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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무진無盡의 영양소, 그 설교, 그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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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30 13:10 조회2,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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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 : 한의정(韓義貞)

   용도 형을 알게 된 후로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인상 중에 가장 뚜렷한 것은 1929년 9월 하순경의 일이다. 경성에 왔던 나는 원산에 잠깐 들러 주일예배나 보고서 만주로 가려고 아침 7시 반 차에 우너산에 내려 마르다윌슨 신학원 기숙사를 찾아가니 사감 노정숙 선 선생이 끔찍이도 반가이 맞아주시었다. 사생 일동과 식탁을 함께 한 후 학생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구역으로 파송을 받아 나감으로 나도 예배당을 향해서 나섰다.

   처음에는 전날 내가 맡았던 석우동장로교회로 가려고 했었는데 몇 걸음 가노라니 웬일인지 남초농감리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바 있었다. 물론 남촌동교회에는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으로 나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장로교회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일 줄 알았는데 예배당까지 가니 ​벌써 예배회가 시작된 모양이다. 단상에는 설교자가 말을 하는데 문제는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리라"는 말을 가지고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그 어조나 태도가 너무도 열렬하고 통절하여 그 한마디 한 마디가 모두 사람의 말이 아닌 신의 권능이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왔다. 예수 믿은 지 20여 년에 처음으로 듣는 설교이었다. 2시간의 대설교이었는데 들은 말 중에 이 몸이 육신을 벗어 영이 천계를 향하는 때까지 잊지 못하고 머리에 길이 남을 것이 있다.

   "스스로 생명적 노력을 함이 없는 자는 지옥의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천지에 자라나고 있는 식물이 다같이 자연의 혜택을 받되 뿌리가 깊이 박히고 생명적 노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면 태양의 폭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풍우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 잎이 푸르러 윤택한 빛이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그 키가 크고 무성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마지막 귀중한 성공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체의 생명력을 잃은 자는 따뜻한 태양과 난풍세우(暖風細雨)도 도리어 그에게 저주할 만한 화가 되어 날로 시들고 말라 결국은 앙상한 뼈다귀만 남아 사멸의 비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부모여, 여러 형제자매여, 여전히 당신들은 사해(死骸)에 예수란 탈을 씌워가지고 얄미운 하나님 노릇을 하시렵니까? 꺾어다가 꽂은 꽃은 불과 수일에 말라 버리는 것이며 내 것이 없이 남의 것을 빌어먹는 거지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를 줄을 알지 못하니, 어느 때까지나 뿌리에서 끊긴 푸른 빛을 가랑하며 남이 벌은 영양을 빌어먹는 거지 노릇을 하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이대로 계속하다가는 결국 한때에 이르러 암흑, 파멸, 비애, 절치, 원한을 당치 아니치 못할 것이니 생명인 예수를 생명적 노력으로서 받아들이십시오."

 

   ​이 2시간 동안에 피땀을 쏟으며 외치신 말 중에서 지금까지 분명히 기억되는 것은 이상의 몇 마디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이때에 나에게 큰 충동을 준 거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죄악을 발견하게 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주를 믿어왔으나 가슴에 뜨거운 영적 감동을 받아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요, 신앙적 회오(悔悟)를 포함한 눈물의 기도를 올려보기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심에서 끓어오르는 충성으로 스스로를 죽여 제단 위에 던져 피땀으로써 주님께 드리는 제주(祭酒)를 삼은 그 청년, 검소한 그 차림, 거룩한 그 얼굴 ㅡ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교파가 다르고 지인이 없는 낯선 교회이니만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오후 3시차에는 만주로 향하여 떠날 몸인 것을 생각하니 그냥 발길이 돌아서지를  않는다. 다시 들어가 문에 선 어떤 부인에게 물으니 통천에서 오신 부흥 전도사인데 산제동 여자성경학원에서 모셔오셨다고 하며 그의 이름은 모른다고 한다.

   할 수 없어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O선생을 찾아서 산제동서 부흥회 인도하시는 목사를 모시어다가 우리 학원에서 부흥회를 열겠다면 나도 몇 날이든지 더 묵어 있으면서 참예하겠다고 청을 했으나, 위험 분자이니 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 나는 선생님 말씀이라면 진리에 과히 어그러지지 않는 한 곧잘 순종해오던 때이므로 그 말이 옳은가 보다 하고 그날 오후 3시 차로 입북하고 말았다.

 

   3년을 지난 어느 날 간도에서 기도 생활을 하는 어떤 동지와 신앙담을 나누는 중에 통천에 유명한 부흥목사가 있는데 이용도 씨라는 이로 전선각지(全鮮各地)에서 큰 역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니 우리 용정교회에서도 한번 청하려고 한다는 말에서 비로소 3년 전 그 청년이 이용도 목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1931년이었다. 명석동 248번지에 셋방을 얻고 38동지가 한 집에 기거하며 교회 일을 돕고 있었다. 나는 선교부 일을 맡아보게 되었으므로 좀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7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앉았노라니 5~6인의 일행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동생 준명(俊明) 한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음력 6월 타는 듯이 더운 날에 회색 모사주의를 입은 사람, 수목 양복을 입은 사람, 굵은 베옷을 입은 트레머리 여학생, 시꺼먼 옷을 입은 청년 ㅡ 두 여학생을 제한 남자 쳥년 세 사람은 모두가 폐병자들같이 뼈만 남은 떼거리였다. 그 꼴에도 그들은 아주 익숙한 친구의 집에나 들어서는 듯이 주인 격의 준명이가 안내도 하기 전에 마루 위로 척척 올라앉는다. 그 기쁨에 넘치는 얼굴과 웃음, 쾌활하고도 구수한 언어, 그 모든 동작이 속된 세상의 보통 인간들과 같은 생활을 하지 않는 기인(奇人)들인 것만은 추측할 수가 있었다.

   어쨌든 나는 주인이요, 저들은 손님이므로 손님 대접으로 점심을 시켜오려고 준명과 수근수근 하노라니 일행 중에 1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점심은 시키고 왔으므로 곧 올 것입니다."

   나는 더욱더욱 이상도 한 사람들이라고 놀라면서 인사를 청하니 웬일이요, 웬일이요, 우리 남매가 마주앉기만 하면 이야기 하던 신앙의 사표(師表) 간도의 이호빈 씨와 한국의 이용도 씨가 오신 것이었다. 이용도라는 말을 들으매 3년 전의 그 형상을 환상하니 그렇게 열렬히 외치던 그 전도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호빈이라는 석자 역시 귀에 익숙히 들어두었던 이름이요, 다른 3인도 다 깊이 기도 생활을 하시는 신앙의 동지들이었다.

   마음에 넘치는 기쁨을 발표는 못하거니와 그때에 나의 영은 은근히 '주께서 나의 신앙 행로의 외로움을 살펴주시는도다' 하는 감격에 넘쳤다. 이 형제들이 남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역두(驛頭)에 내리면서 시켜놓은 국수가 벌써 들어온다. 내 집에 오는 손님은 내가 대접한다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었는데 손님이 주인의 국수를 시켜온 것부터가 이상하거든 또 한 가지는 일체의 시중을 손님된 그들이 하는 일이라. 육수국이나 내 손으로 좀 부어드리려고 주전자를 잡았더니 청년 이 목사는 자기가 이 일까지도 하여야 기쁘겠노라고 내 손에 들린 주전자를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나는 무엇이라고 형용키 어려운, 사실 이때까지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별세계의 사귐, 그 봉사의 정신에 머리가 띵하였다. 주는 자가 더 말이 없고 받는 자가 또 말이 없으나 나도 모를 위대한 영적감파(靈的感波)가 나의 영 위에 큰 감화를 일으키었다.

   점심 후에 여러분이 다 누워 피곤한 잠을 이루시기에 오후 배달 편에 온 서신을 정리하려고 사무실에 가서 급히 일을 마치고는 저녁이나 한 끼 대접하려고 장을 보아가지고 집에 오니 남행차로 벌써 다들 떠나신 후였다. 이때의 나의 섭섭함과 가슴의 알근함은 아직도 그때 같이 안타깝게 기억되어 있다.

   그 후 그 가을에 삼방(三防)에서 동지들의 회합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들었다.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참으로 간절했지만 때마침 미 순회 때라 선교사들이 그 회가 열리는 명사십리에 가고 원산구역의 모든 일을 나 혼자서 전부 맡게 되었으므로 촌가(寸暇)를 얻지 못하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또한 천추의 한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33년 3월 12일은 주일이었다. 마땅히 예배당으로 가야 할 터인데 성경 찬미를 들고 나선 걸음은 불현듯 광석동 이용도 목사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있었다. 주일 저녁예배를 보기 위하여 온 집이 다 비고 오직 병석에 누운 이 목사님과 병을 간호하는 인자 형만이 남아 있었다. 아랫방에 혼자서 자리에 힘없이 누워있는 용도 형. 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윗방에서 잠깐 내려다 본 나는 마음속에 말못할 비애를 느끼고 방바닥에 엎드려졌다. 나의 기도소리는 울음에 떨렸다. 이는 병든 동지를 위한 하늘에의 간원이었다. 내가 기도를 마치고 머리가 땅에서 일어나려는데 죽은 듯이누웠던 용도 형은 가볍게 몸을 날려 내 곁에 와서 손을 내 머리에 앉으시고 기도를 하신다.

   "주여, 이 딸을 사랑하시나이까? 이의 육체로 일어나는 전부를 죽이소서. 죽을 땅으로 보내소서. 이 딸의 몸에 주신 피와 살이 만방을 살리는 번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와 한 가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길을 걷게 하시고 성결한 사귐 속에서 죽든지 살든지 부딪치는 파란을 예수의 사랑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이제 이 딸로 하여금 주의 명하신 바에 죽도록 순종하게 하시옵소서. 이 땅에 자기의 사복(私腹)을 채우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여성이 많고 또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남을 죽이기까지하는 여성이 얼마나 많은 중에서 이 딸로 하여금 제 몸을 죽여 남을 살리시는 주님을 본받게 하시오니, 오 주여, 그 길에서 아름답게 죽어지게 하옵소서."

   여기까지 이르러 목사님의 목은 메어 더 말을 이루지 못 하게 되었다. 더 말로 기도를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침통한 심도(心禱)를 올리다가 기도는 끝나고 말았다. 오, 이날 밤의 이 힘 있는 기도! 이 기도의 많은 말은 내 영에 깊이깊이 심겨졌다. 의외의 축복! 죄인으로서 감당 못할 이 축도는 감격에 넘치고 심신에 투철(透徹)퇴어 영원히 감명되어 있는 바이다. 너 죽어 남 살리라는 말을 어느 교역자를 통해서도 과거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는 감격에 넘친 황송한 울음에 생전 처음 목 놓고 울어 보았다. 이 저녁 이 축도에서 굳게 맹세한 결심이 아직까지 가슴에 살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축도 그대로 내 생활이 실행되지 못함이 슬픈 일이라. 예수의 말씀이 2천년 동안이나 뭇 생명 속에서 살아있듯이 그때 지녁의 이 형의 간절한 기도가 내 마음에 살아있음에 불민(不敏)하나마 그가 가신 자취를 따르다가 죽어보려고 애는 쓰고 있다. 이는 이미 가신 형의 영을 위로함도 되겠지요. 형이 가신 지도 이미 3년째 되어오나 그날 저녁의 그 장면은 더욱이 눈에 떠오른다. 고(故) 형이 나를 위하여 간구의 축도를 하신 것이 예수를 위해서요, 그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져 병들어 눕고 또 청춘에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주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이었음을 나는 믿는다. 세상에서 많은 고생을 하시었고 만년(晩年)에 갖은 구박과 멸시 그리고 최후의 고배를 받으시면서 단장의 울음으로 이 백성들의 생명을 염려하는 간곡한 기도를 남기시고 가셨으니, 우리 후진(後進)은 형의 기도를 그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눈물의 기도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1936년 말

 

   글은 글쓴이의 인격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한의정 싸의 글은 그가 얼마나 한결 같은 충절의 인물인지, 진실하고 소박한 일심의 사람인지 투명하게 보여준다. 열심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고 신앙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다가 하늘로 간 이후의 행보를 보아도 이분의 진실함을 알 수 있다.

   20세기 우리민족은 일제에 의해 그리고 6.25에 의해 수많은 위인들을 잃었다. 남북의 위인들만 아니라 간도의 위인들도 잃었다. 대단히 안타깝고 큰 손실이요 뼈에 사무치는 슬픔이다. 이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나라까지 나뉘어버렸다.

   국토가 작아지니 국민의 마음과 생각도 작아졌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문화 적응력을 기를 공간이 대폭 축소되었다. 스마트폰에 갇힌 좁은 삶은 이웃에 대한 열림 삶을 막아서고 있다. 우리의 역사, 문화에 대한 씁쓸한 무관심 가운데 세계화의 탈을 쓴 서구화가 덧입혀 정체불명의 정신, 생활 문화가 현대 한국인을 피폐하게 만들고 이다. 일제의 만행과 6.25의 폐해, 그 악작용이 아직까지 때로 생생하게 때로 은근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다.

   눈물이, 이긴다. 지난날의 아픔을 돌이켜보며 눈물을 쏟자. 눈물로 마음의 상처들이 씻겨나갈 때 우리 민족의 창조성과 자유로움, 호탕함과 관대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상처를 회복하고 나면 미국, 중국, 일본만 아는 좁은 세계관에서 캄보디아, 라트비아, 아르메이나처럼 아픈 역사를 겪은 민족들을 바라보는 의로운 마음공간도 회복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한국교회는 21세기 세계 선교에 투신할 수 있다. 고난의 20세기를 통과하던 선진들께서 보여주시었던 경건과 자세는 21세기에도 이런 식으로 동일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이용도 목사님이 한의정 씨를 위해 드렸던 기도, 생전 처음 목 놓고 울게 한 그 기도, 그녀가 순교의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을 그 기도를, 오늘 '나의 것'으로 삼자.

 

 

"이 땅에 자기의 사복(私腹)을 채우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고 또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남을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중에서 소자로 하여금 제 몸을 죽여 남을 살리시는 주님을 본받게 하시오니, 오 주여, 그 길에서 아름답게 죽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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