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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그는 분명히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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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26 13:02 조회2,5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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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_ 이호운(李浩雲)

   신학교에 입학하려고 올라와서 하루는 신학교 기숙사 신세를 지고 이튿날 나는 오상훈 형과 둘이서 현저동으로 이 목사님 댁을 방문하였다. 목사님은 출타하시었으나 목사 부인의 친절한 영접을 받아 방에 들어가 앉았다.

   잠시 후에 목사님이 들어오셨다. 목사님은 참으로 퍽이나 친절히 응대하신다. 얼마 동안 이야기를 한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나서려고했다. 눈치 빠른 목사님은 벌써 아시고 내 손을 붙잡으시면서 시험 다 치르기까지 집에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에 더 없는 영광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원체 손님 많은 목사님 댁에 나까지 식객이 되어 폐를 끼친다는 것은 너무나 미안하므로 나는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목사님의 그 열애(熱愛)와 적성(赤誠)은 나의 사양을 정복하고서 나를 주저앉히고야 말았다. 나는 한편으로 미안을 느끼면서도 감사의 눈물과 감사의 기쁨 속에서 그 댁에 유하기로 했다.

   목사님 댁은 작은 방이 둘밖에 없다. 그런데 목사님 댁 식구 4과 다른 손님 두 분이 계시니 나까지 합하면 정숙객(定宿客)이 7인이 되는 셈이다. 좁다란 서울 방 두 칸에서 7인이 뒹굴게 되니 그 불편은 말할 것없다. 가끔 방문객이나 오면 집안 식구는 문밖에 섰거나 뒷산으로 올라가야 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끼니때도 뜻하지 아니한 식구나 한둘 오게되면 밥이 한 공기씩 돌기도 한다. 그것도 채 못 돌기도 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나는 신학교에 입학이 되었다. 같이 있던 박송죽 양도 합격되었다. 우리의 기쁨도 컸지마는 목사님은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큰 걱정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보내주겠다는 곳에서 학비가 올 수 없게 됨이었다. 그렇다고 목사님의 댁에서는 하루도 더 있을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나는 걱정 아니치 못하였따. 이때에도 목사님은 벌써 눈치로 다 짐작하시고서,

   "내 호운이한테 청이 하나 있어. 다른 데 갈 생각 말고 나와 같이 있어야 돼" 하시는 것이었다.

​   나는 안 그러려고 하면서도 미안한 빛을 보였던 모양이다. 이때도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호운이, 조금도 미안해 하지 말아요. 이 집이나 이 밥은 내 것이 아니오. 이 집에는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으니 염려 말고 주인 노릇이나 잘하라고."

   나는 너무도 황공하고 감사하였다. 나와 같은 형편에 있는 박 양도 나와 같은 감격으로 나와 같이 목사님 댁에 유숙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사오삭(四五朔)동안 나는 목사님과 같이 기거숙식(起居宿食) 하면서 충성된 구도자의 활역사(活歷史)를 배우게 되었다​.

 

 

   따뜻한 가정

   현저동 생활의 몇 달 동안은 퍽이나 유쾌하였다. 목사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었다. 내가 세상에 나온 후 이때까지 이 목사님처럼 나를 사랑하신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만치 나는 그의 사랑을 심각(深覺)하고 있다. 나는 목사님에게 무상의 존경을 드리면서 또한 심절(深切)히 친할 수가 있었다. 그저 만나기만 하면 가슴이 시원하고 언제까지든지 마주 앉아있고 싶었다. 그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있는 일이 없고 또 무슨 경우에든지 떨떨해서 어물거리다가는 큰 경을 치는 것이었다. 경이라고 하니까 매를 맞는 것이 아니다. 목사님이 그저 고개를 소곳하고 무슨 일이나 무슨 심부름을 당신이 몸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내가 내 손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일감을 앞에 두고는 참지를 못하시는 성질이었다.

   남의 사정을 보는데 목사님같이 알뜰한 이는 없을 것이다. 그저 살아리도 베어 먹이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것이었다. 내게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있는 눈치를 보시면 무엇이든지 당장 주시기에 급급하시었다. 부인께 말씀디리기가 바까서 손수 귀짝을 들추고 가방을 텅어가며 내의, 양말, 수건 같은 것을 있는 대로 털어주시곤 하였따. 이런 때는 감사하다못해 도리어 민망히 생각되었다.

   참으로 목사님은 나에게 있어서 친형보다도,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해 주시는 어른이었다. 끼니때는 목사님이 손수 밥을 퍼주신다. "내가 먼저 퍼먹을 테야" 하시면서 밥주걱과 강끼를 빼앗아 가지고는 "자, 호운이 내가 퍼주는 밥 먹으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먼저 주시었다. 밑을 둘러 더운밥을 잔뜩 담고 꼭꼭 눌러서 주시는 것이었다. 찬도 맛있음직한 것은 내 편으로 자꾸 밀어 주셨다. 아무렇게 해서라도 좀 잘 먹이고 좀 많이 먹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모양은 나의 눈으로 언제든지 감사의 눈물에 젖게 하곤 했다.

   현저동 이 목사님 댁은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본 따뜻하고 사랑에 넘치는 가정이었다. 아침저녁 찬송과 기도소리가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이 목사님의 가야금 타는 소리는 이 집에 한층 더 낙원미(樂園美)를 더하였다. 조석의 끼니에는 찬송, 성경 낭독, 기도가 있고서 식사를 시작한다. 이 댁에는 의외의 손님이 가끔가끔 식탁에 둘러붙어서 밥이 부족되기가 보통 일이었다. 방도 좁지만 식탁도 좁아서 손님이 한두 사람만 와도 정면으로 앉지를 못하고 모재비로 앉아 한편 무릎만 내밀고 앉아 먹게 된다.

   이 집에는 대놓고 늘 먹는 식객도 많고 한 끼 두 끼 짬짬이 와서 먹는 손님도 많았다. 그래서 이 집 대문은 이들 손님의 출입 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그것을 겨워하거나 싫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누구든지 그런 기척을 조금이라도 보였다가는 큰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오든지 다 내 식구로 대하고 누구든지 이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는 이 집 식구의 자격과 권리를 주는 것이다.

   목사님은 이 집의 식구라기보다 다른 집 식구라고 할 만큼 집에는 못 계시었다. 그 목사님이 집회를 마치시고 돌아오실 때는 벌써 초벌 풀은 푹 죽어 들어오시는 것이다. 방 안에 들어서시면서 그냥 자리에 쓰러지신 다. 누우시면 운신도 못하고 너무 맥이 없어서 잠도 못 주무시고 음식도 못 잡수시며 그냥 뒤채기만 하신다. 그러면서도 말씀하신다.

   "나는 집에 와서 쉬면 안 돼. 그저 강단에 나서야 밥도 먹고 몸도 성한 모양이니."

   그래서 목사님은 그렇게 지치신 몸을 가지고도 하루도 쉬시는 것은 원치 않으시고 그저 결사적으로 단에 올라서고 소리 높여서 외치시는 것이었따. 그리고 목사님께서 집에 들어오신다 해도 집이 휴양처는 못 된다. 성경 보시기와 기도하시기에 있는 시간을 다 허비하신다. 그리고 목사님이 어디 갔다가 돌아오시기만 하면 어떻게 그렇게 알고 찾아들 오는지 방문객의 행렬이 끊임없다. 누구든지 찾아오기만 하면 곧 자기를 내버리고 그를 성심으로 응접하신다. 만일 무슨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왔으면 그를 해결해 주기 우하여 같이 의논하고 연구하고 설명하고 또 기도하기에 온 하루를 다 보내신다.

   만일에 신앙 문제에 대한 어떤 논의가 생기면 금방까지 노그라지셨던 목사님에게 어디서 그렇게 힘이 오시는지 그냥 열이 올라 대설교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바로 소(小)부흥회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자는 돌아갈 생각을 잊어버린다. 일어서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아침에 온 이가 저녁 때에 가기도 하고 혹은 저녁 먹고 밤 지내고 조반까지 먹고 가기도 한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토론을 하고도 흡족하지 못하여 산으로 끌고 들어가서 밤새도록 기도로 조르기도 한다.

   혹시 하루 이틀 동안에 집에 계시게 되면 목사님은 성경과 신학 서류와 성자 전기 등을 많이 읽으신다. 그는 [성프란시스전]과 [성어거스틴전]을 애독하셨다. [성어거스틴전]은 목사님 자신이 손수 번역까지 하셨다,. 성저의 전기를 읽으실 때마다 그의 가슴은 존경과 동경의 피가 뒤섞였었고 각오와 결심에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의 최상의 동경은 성자적 생활이었고 그의 지대(至大)의 기원은 '전체를 주께 바치고 사는 생활'이었다. 그래서 그는 프란시스코를 무척 존경하고 그 생활을 동경하였다. 그가 몽중에도 쉬지 않고 올리는 기도는 아무쪼록 진리를 좀더 알아보고 아무렇게 해서라도 주님의 뜻에 좀더 충순(忠順)해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요, 하늘이 보낸 천사로 알아 존경하며 받들어 섬겼고 목석에서라도 진리를 배우려고 노력하시었다.

   "주여, 이 미련한 인생으로 하여금 바위틈에 서서 절개를 지키는 소나무를 배우게 해주시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을 배우게 해주소서" 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가 입류(入流)를 용인했다는 것도 오직 단지 진리를 사모하고 주의 음성을 들어보려는 열광적 기도의 새빨간 일념에서이었음을 나는 확신하고 또 명언한다. 가는 거지와 한가지로 숙식하기를 즐겨했고 정신이상자와 어린아이의 말에도 주님께서 나에게 내리시는 어떤 교훈이 있지않는가 하여 겸비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와서 원산의 예언파와 관계 끊기를 충고할 때도 말씀하셨다.

   "사람이 다 그들을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을 버리시지 아니할 것이니 내가 어찌 그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저들과 한가지로 이단 소리를 듣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세상에서 버림당한 저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저들이 정말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저들 속에 만일 작은 진리가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그 진리만은 달게 받아 배우려고 합니다."

   "주의 전을 위한 간절함이 나를 삼켜 멸하게 하리라" 한 말씀이 주님께 응함 같이 진리를 위한 간절한 일념이 그로 하여금 '이단'의 명패를 차게 하였다.

   그는 수도생활을 퍽 염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수도생활의 구체적 조직계획을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다가 마지막 한탄은 당신의 사정이 그를 허락하지 않음을 슬퍼하시었다. 수도생활을 원한다고 해서 그가 염세적 고피주의자는 아니다. '어찌하면 주의 참된 종이 되고, 어찌하면 단 하루라도 주의 뜻에 ​어그러지지 않는 생활을 해볼 수 있을까' 하고 밤낮 기도하고 연구하여 얻어진바 결론이 수도생활이었다.

   그가 늘 원하는 바는 한적한 시간을 얻어 마음껏 기도를 올리는 것이요, 주님과 대좌하여 그 사랑과 그 진리를 배우는 것이요, 명상하고 사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정과 조선 교회는 그에게 그 원을 잘 안 이루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고요한 수도원 생활을 동경하였다. 그의 가슴속에 깊이 감춘 소원은 그렇게 강단에서 외치며 다니는 것보다는 십자가를 지고 말없이 거꾸러져 죽는 것이나 어느 작은 한 사람을 붙들고 그를 섬기다가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수도원에 대한 연구를 늘 하시었고 수도원 실현을 위하여 늘 기도하시었다.

 

   그는 가끔 나에게 충고를 하시었다., 알뜰한 정으로 부탁을 하시었다.

   "호운이, 장가가지 말고 독신으로 일생을 살라고. 이 몸을 전체로 주께 바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자기의 전체를 그대로 주께 바치고 싶으면서도 가정 형편상 그리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는 목사님은 자기는 못하여도 나만은 주 앞에 완전히 바치는 자 되기를 간원하셨던 것이다.

   참으로 목사님은 늘 주의 참된 사자를 기다렸다. 그래서 시므온이 주를 본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자기도 시므온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하셨다. 그는 편지를 쓸 때는 흔히는 '是無言'으로 쓰시었다(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몇 자 쓰겠다. 시므온은 말없이 오랫동안 주를 기다리었다. 그러다가 성신의 지시로 주님을 만날 때 한없이 기뻤다. 그래서 하니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축복한 후 모든 사람에게 주님을 소개한 후 사라졌다). 목사님은 언제나 시므온과 같은 자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었다. 자기가 가장 부족하고 약한 종인 것을 자각하신 그는 이 세대에는 어서 바삐 주님의 참되고 힘 있는 주의 사도가 나타나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바래었다.

   "저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할지라"(요3:30)고 한 요한과 같이 자기를 숨기고 참된 사도를 내세우시려고 무척 애를 쓰시었다. 마치 시므온이 성전을 드나들면서 뭇 아이를 항상 주목하여 보았던 것과 같이 목사님도 역시 늘 심중에 이 시대의 예언자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언제나 사관에 전 주의를 다하여 눈앞에 지나가는 일만 사람을 유심히 주시하시었다. 그는 참으로 참된 주의 사자 하나를 만나보고 죽기를 퍽도 갈망하였따. 이렇게 간절한 소원은 꿈에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은 꿈에 그 사람을 만나신 것이다.

   "비몽사몽 간에 나는 종로 대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차마(車馬)가 복잡한 그 거리에 한 거대한 사람이 우두커니 섰기에 나는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그는 마치 세례 요한같이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옆에 물병을 차고 손에는 기다린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머리털이 길게 늘어졌으나 그 위풍은 참을 당당하여 감히 우러러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는 그 거리 복판에 버티고 서서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를 한참 동안 하더니 소리를 높여 '회개를 하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둘러선 사람들이 욕을 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비웃으나 그는 오직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라고 외치었습니다. 나는 너무 기뻐 그의 곁에 바싹 들어서니 나는 그의 허리에도 차지를 못하게 그의 키는 컸습니다."

   이것이 목사님의 꿈꾼 이야기다. 목사님은 곧 나를 앞에 엎드리게 하고 ​이 기도를 올리시었다.

   "저는 말할 수 없이 부족하올시다. 가장 큰 죄인이로소이다. 또 가장 야갛고 가장 불충한 자식이로소이다. 주여, 이 세대를 위하여서 언제나 참된 종을 보내시려나이까? 주여, 어서 참된 예언자를 보내어주시옵소서. 주여,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누구이겠습니까? 나에게 가르쳐주시옵소서. 나는 기쁨으로 그에게 수종들겠나이다."

   목사님은 모든 사람을 다 극히 주목하여 보시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존경하였고 천사같이 접대하시었다. 그는 항상 예언자를 찾으시었다. 얼마 후에 목사님은 원산방면으로 여행을 가시고 나는 기숙사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목사님을 뵈올 기회가 드물었다.

   그 뒤에도 그는 쉼 없는 과로를 계속하시다가 몸에 병이 중하여지셨다. 다음 해 봄에는 연회(年會)에서 쉬라는 통고를 받아 휴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쉬려고 하지 않았고 또 여러 가지 형편은 그를 쉴 수 없게 하였다. 내외의 사정은 그의 심신에 안식을 주지 않아 그의 영육은 날로 피로를 더하고 있었다. 여러 친우들의 권고로 그는 정양의 땅을 찾아 평양 대보산, 삼방, 원산 등지로 유전하시었다. 그러나 그의 병은 날로 심중하여 갔다. 그래도 그는 앞으로 좀더 일할 기회가 있기를 바랬다.

   "내가 죽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아있어 여호와의 행하심을 전파하리로다"(시118:17)라고 하는 말씀을 읽어 자기가 좀더 세상에 남아 있어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신병을 비관치 않으셨다. 생각하면 그의 일생은 육체를 무식스러이 혹사하는 생활이었으나 때로는 자기는 '죽음이라는 복도 그리 속히 받을 수 없는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활의 전부는 오직 주를 위해서이었다. 몸을 돌아보지 않고 무식스러이 살아감도 주의 명령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이었고 병이 중하여짐에 건강 회복에 작은 정성이라도 바침도 좀 더 살아서 주의 말씀 몇 마디를 더 외치기 위해서이었다.

   참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요, 죽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만 있어지기를 우너하는 것이었다. 밤잠을 안 주무시고 끼니를 잊으시고 땀을 쏟으시고 목이 터지도록 외치시고 웃으시고 안타까워하심이 주를 위해서이었던 목사님이 병든 몸으로 여기저기 유전하심도 오직 주님의 사업을 위한 애끓는 충성에서임을 나는 확언하는 바이다.

   목사님 자신에게 있어서 생은 사(死)보다 훨씬 더 괴로운 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가 편안하기 위해서 생을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그의 지상에서의 충성과 공적을 기뻐하시며 그 괴로운 신세에 그 이상 더 오해와 천대와 구박이 임하는 것을 애처로이 생각하시사 '죽음'이란 은총의 손을 펴시사 당신의 보좌로 끌어올리신 것이다.

   목사님 별세의 비보를 나는 서울에서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슬픔보다 감사가 컸고 그 감사보다 아픔이 퍽 더 컸다. 자나 깨나 잊지 못하시는 이 땅의 어린 양을 흩어진 대로 그냥 놓고 가시는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함에 나는 울었다. 그는 우리를 두고 그만 가시었다. 우리를 잊지 못하면서 하늘나라로 가시었다.

   그는 비록 가시었으나 하늘에 계셔서도 우리를 위하여 축복 기도를 항상 계속하고 계실 것을 나는 믿는다. 아니다. 그보다도 그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살아계신다. 그가 흘리신 눈물과 땀과 피 속에서는 지금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그가 한 번이라도 다녀오신 곳에서는 좋은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하늘에서 영생을 누리는 나의 목사님 이용도 씨는 이 땅 위에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불러 '성자'라고 한다. 과연 그는 내가 본 성도 중의 첫 사람이다. 내가 말하고 또 믿는 성자에 대한 개념이나 표본은 고 이용도 목사님이다. 나는 모른다. 아직까지도 그에게 이단이라는 명패를 채워두기를 원하는 이가 몇 분이나 되는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단이라고 쓴 그 글자가 추하게 보이지 않고 성자의 명예를 더 빛나게 하는 훈장으로만 보여지는 바이다.

 

1936년 10월 2일

 

   이때로부터 약 30년이 흐른 뒤 이호운이 다시 쓴 글의 일부만 보면 아래와 같다.

 

   내가 50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귀었다. 혹은 스승으로 혹은 친구로 이웃으로 동역자로 제자로 적잖은 사람들을 사귀어 왔다.

   그들이 모두 크나 작으나 내 마음속에 다소간의 인상을 주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대부분은 내 기억과 인상에서 사라졌지만 세월이 흘러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내 마음 속에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닌 나의 신앙과 인격 구성에 크고 깊게 영향을 주신 어른이 있으니, 그가 이용도 목사님이시다.

   나는 일찍이 그의 말에서 거짓이나 꾸밈을 찾아보지 못했고 그의 태도에서 교만이나 미움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부드러움, 그 자애로움, 그 겸허함이 나아게 큰 위안과 격려와 교훈을 준다.

   그는 짧게 살았다. 그러나 굵게 살았따. 1933년 10월 2일 아직도 30대를 다 못 넘긴 33세의 젊은 나이에 몇 사람에게 들리어서 외로이 숨져갔고 그의 무덤은 원산 산제동에 평토장으로 묻혔다. 아까운 죽음이었고 애석한 요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다 .셩경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그의 열심이, 주님의 뜻만을 위해 살고 주님만을 위해 살려고 발버둥 치던 그의 소원이 아직도 수없이 많은 영들 속에 살아있다.

 

   금식과 철야와 절규로 지내는 2주간, 3주간의 부흥 집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새가 그리워서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현저동 조그만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모두 꾸역꾸역 모여든다. 부인과 가족들에게는 야속스럽기도 하나 그렇지만 여러 주간 동안 불면불류의 고전을 치른 뒤 파김치가 되어 드러누웠던 그는 어디서 새 힘을 얻었는지 자택에서 다시 부흥회를 벌이는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설교를 계속하고 밤이 되면 오히려 부족하여 현저동 교도소 뒷산 '둥그재' 솔밭으로 올라거서 송충이 들끓는 속에서 꼬박 밤을 새우는 것이었다.

   영들을 아끼는 애타는 마음, 그리스도를 위하는 뜨거운 마음은 완전히 자신의 괴로움, 생명까지 잊고 필사적으로 있는 것 전체를 바쳤다. 편(便), 불편(不便), 이(利), 불이(不利)가 안중에 없고 죽고 사는 것도 문제 밖이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이며 그를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이었다. 그리스도에게 취하고 미친 사람이었다. 그가 무엇을 했다면 그리스도를ㄹ 위하여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한 것이요, 혹시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그의 본심은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것이 잠시 동안 실수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거지가 오면 거지와 겸상을 해서 같이 식사를 하고 고학생이 있으면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했다. 그래서 좁은 집에는 언제나 식객이 우글우글했다. 양말이 째졌으면 양말을 주고 내의가 해졌으면 내의를 벗어주었다. 자기가 신고 입을 것이라도 그대로 집어 주는 것이었다.

   내가 식객이 되었을 때에도 너덧 사람의 식객이 상주하고 있었다. 한때는 쌀이 떨어져서 우리들은 저녁과 조반을 굶었다. 부인은 우리 얼굴을 바라보며 오히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장인 영감은 건넛방에서 못 마땅해서 얼굴을 찌푸리고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는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여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가져다 놓고 자기는 거문고를 타며 기도회를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맥없이 찬송을 부렀다. 그러나 차차 열심과 힘이 생겨서 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일이 있다. 점심때쯤이나 되엇 쌀가마가 들어와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동안의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사실인즉 단골 쌀집이 있었는데 김좌진 씨 유족 가정을 심방 가셨다가 모두 굶고 앉아있는 것이 딱해서 자기 집에 가져올 쌀을 그 집으로 배달시켰기에 굶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가끔 있었다. 남몰래 하는 일이 더 많았다. 자기 부족에 대한 통회의 기도, 진리를 깨달은 때에 희열에 넘치는 환희, 남을 돕지 못해서 애타하는 모습 등은 잊을 수 없는 그의 모습이었다.

 

<기독교사상> 제9권 8호. 1965년 8, 9월 합본호(통권 제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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