 못 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 외에도 가극을 퍽 좋아했는데 가와 극을 다 좋아하는 것이 결국에는 가극을 즐기는 데 이르렀던 것인가 한다. 그는 많은 가극을 썼고 또 자신이 연단에 나서서 출연도 하였다.

   어쨌든 신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못하는 노릇이 없는 만능적 천재요, 안 참여하는 데가 없는 호동적(好動的) 학생으로서 만인의 총애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지내는 학생이니만치 공부 한 가지만 드려 파내는 학생과 같이 성적이 좋을 수는 없었다. 분명치는 않으나 그때 영문과 졸업반의 종업 석차는 정경옥, 유자훈, 이용도의 순이었다고 기억된다.

 

 

   삼이(三李) 형제 

   언제 어디서라고 명언하기는 어려우나 우리 삼이(三李)는 퍽 가까워졌다. 3형제라는 시기와 비평을 받게 된 것도 그 후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학생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주목하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 셋은 결정적으로 가까워졌다. 결국은 본격적으로 친형제 관계가 맺어지고야 말았다.

   셋이 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므로 우리는 현저동에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던 시대도 있었다. 이때에 즐거웠던 생각, 이때에 자유롭게 활기펴고 뛰놀던 생각을 하면 직므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참으로 이때의 그 재미스럽던 여러 가지 장면은 붓으로나 입으로나 다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다.


   신학교의 삼이형제라면 신학교 밖의 사람이라도 신학교에 좀 자주 왕래하는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졸업하기 전후하여 양주삼 총리사님께서도 우리 셋을 모아 놓고 "되도록이면 3인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힘써 주겠다"고까지 하셨던 것이다. 총리사님이 이런 말씀을 안하시더라도 우리 심중에는 이미 계획과 안이 서있었다. 즉 한 사람의 월급을 받으며 셋이 한 교회를 맡아가지고 호빈 형님은 교회 치리(治理), 용도 형님은 주일학교부, 나는 청년회 일을 하기로 생각했었다. 물론 졸업만 하면 곧 실천에 착수하려고 졸업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졸업을 하고 나니 우리 셋은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부딪쳤다. 즉 호빈 형님은 이미 간도지방에 파송을 받아 가족이 다 그곳에 가 있었으니 그리로 안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용도 형이 간도로 가기로 했다. 양 목사님의 양해와 진력으로 용도 형도 간도로 가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원산지방에서 장로사 부라만 씨가 용도 형을 꼭 붙잡고 절대로 놓지를 않았기 때문에 간도행의 계획은 아주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용도 형도 다른 곳에는 절대로 안 가겠다고 하고 간도에만 간다고 뻐기었으나 부라만 씨가 너무도 간절히 붙잡음에 성의대로 한다고 붙잡힌 것이다. 용도 형이 간도로 갔다면 나도 물론 간도로 가서 셋이 간도 벌판에서 한참 일을 하다가 죽어지고 말던가, 사는 날까지 살았을 것인데 용도 형의 일터가 원산지방으로 확정되는 바람에 나는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두 분이 다 계신 곳이라면 나는 물론 따라가겠지만 어느 한 분만 따라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 분이 없어 섭섭할 생각과 떨어져 있는 다른 한 분의 외로움이 너무 클 것을 생각할 때 '이왕 팔자가 이렇게 된 이상에는……'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연전(延專) 문과에 입학을 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몇 날 전까지도 가슴에 그리고 있던 이상과 밤낮 꿈꾸고 있던 아름다운 꿈은 완전히 깨어져버리고 정든 3형제,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살듯하던 3형제는 "아무 때에라도 한 곳에 모여 이랗다가 한 구멍에 묻히자"고 약속을 굳게 하면서 동서로 남북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연연한 정의 구체적 발현 

   연희전문에 입학한 나는 제2학년 여름방학에 순회 강연대를 조직하였다. 물론 가려는 노정은 강원도 동해안을 목표로 했다. 가서 용도 형을 만나니 반가웠다. 너무도 반가움에 나는 그날 밤 강연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문제 하나를 형이 먼저 꺼냈다.

   "자. 우리 이렇게 해보자고. '3 · 1당'이라고 이름을 짓잔 말이야. ① 삼위일체를 믿고② 지덕체(智德體) 삼육(三育)을 이상으로 해서 ③ 삼이(三李)가 일체가 된다는 의미에서 말이야."

   이 안을 결정한 우리는 손을 붙잡고 울었고 가슴을 안고 울었다.

   이때에 멀리 간도에서 삼각산 도선사의 수양회에 오시는 호빈 형을 원산에서 만날 수 있었으므로 거기서 우리는 우리 3인의 일체를 또 한번 구체적 문구로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손은 영원히 한 손으로 붙잡혔고 우리의 몸은 영원히 한 몸으로 묶이었다.

   아마 내 일생에 있어, 우리 셋이 다 각각 그 생에 있어서, 이렇게 기쁘고 이렇게 희망이 가슴에서 뛰는 때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때를 내 생에 있어서의 재봉춘(再逢春)이라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이별! 또 이별! 영 이별! 

   헤어져 사는 우리는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굳게 하며 각각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어느덧 4년이 지나 나는 연전을 졸업하게 되었다. 지난 해 겨울에 용도 형이 주일학교연합회에 와계시게 되었고 1931년 5월에 가족이 다 서울시 현저동으로 이사를 해왔으므로 한 지체를 멀리 떼어둔 편신(片身)들이나마 시간을 얻어서는 만나고 기회를 타서는 모이어 기뻐하고 좋아하였다.

   이러다가 나는 여름 7월에 좀더 배워 본다는 생각에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따. 내가 떠나는 날 용도 형이 경성역까지 나오셨다. 많은 사람이 전송을 나왔고 여러 사람이 내 손을 잡았으나 그 중에서 가장 힘있게 내 손을 잡아준 이는 우리 형님 용도 씨였다. 모자를 내두르는 형의 그림자가 점점 작아질 때 내 마음에는 큰 슬픔이 왔다.

   한번 떠나 몸이 만리에 헤어지니 소식도 자ㅈ 통하지 못하였다. 첫해에는 그래도 간단한 문안만은 이따금씩 통했으나 얼마 후에는 소식조차 듣기가 어려웠다. 형이 대단히 약해진 몸과 필사적 사역을 하시는 것을 보고 떠나온 나는 생각이 고국으로 향할 적마다 형의 생각에 염려를 많이 하였다. 컬컬한 생각대로 한다면야 날마다 편지를 써 보내도 흡족함이 없겠지마는 원래 미국 유학이란 것이 푼, 초의 여가도 없는 골몰한 생활임에 나는 편지도 자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지나는 동안에 세월은 그냥 흘러 1933년 초겨울에 이르렀다. 잊혀지지도 않는 10월 10일, 나는 호빈 형의 편지 중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으니 용도 형의 부보(訃報)가 그것이었다. 첫 순간에 나는 머리가 아찔하고 가슴이 찌르르하더니 그 다음 순간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을 뿐이고 다른 느낌이나 생각도 없어졌다. 그 후에 나의 의식에 떠오른 생각은 그저 '이제는 내가 …… 하여야겠구나' 하는 사명감에 가슴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1935년 7월 미국에서 귀국 직후 평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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